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고독전(9)>
“당가십독이라고?”
“그, 그래...!”
당영령은 불안한 눈빛으로 독병을 바라보며 긍정했다. 불현듯 어릴 적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외조부를 입에 담으며 협박해보았지만 놈, 당연명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손을 썼었다. 그리고 품에 있는 독과 해약들을 가져가더니 몸 여기저기에 끼얹었었지. 그 일로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버렸지 않나.
만약 화룡호독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당연명은 분명 당영령의 입에다 흘려 넣었을 것이다. 당영령은 화룡호독에 당했던 소년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엔 화룡호독의 열기에 시신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기에 독의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한편.
‘당가십독이라니.’
당연명은 독병 안에 든 붉은 액체의 정체에 살짝 놀라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당영령이 말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자칫 이 귀한 걸 낭비할 뻔하지 않았나.
독요청광심법을 대성한 당연명에게 있어 극독은 곧 내력증진의 공능을 가진 영약이나 다름없다. 당가십독이라면 독문인 당가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지독한 독이니 분명 유의미하게 독요청광기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양이 많지 않아 아쉽긴 했지만, 어쨌거나 작지 않은 소득이었다.
하지만 당연명은 그러한 내심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서 오히려 독병을 당영령 쪽으로 더 기울였다. 아직 물어볼 것들이 있었던 까닭이다.
“제갈가와는 무슨 관계지?”
“그보다, 컥. 이것 좀... 치워 줘.... 제발.”
“대답이 먼저다.”
당연명의 단호한 태도에 당영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독병이 조금만 더 기울어지면 시뻘건 화룡호독이 당장에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넘실거리는 죽음이 코앞까지 닥친 듯했다.
“...놈들이, 고독전에 개입해서 도움을 주겠다고 했어. 소가주가 될 수 있도록.”
“진법을 조작한 건가? 널 제외한 나머지 참가자들이 먼저 치고 받고 싸우도록?”
“...맞아.”
정확히 말하자면 화룡호독에 죽은 소년 하나는 그녀 쪽에 배치되었지만 당영령은 굳이 그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짐작이 맞았군.’
당연명은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처음 고독전이 시작됐을 때 느꼈던 감시의 눈길. 그것도 제갈가의 수작이었겠지.
“이것 좀....”
당영령의 애원하는 듯한 어조에 당연명은 화룡호독이 담긴 독병을 회수했다. 일단 원하는 대답을 들었으니까. 다음으로는 하늘을 보도록 뒤로 꺾었던 목을 다시 원래대로 해주었다. 말하는 것이 불편해보였기에. 아직 물어볼 것이 남은 까닭이다.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숨을 쉬는 당영령에게 당연명이 계속해서 물었다.
“당극린은? 놈도 제갈가와 엮여 있나?”
“당극린? 다른 조장들에 대해서는 몰라. 정말로.”
“그럼 제갈가는 널 도와주는 대가로 무얼 요구했지?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들은 우리 당가에 복속되고자 해. 가세가 너무 기울어서 이젠 가문을 존속하는 것도 어렵다던데.”
“그래서 본가의 산하로 들어오겠다? 그럼 이번 경합에 개입한 것은 명백한 부정으로 봐야겠군. 차기 소가주를 뒷배로 두려는 수작이었던 거니까.”
“...그렇지.”
“하지만 뭘 믿고? 숨기지 말고 말해. 제갈가에서 뭔가 다른 조건을 더 내걸었을 텐데?”
당연명의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혼사! 혼사를 약조했어...!”
“혼사? 너랑?”
“...그래. 제갈가의 도움으로 내가 소가주의 자리에 오르면 제갈가에서 정해주는 후기지수와 혼인을 하기로 했어. 내겐 나쁠 것 없는 제안이라고 여겼어. 어차피 낯짝이 이 모양이니까....”
“동정을 사려는 거라면 관둬. 통하지 않으니까.”
당연명은 냉랭하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이번 경합은 장난이 아니었다. 여러 장로들을 비롯해 가문의 핵심 인물들이 모조리 엮여 있는 행사다. 다름 아닌 차기 당가를 이끌어갈 재목을 선별하는 자리였으니까.
제갈가에서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일을 벌인 것일 텐데, 고작 당가의 산하로 들어오면서 소가주라는 뒷배를 얻는 것밖에 득이 없다...?
‘수지가 맞지 않아. 당가를 통째 집어삼킬 속셈이 아니고서야.’
당연명은 어느 정도 진실에 근접한 결론을 내리고 제갈가에 대한 것은 뇌리 한편에 밀어 두었다. 제갈가에 대한 처분을 내리는 것은 급하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고독전 개입에 대한 심증이 사실로 굳어졌으니 외려 저쪽에서 불안해하지 않을까. 당영령 대신 자신이 소가주가 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당연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을 물어볼 때였다.
“당가십독은 어떻게 구한 거지? 가문에서도 귀하게 취급되고 있을 텐데.”
“...그건.”
“보나마나 네 외조부가 빼돌렸겠지. 걸리지만 않는다면 고독전에서 확연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테니.”
“.......”
당영령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당가십독을 밀반입한 것을 들키게 되면 그녀는 물론이고 외조부인 삼장로 당석형까지 끝장이다. 하지만 핑계거리조차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이건 무슨 독이지? 당가십독 중에.”
당연명도 당가십독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독인지, 외견상 특징이나 독효는 어떠한지 그런 것들 말이다.
“...화룡호독이라는 거야.”
“화룡호독? 특이한 이름이군.”
“독 중에는 열독이나 한독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다고 해. 화룡호독은 열독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독이야. 당가십독에 들어갈 만큼.”
“그리고 그걸 나한테 쓰려고 했고?”
“.......”
당영령은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고....
‘돌아버리겠네.’
아닌 게 아니라 당영령은 지금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이 꼴로 만든 원수를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만났는데, 제대로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제압 당한데다가 절대 들켜서는 안 될 당가십독까지 들키고 말았다. 이대로 고독전이 끝나고 당연명이 소가주가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마 외조부인 삼장로 당석형은 실각할 것이고, 그녀 역시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며 기회를 노려보려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한쪽 팔은 혈도를 제압당해 아예 쓸 수 없고, 목까지 잡혀 있었으니까. 게다가 당연명이 궁금해 하는 것도 이제 바닥난 것 같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파국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위기를 벗어날 방도가 보이지 않는다.
당영령은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화룡호독이 담긴 독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천지가 개벽하더라도 놈이 자진해서 저걸 마셔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설령 화경에 이른 고수라 해도 중독된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극독 중의 극독⎯ 당가십독.
그걸 놈이 잠시 목이 말라서 벌컥벌컥 들이켤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전부터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연명이 화룡호독이 든 독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당영령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입에.
“독으로는 날 어찌할 수 없어.”
극독이라 해봐야 그저 영약에 불과할 뿐⎯ 그렇게 덧붙이며 당연명이 화룡호독을 입에 털어 넣었다. 곧 목울대가 꿀렁였다. 시뻘건 독액을 삼킨 게 분명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당영령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경악과 희열이 교차하는 감정을 느꼈다. 이런 천운이 있을 수가 있나? 당연명이 잠깐 실성이라도 한 걸까? 다른 것도 아닌 당가십독을 삼키다니...!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이 굽어 살피는 게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다.
‘천지신명이시여. 원시천존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생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당영령은 당연명을 주시했다. 자신만만하게 당가십독을 들이켰으니 이제 곧 무언가 반응이 올 터였다. 어쩌면 내장부터 불길이 치솟을 지도 모른다. 불길이 옮을 지도 모르니 바로 팔을 뿌리치고 멀리 떨어져야겠다.
그렇게 당영령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곧 벌어질 일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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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산이 보이는구려. 막 장문.”
황색 무복을 입은 천진방 방주 정연송이 말했다.
“음.”
흑색 쌍검을 교차로 매고 있는 중년 사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태을묵검파 장문 막인후였다. 그의 뒤로는 얼추 삼백은 넘어 보이는 대인원이 도열해 있었다. 복색은 제각각이었다. 각기 소속이 다르다는 의미다. 가장 많은 것은 역시 태을묵검파였다.
막내아들이자 당가에 간자로 보내두었던 막인극의 죽음을 알게 된 후, 막인후는 곧장 병력을 이끌고 나섰다. 아들의 죽음에 분노한 것도 있었지만 막인극이 죽었다는 것은 곧 당가의 소가주 경합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의미인 까닭도 있었다. 놈들이 당가로 돌아가기 전에 공동산에 묻어버리고자 했다.
미리 얘기가 되어 있던 다른 문파들에 서신을 보냈고, 그들 중 거리가 가까운 이들은 각기 조금씩 인원을 보내왔다. 천진방과 현중도문, 그리고 목영궁에서 인원을 파견했는데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천진방에서는 아예 방주 정연송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왔다.
“그나저나 당가의 애송이들을 처치하는 데 조금 과한 전력이 아닌가 싶소만.”
천진방주 정연송의 말이었다. 막인후가 부탁하기에 그 역시 천진방의 주요 전력을 이끌고 온 참이었다. 태을묵검파와 천진방의 인원들만 이백 남짓이었다.
“물론 당가의 뜨내기들만 상대한다면 정 방주의 말대로 과한 전력이 맞소. 하지만 저 산에는 당가 놈들만 있는 게 아니지 않소?”
“그 말씀은, 공동파를 염두에 둔 것이구려?”
“그렇소. 애매한 전력을 동원했다면 필시 공동파가 움직였을 것이오. 구파는 더 이상 세가라 불리지 못하는 당가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 봐야 할 터. 자칫 우리가 토벌 당할 위험도 있는 것이오. 아마 당가에서도 이 점을 생각하고 공동산에서 경합을 진행하는 것이겠지. 하나 이만한 인원을 대한다면 저쪽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 틈에 당가 놈들을 끝장내면 되지 않겠소?”
“과연. 알겠소. 이걸로 당가 놈들이 이십년은 퇴보하겠구려. 기껏 모아서 갈고 닦아놓은 후기지수들이 채 꽃피기도 전에 모조리 귀천할 테니...!”
“바로 그렇소. 권력을 탐하는 장로원 놈들의 알력 싸움도 한동안 더 이어질 거고.”
막인후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정연송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한데, 막 장문.”
정연송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갑자기 생각나서 그러는데... 그 왜, 예전 회합 때 작은 씨앗을 심어두었다지 않았소? 당가가 통째로 수중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 그때 뿌린 씨앗은 어찌 된 거요? 그게 줄곧 궁금했다오.”
“...실패했소. 하지만 덕분에 경합이 끝나간다는 것을 알게 됐소.”
“참가자 중에 세작을 심어둔 모양이오? 능력도 좋군. 아까운 일이기도 하고.”
“그렇소. 아끼는 놈이었는데....”
차마 아들이었다는 것을 밝히지는 못하고 그저 말끝을 흐리며 막인후는 걸음을 내딛었다.
“그만 갑시다.”
겨우 살기는 억눌렀지만, 고랑마냥 발자국이 깊게 패는 것은 감추지 못한다.
정연송은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 사정이 있음을 짐작하곤 말없이 뒤따르며 생각했다. 설마하니 숨겨놓은 자식이었던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 뒤를 제각각의 무기를 패용한 삼백의 인원이 따랐다. 줄지어 공동산에 입산하는 광경이 개미떼 같았다.
햇볕이 본격적으로 내리쬐는 오후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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