29화<고독전(5)>
경합 참가자 10호이자 태을묵검파의 간자⎯ 당극린은 사생아였다.
당가에서 사생아였다는 뜻은 아니다.
원래 이름은 막인극으로, 태을묵검파 장문 막인후와 그를 모시는 시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생아였지만, 막인극은 아주 출중한 자질을 타고났다. 어렸을 때부터 무학에 대한 오성이 남달랐다.
그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당연히 아비인 막인후였다.
‘...실로 아까운 자질이다.’
시험 삼아 심법을 비롯한 몇 가지 무학을 가르쳐 본 막인후가 탄식할 만큼, 막인극은 무공에 두각을 드러냈다.
막인후는 시녀였던 막인극의 어미를 비밀스럽게 첩실로 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인극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막인후에게는 어린 막인극 말고도 세 아들이 있었는데, 후계 싸움을 염려한 그는 일찌감치 셋 중 가장 뛰어난 자질을 보이던 큰아들을 정당한 후계로 선언한 뒤였다.
막인극이 설 자리는 없었다.
애초에 그가 살아있을 수 있는 것부터가 이미 후계가 확정된 덕분이었다. 막인후의 정실부인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대부분의 어미가 그렇듯이. 아마 장자의 후계 자리가 위협받는다 생각됐다면 첩실로 들이기도 전에 막인극 모자에 손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막인후는 알고 있었다. 아직 어린 막인극이 세 아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이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아무리 정통성이니 적자니 해도 태을묵검파 역시 무가다.
지금이야 장문의 권위로 후계 구도를 공고히 다질 수 있지만, 10년, 15년 후에는?
그때 막인극의 무위가 장자 녀석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다다라있다면, 문파 중진들의 의중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을 터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계 구도가 불안정해진다는 얘기다.
힘을 갖추게 되면 막인극 본인의 의중도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막인후가 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태을묵검파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필시 피바람이 불겠지.
막인후는 문주로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평온한 승계를 위해 가장 뛰어난 자질을 지닌 막내 녀석을 완전히 치워버리던지,
혹은 그 자질을 인정하고 태을묵검파를 위해 혈풍을 감내할 것인지.
어느 쪽이건 피가 흐를 수밖에 없었다. 전자를 택하자니 당인극이 타고난 자질이 너무도 아까웠고, 후자를 택하자니 내분으로 깎여나갈 태을묵검파의 전력이 우려됐다. 사도천하가 된 사천은 철저하게 강자존의 논리가 흐르고 있었으므로.
막인후의 고뇌는 깊어져만 갔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뭐?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소가주를 정한다고...?’
당가의 소가주 경합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것이 계기였다. 막인후의 뇌리에 하나의 가능성이 섬전처럼 떠올랐다.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막내 녀석을 당가의 간자로 투입한다. 당가에서도 핵심적인 인물과 엮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그리고 경합에 참가. 막인극의 재능이라면 분명 당가 내에서도 수위권일 터였다.
‘잘하면 당가의 소가주 자리도 노릴 수 있다!’
최상의 경우에는 태을묵검파는 태을묵검파대로 장자가 이어받고, 당가 역시 막내가 이끌게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쇠락했다고 한들 당가는 당가였다. 저력이 있는 가문을 손쉽게 삼킬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막인극이 소가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나쁠 건 없었다. 듣자하니 경합은 생사를 두고 다투기도 하는 모양인지라, 당가의 자라나는 새싹들을 밟아놓는 것도 커다란 공이었다. 충분히 무위를 쌓고 돌아와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을 수도 있을 테고, 아예 당가의 심부에 침투한 간자로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막인후는 비밀스럽게 어린 막내를 만났다.
‘네게 제의를 하나 하마.’
‘따르겠습니다. 아버님.’
‘...나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만.’
‘불초 소자 때문에 심려가 크시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건방지게도 제가 세 분 형님보다 조금 더 나은 자질을 타고난 때문이겠지요.’
‘.......’
‘아버님은 일문을 이끄시는 지존이십니다. 그러하신 분이 오랜 숙고를 거쳐 최선이라 판단하신 결론이니 그게 무엇이 되었건 마땅히 따라야겠다는 게 소자의 생각입니다.’
‘...막내야.’
막인후는 어린 막내아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순간 크게 감명 받았다. 다른 세 아들과는 그릇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널 당가의 간자로 만들 생각이다.’
‘간자... 말입니까.’
‘그래. 이미 위장할 신분은 구해뒀다. 방계의 인물로 조실부모한 고아가 될 거다. 이름은 당극린이다.’
‘당극린....’
‘내가 너를 미워해서 밖으로 내돌리려는 게 아니다. 외려 기회를 주기 위함이지.’
‘기회라시면?’
‘곧 소가주의 자리를 두고 당가 내에서 경합이 열릴 거다. 그곳엔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않고 당씨성을 쓰는 기재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을 거라더구나.’
‘그럼 소자가 그곳에서 승리하면 되겠습니까.’
‘네 자질이 범상치 않으니 그걸 기대하는 것도 있다만, 꼭 우승하여 소가주 자리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 수위권에 들기만 해도 차기 당가의 핵심 인물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당가의 전력을 약화시키도록 해라. 그게 곧 네 공적이 될 것이고, 언젠가 본파에 돌아오게 됐을 때 그걸 빌미로 네 자리를 확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즉.’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리로 와라. 네게 태을쌍검식(太乙雙劍式)을 전수해주마.’
‘아버님, 그건...!’
막인후는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인지, 심경의 변화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막인극에게 온전한 태을쌍검식을 전수해주었다. 태을묵검파의 문주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그렇게 막인극은 당극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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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사실을 알려주는 이유는⎯”
당극린이 품속에서 비도를 한 자루 더 꺼내들었다. 던졌다 받았다 한 것까지 두 자루. 양손에 나눠들자 마치 쌍검을 들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죽이겠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양손을 부(父)자로 교차한다. 당가에는 없는 어떤 무공의 기수식. 흔치 않은 자세다. 처음 보더라도 누구나 그 특징을 알아차릴 만큼.
“...태을쌍검식.”
당정일이 힘 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저건 태을묵검파 장문인 막인후의 독문무공으로 알려진 검식이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에게 하사받았다던가.
막인후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당극린이 간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였다. 그리고 당정일은 이제 스스로의 목숨을 걱정해야 했다.
“알아보는 걸 보니 눈은 제대로 박힌 모양이군.”
당극린이 이죽거리는 것과 동시에 비도에서 불길한 흑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아는 이들은 묵검기(墨劍氣)라 부르는 것이었다. 태을쌍검식을 제대로 익혔다는 방증.
‘이건 당해낼 수 없다.’
부딪치기도 전이었지만, 당정일은 기세가 꺾였다. 당정일 역시 어느 정도 발달된 기감을 갖추게 되었기에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당극린의 묵검기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장난이 아니었다. 완전히 대적불가.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이런 기운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도주도 쉽지 않았다.
이미 신법도 저쪽이 훨씬 위인 것을 확인한데다가, 묵검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이 조금씩 당정일의 몸을 얽어매고 있었다. 상대의 움직임에 제약을 가한다⎯ 두말할 것 없이 상승의 무공이라는 얘기였다.
“그래. 그 표정이지. 다들 그 얼굴로 죽어갔다.”
당정일을 바라보며 당극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잠깐 다른 녀석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듯했지만, 결국 이놈도 죽음 앞에서 절망할 뿐이다⎯ 그런 생각이 당극린을 우월감에 젖게 했다.
“그럼, 죽어라. 시체조차 남기지 말고.”
후욱⎯!
당극린의 신형이 한 줄기 바람처럼 사라졌다. 태을쌍검식은 극쾌, 극강의 검술이었다. 방어나 회피 따위는 일절 생각지 않는 공격 일변도의 검초들로 구성되어 있다. 태을쌍검식을 대성하게 되면 어마어마한 쾌검으로 상대를 완전히 저밀 수 있게 되는데, 실제로 태을묵검파 문주 막인후는 종종 상대의 살점을 종잇장처럼 저며 회를 뜨듯 죽이곤 했다. 그를 상대한 이들은 시신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연하게도 당정일의 안법 수준으로는 당극린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쫓지 못했고, 그런 당정일을 보며 당극린이 비도를 휘두를 때였다.
핏.
“어?”
당극린은 팔을 휘두르다 말고 멈춰서 멍청한 목소리를 뱉었다. 지금, 뭐였지...?
털썩.
당극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신에서 급속도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독이다.’
무엇에 당했는지 깨달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대체 언제? 누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쿵.
의문이 가득한 채 당극린은 옆으로 쓰러졌다. 더 이상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극심한 복통이 시작됐던 것이다. 마치 내장들 각각이 오체분시를 당하는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한편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던 당정일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누구...십니까.”
잠깐 고민하다 존대로 바꾸면서 슬쩍 쓰러진 당극린을 살핀다. 당극린의 목에 작게 박힌 무언가가 보였다.
‘우모침...!’
고독전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봉위대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본가의 인물이다. 그렇게 판단한 당정일의 만면에 희색이 떠올랐다. 살았다...!
“이 녀석, 자기 입으로 간자임을 시인했습니다! 태을묵검파의 사람이 분명해요! 대장로 역시 관계가 있을 지 모릅....”
당정일은 허겁지겁 말을 하다 말고 놀란 표정으로 갑자기 나타난 사내를 바라봤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도 있을까.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미형의 사내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연히 당정일은 그가 경합 참가자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른 조의 봉위대 무사인가? 엄청난 고수다.’
우모침은 효율적이긴 했지만 살상력이 뛰어난 암기는 아니었다. 독을 묻히더라도 극히 미량만이 침투될뿐더러, 애초에 투척 자체가 쉽지 않았다. 가느다란 세침류 암기들은 공기의 저항을 뚫는데 이미 실린 경력 대부분이 소진되곤 했다. 그렇다고 경력을 크게 실으면 은밀함이 퇴색된다.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궤도가 틀어지기도 하고.
그래서 수십 개의 우모침을 다발로 던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것도 살상보다는 견제의 목적이 컸고.
그런데 고작 하나의 우모침으로 그토록 뛰어난 실력을 지닌 당극린을 제압한 것이다. 암기술의 대가라 보는 게 합당했다.
그렇게 당정일이 내심 추측을 하고 있는데, 사내가 다가오며 말했다.
“하나도 안 변했네. 이름이... 정일이였지. 주먹은 다 나은 건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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