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몰살(1)>
"꽤 상위의 진법인 거 같소. 막 장문."
진법 세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천진방주 정연송이 말했다.
"그런 것 같소."
흑검 두 자루를 교차로 맨 중년 사내, 태을묵검파 장문 막인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추적으로 당가의 인물들이 있을 만한 장소를 어느 정도 좁혀 놓았던 터라, 절벽으로 위장되어 있는 진법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법의 존재를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공동산 어딘가 당가의 인물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기에 기감을 예리하게 하고 수색을 시작하자 금세 찾아낸 것이다.
막인후는 큰 고민을 하지 않고 진입을 결정했다.
대개 진법이라는 것은, 환영과 같은 허상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숨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조금 더 정교한 진법은 아예 감각을 교란시키기도 했는데, 그렇다 해도 초감각이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기감을 벼린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막인후나 정연송 정도 되는 고수라면 진법 속에서도 길을 찾는 게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주하는 이들을 잡을 인원 삼십 정도를 남겨 놓고, 막인후는 삼백 남짓의 인원을 이끌고 진법으로 들어섰다. 다만 이상했던 점은 그들을 환영이라도 하듯 별 저항없이 진법이 그 속내를 보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진법에 들어서자 거짓말같이 풍경이 달라졌다.
절벽은 온데간데 없고 주변이 울창한 숲으로 변한 것이다. 막인후는 기감을 예리하게 돋워봤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들이 마냥 허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정연송 역시 그렇게 느끼고 말한 듯했다.
"우리 기감을 속일 정도의 진법이라, 추측컨대 제갈가 놈들이 얽혀 있는 것 아니겠소? 당가와 나란히 세가로 불리다 몰락해가는 처지이니 제법 교류가 깊을 지도."
"정 방주의 말씀이 옳은 듯 하오. 듣기로 제갈가의 진법은 술법의 영역에 닿아 있어 진상과 허상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하더이다. 단순히 감각을 교란하는 게 아니라 진법 안의 공간 자체가 확장된 채 실재하는 느낌이니, 제갈가의 진법이거나 그에 준하는 상위의 진법임이 분명하오."
"일단은 수색을 해봅시다. 막 장문. 뒤지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소? 진법 안이 넓다 한들 이쪽의 인원은 무려 삼백이나 되오. 흩어져서 찾는다면 금방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거요."
"그렇게 합시다."
막인후는 제자들에게 지시하여 넓은 범위를 수색케 했다. 진법이 제법 오묘한 듯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숨어있을 당가 놈들을 찾아보고, 보이지 않는다면 진법 자체를 파괴할 생각이었다. 그의 태을쌍검식은 흑사련주 유길준으로부터 하사받은 절기로 오늘날 그를 만들어준 극쾌, 극강의 검식이었다.
진법의 경계를 찾아내고 거길 향해 태을쌍검식을 쏟아내면 아마 진법은 그 힘을 감당치 못하고 부서져내릴 터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수색을 나갔던 수하들이 돌아왔다.
"장문. 진법의 경계를 찾았습니다. 묘하게도 점차 그 범위가 줄어들고 있는 듯한데...."
"사람의 것으로 짐작되는 육편과 혈흔이 몇몇 곳에서 보입니다. 기이한 건 마치 본파의 검식에 당한 것만 같은...."
"서쪽에서 비교적 온전한 시신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사인은 극독에 당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목 부근에 미세한 흔적이...."
보고를 들으며 막인후는 직감했다. 막내아들, 막인극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음을. 당가에서도 그가 알려준 태을쌍검식을 용케 수련했던 걸까. 수하들이 가져온 육편 몇 조각은 부패가 조금 진행된 상태였지만 태을쌍검식의 성취를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제대로 익혔구나. 장하게도.'
막인극의 솜씨로 보이는 육편 조각들은 아주 얇게 회를 뜬 것마냥 저며져 있었다. 혼자서 이 정도까지 익혀냈다는 것은 막인극이 지닌 재능이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는 의미였다. 막인후의 다른 세 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취.
"호오. 정말 귀파의 검식과 흡사하구려. 어째 태을쌍검식을 그대로 펼쳐낸 듯한데. 이 정도 실력을 지녔다면 당가에서도 손꼽히는 인재일 터."
천진방주 정연송이 감탄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는 여러 차례 막인후의 검식을 견식한 적이 있었기에 살점의 형태와 거기에 남은 검흔만 보고도 태을쌍검식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일단 서쪽으로 가봅시다. 그쪽에 또 시신이 있다하니. 십칠 세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라 하더이다."
"...갑시다."
막인후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경공을 펼쳐 이동하자 금세 수하들이 말했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내야.'
막인후는 다가앉아 시신을 살폈다. 한눈에 당극린, 아니 막인극을 알아봤다. 훌쩍 자라 청년이 되었지만 어릴 때의 얼굴이 조금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 얼마나 고통스럽게 숨이 끊어진 것일까. 눈을 까뒤집고 몸부림치던 자세 그대로 굳어있다.
외부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극히 미세한 침에 찔린 듯한 흔적이 두 개 목에 나 있는 게 다였다. 수하들이 말한 대로 독에 당한 성싶었다. 세침류 암기에 발린 독만으로 죽은 거라면 엄청난 극독이 쓰인 모양이었다. 피부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고, 몸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시반이 죽은 지 며칠이 흘렀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명고가 울어대기 시작했을 때 목숨이 끊어진 거겠지.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제대로 들어온 것 같소."
함께 시신을 들여다보던 정연송이 말했다.
"당가의 아해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와중인 것 같은데. 소가주의 자리를 놓고서 말이오. 잘하면 당가의 싹들을 이곳에서 모두 뿌리뽑을 수 있을 것 같군."
"...당연한 일이오. 그러려고 온 것이니."
몸을 일으키는 막인후에게서 은은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내심 아끼던 막내아들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마당이다.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미는 듯하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당가 놈들이 있었다면 무참하게 도륙해버렸으리라.
검흔으로 본 막인극의 태을쌍검식 성취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깝고, 통탄스러웠다. 그만한 자질이면 분명 태을묵검파를 더욱 높은 곳에 올려둘 수 있을 텐데...!
'하찮게 독이나 쓰는 놈들이 감히....'
막인후는 생각했다. 아들 막인극을 살해한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겁한 수를 썼음이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태을쌍검식을 그 정도로 익힌 막인극이 당할 리가 없다─ 몰락한 당가의 무학이 그리 대단할 리 없지 않은가.
"모두 들어라."
막인후가 음성에 내공을 실어 말했다. 중후한 목소리가 웅웅대며 삼백의 인원에게 또렷이 닿는다. 사천을 호령하는 한 세력의 수장다운 풍모였다.
"지금부터 샅샅이 뒤져서 당가의 쥐새끼들을 찾아내라. 분명 우리가 진법에 들어온 것을 눈치 채고 숨은 놈들이 있을 거다. 발견하게 되면 즉시 알리도록. 오늘, 당씨 성을 가진 놈들 중에 이곳을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는 놈은 없어야 할 것이다."
막인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삼백의 인원이 산개해서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제각각 기감을 곤두세우고 탐색할 테니 숨은 놈들을 발견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였다.
'몇 놈이건 수천 갈래로 도륙내주마.'
손을 뒤로 뻗어 흑색 쌍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막인후의 눈알이 살의로 번들거렸다.
****
"당원진 무사.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갈 무인."
안색이 굳은 채 다급히 자신을 찾는 제갈창신에게 당원진이 물었다. 소가주 경합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고독전이 시작됐고, 딱히 문제될 것이 있나?
"침입자가 있습니다."
"침입자라니? 칠쇄환궁진으로 가려진 이곳을 어찌 알고...."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세작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추적을 당했을 수도 있지요."
"정체는 알아보셨습니까."
"...다른 이들은 몰라도 한 사람은 알아보겠더군요. 태을묵검파의 장문인 막인후가 분명합니다. 흑색 쌍검을 등에 맨 차림이 흔하진 않으니까요."
"태을묵검파...! 사천에 있어야 할 놈들이 왜 여기까지...."
"귀가의 인재들을 노린 것 아니겠습니까. 소가주가 될 가능성을 지닌 재목들이니 저들의 입장에서는 죽여 귀가의 부흥 가능성을 없애고자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인원은, 인원은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독과 암기로 기습한다면 승산이...."
"얼추 삼백이 넘습니다. 그리고 막인후가 아니더라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물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자칫 이쪽이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미 진법 안에 들어섰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진입하더군요."
"제갈 무인. 칠쇄환궁진은 일곱 개의 진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분명 어느 한 진법에 들어섰을 터. 일단 그들부터 대피시키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당원진의 의문은 당연했다. 칠쇄환궁진이 안전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혹시 모를 침입이 있더라도 진법 하나에 적들을 몰아 넣고, 나머지 여섯 개의 진법 세계는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설사 삼백이 넘는 인원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모두 하나의 진법세계에 들어선 것이라면 그리 커다란 위협은 아니었다.
"그게 말입니다...."
"왜 말씀을 흐리는 것입니까. 제갈 무인."
"면목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상정조차 하지 못했는데...."
제갈창신이 말끝을 흐린 뒤 당원진의 눈치를 살핀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든 당원진은 그에게 대답을 독촉했다.
이내 제갈창신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놈들이, 고독전이 펼쳐지고 있는 진법세계로 들어섰습니다. 알시다시피 그곳에는 저희가 개입할 수 없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태을묵검파를 비롯한 삼백의 인원을 고독전에 참여한 조장들이 상대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
제갈창신의 침묵에 당원진이 아연실색했다.
****
'적이군.'
당연명은 제법 가까운 곳에서 몸을 숨긴 채 새로이 진법 세계로 들어닥친 자들을 관찰했다. 적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칼을 찬 채 흉악한 얼굴로 진법 세계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으니까. 선의로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들려오는 대화들이 있었다. 당가를 적대시하는 듯한 말들. 경합. 소가주. 당가 놈들. 도륙. 싹을 뽑는다는 얘기가 오간다.
어디서 이 많은 인원이 몰려온 걸까. 문득 처음 공동산에 올 적에 추적이 붙었던 일이 자연스레 뇌리를 스친다. 뒤를 밟은 그놈들이 아니고서야 이곳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놈들은 흩어져서 수색을 시작했다. 처음의 소극적인 수색과는 달리 무언가 확신을 가지고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기감까지 돋우고서.
그러나 놈들은 숲속에서 신법 암영으로 기척을 지운 당연명을 감지하지 못했다.
당연명은 투명한 눈길로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산개해나가면서 서로의 거리가 충분히 벌어지길 기다릴 참이었다.
놈들은 삼백 가량의 대인원이었다. 홀로 상대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많은 숫자.
사실 당연명이라면 이대로 진법 세계를 찢어버리고 도주할 수도 있었다. 놈들의 수준으로는 당연명이 펼치는 경공 추월광행을 쫓을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혹은 봉위대와 합류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들의 암기술과 용독술이라면 백여 명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당연명은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잘됐군. 연습 상대가 제 발로 굴러 들어오다니.'
단장열지독이 발린 독병에 우모침 다발을 한움큼 담갔다 빼며 당연명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암기 무학을 익힌 검신이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린다.
사신(死神)의 미소였지만, 이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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