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오판>
진법으로 만들어진 비밀스러운 공간.
이지적으로 생긴 중년 사내가 초조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늘 여유롭게 펼쳐들곤 했던 섭선마저 허리춤에 매어둔 채였다. 무언가 불안한 기색이 전신에 흘렀다.
‘완전히 오판을 했다...!’
중년 사내, 제갈창신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신의 피가 차게 식는 듯하다. 간만에 느끼는 위기감으로 인한 것이었다.
4년 차에 들어선 당가의 소가주 경합⎯ 그 마지막 과정인 고독전에서 제갈가는 승리할 가능성이 유력한 후보 셋을 추려냈었다. 2호와 10호, 그리고 28호.
그간 보여준 자질로는 28호가 가장 뛰어난 듯했지만 오히려 제갈창신은 그를 배제했다. 경합에서 패배시킨 뒤 제갈가의 품으로 끌어들일 심산이었던 까닭이다. 그보다 떨어지는 2호나 10호를 당가의 소가주로 만들고자 했다. 제갈가에게 빚을 지는 형태로.
결과적으로 2호 당영령은 제갈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10호 당극린은 제안을 거부했다.
당극린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는 이미 혼인이 예정된 상대가 있었다. 다름 아닌 스승이자 대장로 당석중의 친손녀가 그 상대였다. 제갈가를 뒷배로 둘 수 있다는 건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대장로의 확고한 지지가 더욱 중요했다.
또한 당극린의 진정한 신분은 태을묵검파의 간자였기에, 제갈가와 엮이는 것은 괜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태을묵검파의 비전 검식을 몸에 지니고 있었으니 실력으로도 고독전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고.
이렇듯 당극린에게 역으로 약점을 잡힌 꼴이었지만, 제갈창신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참가자들 대부분과 당극린, 당연명을 가까이에 배치해놓으면 알아서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을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2호 당영령이 소가주가 되면 가볍게 해결될 문제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막상 고독전이 시작되자마자 제갈창신은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먼저 당연명⎯ 28호의 실력이 완전히 상정 외였다.
진법 세계 내에서의 감시를 단박에 간파해낼 정도의 기감과 안법, 그리고 공간 자체를 잘래는 듯한 검술까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무위를 보이는 게 아닌가?
10호인 당극린 역시 범상치 않았다.
제갈창신은 고독전이 펼쳐지고 있는 진법 세계 내부를 비전 안법인 진명안으로 관찰하거나 고독전 참가자들의 생존 여부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당연명에 의해 진법 세계와 진명안의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끊어진 탓에 참가자들의 기척만 파악하고 있었다.
당연명을 감시하는 것은 포기하고, 계획대로 진법을 조작해 참가자들끼리 맞닥뜨리게 유도하고 있었는데, 당극린과 마주친 이들의 기척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당극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참가자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건 실력 차가 확연하지 않고는 있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당극린의 독주는 오래가지 않았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던 당연명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당극린과 마주했고, 곧 당극린의 기척이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자 처음으로 살아서 탈락한 자가 진법 세계 밖으로 나왔다. 당정일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다. 녀석에게 자세한 것을 캐묻고 싶었지만, 봉위대 무사들 때문에 그러기도 힘들었다.
온전히 추측으로만 내부의 상황을 짐작해야 했다.
제갈창신은 이제 고독전이 펼쳐지는 진법 세계 내에 살아남은 참가자는 단 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호 당영령과 28호 당연명.
둘 중 누가 고독전에서 승리하느냐에 따라 제갈가의 명운이 갈린다. 당가의 차기 주인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도, 더없는 적대를 받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당가의 지원이 없으면 제갈가는 완전히 몰락할 수밖에 없다⎯
제갈창신은 이제 인정해야 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둘 다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초가삼간까지 모조리 태워먹게 생겼다는 것을.
과연 당영령이 당연명을 죽이거나 쓰러뜨리고 고독전의 최후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어렵다.’
제갈창신은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불확실한 가능성에 가문의 미래를 맡겨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그때였다.
‘뭐지?’
제갈창신이 있는 이 공간은 칠쇄환궁진의 내외부를 감지할 수 있는 핵심 영역이었다. 제갈창신은 문득 진법 외부에 무수히 많은 이들의 기척이 잡히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이백... 아니, 삼백은 넘는다. 대체 어디서 이런 인원이?’
제갈창신의 눈이 금세 회백색으로 물들었다. 제갈가의 비전 안법인 진명안을 펼쳐 진법 외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고독전이 펼쳐지는 진법 세계에는 더 이상 진명안을 연결할 수 없었지만 칠쇄환궁진 외부는 진명안으로 탐색할 수 있었다. 곧 칠쇄환궁진 외부의 풍경이 제갈창신의 뇌리에 들어왔다.
여러 세력들이 섞인 것처럼 복장과 무기가 가지각색이었다. 그들을 살피던 제갈창신이 살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저 자는...!”
선두에 있는 자들 중에 특징이 뚜렷한 이가 보인다. 흑색 쌍검을 교차해 매고 있는 중년 사내. 제갈창신은 그를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특징만으로 그가 바로 태을묵검파 장문인 막인후라는 것을 알아봤다.
태을묵검파라면 사천에 자리 잡은 흑사련 휘하 여러 사파들 중에서도 제법 손꼽히는 방파였다. 그런 곳의 주인인 막인후가 하필 왜 이곳 공동산에 나타났을까. 그것도 전투를 준비하듯 삼백이 넘는 대인원을 이끌고서 말이다.
게다가 지금은 사천당가의 소가주 경합이 막바지로 치닫는 와중이었다.
장소와 시기가 공교로웠다.
‘...간자라도 있었던 건가.’
봉위대나 당가의 핵심 인물 중에 세작이 있었을 가능성을 헤아리면서, 제갈창신은 대책을 생각했다. 보아하니 칠쇄환궁진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일정 범위를 둘러싸고 조금씩 간격을 좁혀 오고 있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시간문제일 뿐 결국은 진법의 존재를 들킬 수밖에 없었다.
‘공동파가 움직여줄 가능성은 적다.’
당가는 소가주 경합을 준비하면서, 미리 공동파에 양해를 구해둔 뒤라고 했다. 즉 이 엄청난 인원의 불청객들이 자신들을 향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공동파에서 짐작할 거란 얘기다. 영역을 대놓고 침범하는 게 아닌 이상 공동파에서도 굳이 나서서 제자들의 피를 흘리기보다는 관망을 택할 공산이 컸다. 구파로 불리던 때와 달리 육파는 이제 척마멸사의 기치보다는 보신을 중시하기에.
결국 이쪽의 전력만으로 상대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수적으로는 열세고.’
이쪽의 인원은 봉위대 무사들과 경합 참가자들을 모두 합쳐도 팔십여 명에 불과했다. 머릿수로만 따져도 세 배 이상 차이가 난다.
하지만 제갈창신의 얼굴에는 그다지 우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무언가 상대할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
‘본가의 절진을 우습게 봤군.’
상대의 인원이 많긴 했지만 이곳엔 제갈가의 절진이 펼쳐져 있었다. 칠쇄환궁진⎯ 일곱 개의 진법이 겹겹이 펼쳐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말인즉슨, 놈들의 전력을 일곱으로 분산시켜 각개격파를 노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봉위대 무사들의 암기술과 용독술이라면 진법 뒤에 숨어서 효율적으로 살상할 수도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아예 도주를 택할 수도 있었다. 진입하는 놈들을 칠쇄환궁진의 진법 하나에 몰아서 가두어 놓고, 봉위대 무사와 경합 참가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밖을 감시하는 것은 어차피 소수의 적일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잠깐.’
놈들을, 고독전을 위해 마련된 진법 세계로 들인다면?
지금 그곳에는 당영령과 당연명 둘뿐이었다. 그리고 제갈창신은 둘 중 당연명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고. 그 예상이 맞는다면 제갈가의 미래는 암울해진다. 당가에 합류하는 것조차 어려울 지도 몰랐다.
그럴 바엔, 차라리 사파 놈들의 손을 빌려 둘 다 해치워버리는 것은 어떨까.
제갈창신이 떠올린 것은 일종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남의 손을 빌려 살인을 행함)였다!
어차피 진법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그를 포함한 제갈가에서 파견된 인물들뿐이었다. 그들만 함구한다면 봉위대나 당가 본가에서 진상을 알 도리는 없었다. 영원히 비밀로 묻히는 것이다. 제갈가가 고독전에 개입했다는 것도, 제갈창신이 일부러 그들이 죽도록 손을 썼다는 것도.
“.......”
제갈창신은 침묵했다. 가문의 안위와 양심을 놓고 마지막으로 고민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제갈창신의 눈빛에 서늘한 독기가 흘렀다.
****
‘...왜 반응이 없지?’
당영령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당연명을 주시했다.
분명, 화룡호독을 꿀꺽꿀꺽 삼켰는데 왜 별다른 이상이 없는 걸까. 당연명은 그저 눈을 살짝 감고 있을 뿐이었다. 독을 음미하듯이.
문득 놈이 직전에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분명 독으로는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영령은 그 말을 거세게 부정했다.
세간에는 만독불침지체를 이룬 고수들에 대한 풍문이 떠돌기도 하지만, 그건 과장에 불과했다.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자연히 기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고, 그 능력으로 독기를 잡아두거나 배출할 수 있었다. 고수들은 신체능력만큼 독에 대한 내성도 뛰어난 편이었기에 시간만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독에 대처할 수 있었다. 만독이 불침한다는 말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 해도 대응할 수 없는 극독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당가십독이었다. 화경의 고수라 해도 중독된다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독.
한편 당가에는 만독불침지체와는 다르게 전설처럼 일컬어지는 경지가 있었다.
독인지경(毒人之境)⎯ 짧게 독인이라고도 칭하는 이 경지에 이르면 존재 자체가 독이 된다고 했다. 그 어떤 독도 독인에게는 해를 끼칠 수 없으며, 그의 숨결이나 피 한 방울로도 수십의 인명을 살상할 수 있다고 전해졌다.
이제는 잊힌 얘기였지만 당영령은 외조부에게 들어 그 경지가 실존한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설마하니 당연명이 독인지경에 이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화룡호독을 들이켜고도 멀쩡하다면 그것밖에 대답이 되지 않았다. 해약 따위는 존재치 않는 독이었으니까.
“좋군.”
마침내 눈을 뜬 당연명이 중얼거렸다. 눈에서는 진녹색 광채가 짙어졌다가 다시 희미해졌다.
화룡호독을 들이켠 당연명은 묘한 경험을 했다. 독요청광기가 체내에 들어온 화룡호독의 독기를 집어삼키면서 그 성질이 미묘하게 변한 것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양강(陽强)의 무학을 익힌 것만 같았다. 독요청광기의 본질은 분명 독이었지만, 열양지력까지 품게 된 느낌이었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극에 이른 열양공이나 한빙공은 분명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독요청광기 자체도 크기를 조금 키웠다. 소량의 화룡호독이었지만 내공량이 제법 증진됐다. 당가십독이라더니 이제껏 겪은 그 어떤 독보다 강력한 독기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당연명에게는 그저 효과 좋은 영약에 불과했지만.
‘소가주가 되면, 당가십독부터 알아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당연명은 당영령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떻게 당가십독을 먹고도 멀쩡할 수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당연명은 굳이 설명해줄 생각도, 이제 더 묻고 싶은 것도 없었다.
“너, 독인....”
“됐다. 그만 죽어라.”
당영령이 뭐라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당연명은 그대로 손에 힘을 줘 목을 뚝 분질러버렸다.
그렇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당영령은 숨이 끊어졌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손속⎯ 그러나 당연명은 목숨을 노렸던 이를 살려줄 정도로 물렁한 성격이 아니었다. 전생을 각성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어졌던 악연이 바닥에 철퍼덕 아무렇게나 널브러졌고, 당연명은 그런 당영령의 얼굴을 일별하고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예상이 맞는다면 이걸로 고독전은 종료되어야 했다. 이 진법 세계에 생존한 경합 참가자는 자신뿐일 테니까.
그러나 자리를 뜨려던 당연명은 곧 진법 세계가 크게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한밤중이던 하늘이 갑자기 밝아지며 태양이 떠올랐다. 이제껏 은밀하게 진법이 조금씩 변화며 지형이나 방향감각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이건 대놓고 제갈가에서 진법을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단치 않은 기감을 지닌 이들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고독전이 종료됨에 따라 진법이 해체되는 것인가 하고 잠시 생각했던 당연명이었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감각도 주사망역으로 한껏 확장된 기감에 엄청난 수의 인기척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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