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몰살(4)>
천진방은 장법을 주력으로 하는 문파다.
천진방주 정연송은 원래 사천에서 이름을 떨치던 정사 중간의 장법 고수였는데, 흑사파가 점창파를 무너뜨리고 흑사련으로 발족하자마자 유길준을 찾아가 휘하에 들길 청했다.
'기특하군. 장법이 특기라지?'
흑사련주 유길준은 기꺼워하며 정연송의 독문 장법─ 봉진장(峰振掌)에 대해서 물었다. 진기도인 경로나 구체적인 심상, 주로 쓰는 초식....
몇 차례 질답이 오갔고.
'간단하군.'
그 말과 함께 유길준은 그 자리에서 봉진장을 개변해주었다. 구파의 일익이던 점창파를 쉽게 무너뜨린 대종사의 자질이 번뜩인 것이다.
'봉우리를 떨쳐 울린다.... 이름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군. 본좌가 손을 댔으니 하늘까지는 닿아야 하지 않겠나.'
유길준은 개변한 장법의 새 이름까지 내려주었다. 천진장(天振掌)이라고.
정연송은 감격했다.
원래 봉진장 자체는 그리 뛰어난 장법이 아니었다. 정연송은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실전을 겪었고, 그렇게 갈고 닦인 경험으로 부족한 무공을 갈음하는 편이었다. 남들은 고수라고 치켜세우지만 스스로는 항상 열등감에 시달렸다. 때문에 언제나 상승의 무학을 갈구하곤 했었는데, 유길준이 봉진장에 상승의 이치를 더해 새로운 장법으로 거듭나게 해준 것이다.
천진장은 상승의 장법이었지만 봉진장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었기에 정연송은 빠르게 천진장을 대성할 수 있었다. 그후 정연송은 천진장을 앞세워 대립 관계에 있던 주변 문파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영역을 확장했다.
정연송의 일은 빠르게 유명해졌다. 정연송이 방파의 이름마저 천진방으로 바꾸고 누구보다 열렬하게 유길준을 추종한 까닭이다. 실제로 그는 친분이 있던 이들을 흑사련 휘하로 끌어들였는데, 유길준은 투신하는 이들에게 그때그때 수준에 맞추어 무공을 개변하거나 새로 창안해주었다.
무림인들은 누구나 강해지길 바라마지않는다. 상승 무공을 얻을 수 있다면 십 년의 종살이도 마다하지 않을 이들이 천지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 충성만 맹세하면 지금 익힌 것보다 강력한 무공을 하사받을 수 있으니 사파 세력은 물론이고 정사 중간을 표방하던 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흑사련의 휘하에 들길 원했다.
그리고 아미파마저 무너지자, 사천의 세력 구도는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사도 천하가 시작된 것이다.
어쨌거나.
천진방주 정연송의 특기는 장법이었다.
적수공권의 무학을 익힌 자들 중에는 장법보다 권법, 각법 따위의 권각술을 익힌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유는 간단했다. 때려서 친다─ 타격에 중점을 둔 무학이기 때문이다. 성취가 깊지 않을 때도 어느 정도의 살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장점이다. 그러니 장법보다는 권법에 치중하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하지만 정연송은 단순 타격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장법을 익혀왔다. 장법은 기본적으로 내가중수법에 근간을 두는 무학이다. 장심으로부터 뻗어나오는 경력을 상대의 내부에 심거나 바로 터뜨려 경맥에 손상을 입힌다. 스치기만 하면 치명상인 것이다.
그렇기에 정연송은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기백은 대단하다만....'
우모침을 쓴 한 수에 꽤 많은 수가 당하긴 했지만 아직도 일백 가량의 인원이 있었다. 그런데 이리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이쪽을 우습게 본다는 얘기였다. 물론 놈이 처리한 숫자만 벌써 이백에 달하니 그럴 만하긴 했지만 그건 은밀하기 짝이 없는 기습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정연송이었다.
'방심하는 걸 보니 아직 애송이다. 기습의 이점을 포기하고 전면에 나서다니.'
정연송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눈앞의 청년, 당연명이 이미 화경에 이른 극강의 강자이며 그들을 그저 새로 익힌 무학을 시험할 상대로 여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정연송이 입을 열었다.
"당가에 네놈 같은 녀석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헛수작 부리지 말고 얼른 덤벼라. 사파 놈아."
당연명은 손을 까닥이며 말했다.
"어차피 너희는 살아나가지 못해. 이름 따위 알 필요도 없지. 본가에 해를 끼치러 온 주제를 자각해라."
"무어라?"
정연송은 어이가 없었다. 아직 약관도 되어 보이지 않는 놈이 어찌 이리 오만하단 말인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선수를 양보할 테니 가장 자신 있는 절기로 덤벼라. 설마하니 수하들을 먼저 보내 내 실력을 알아보려 하는 그런 구차한 짓은 않겠지. 보아하니 네가 수장 같은데."
"하..!"
정연송은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노성을 터뜨리며 땅을 박찼다.
"어린놈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구나!"
쿵! 하고 땅을 찍는 것과 동시에 정연송의 신형이 후욱 앞으로 쏘아진다. 신법 성취가 예사롭지 않다. 적수공권의 무학을 익힌 이들은 일단 근접해야 뭐라도 할 수 있었기에 대부분 고절한 신법을 익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연송 역시 그런 것으로 보였다.
'멍청한 놈.'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우장을 내밀고 있었지만 사실 정연송은 냉정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정도 격장지계에 흥분하기엔 그동안 그가 겪은 실전이 너무 많았다. 노기를 터뜨리는 척하며 재빨리 달려들어 거리를 좁혔다. 실리를 취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피하기 마땅치 않았던 때문인지 마주 장을 내밀고 있었다. 척 봐도 장법에는 문외한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픈 움직임이었다.
'끝이다!'
정연송은 회심의 미소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확신했다. 서로의 장이 맞부딪치면 무조건 이쪽의 우위라고. 장법은 결국 내력을 이용한 기예였다. 내공량, 내공의 성질, 그리고 장법 그 자체가 중요했다. 어느 것 하나 밀리는 게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내공량은 영약 따위를 밥 먹듯이 섭취한 게 아닌 이상, 호흡법을 실천해 온 세월에 비례하기 마련이었고, 내공의 성질은 특별히 상극이 아니면 유의미하게 영향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법. 정연송이 익힌 장법은 바로 그 흑사련주 유길준이 친히 개변해준 천진장이다. 한낱 약관에 불과한 애송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얕은 무학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정연송과 당연명의 손바닥이 부딪쳤다.
콰앙!
인간의 살점끼리 부딪친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울린다.
'이놈...?'
정연송은 당황한 눈빛으로 당연명을 바라봤다. 그의 장심에서는 지금 천진장의 강맹한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피를 토하며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건만, 당연명은 태연한 안색으로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상황이 의미하는 사실은 하나였다. 당연명이 지닌 내공량이 정연송과 비등하다는 것.
'...그럴 리가 없다.'
정연송은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기운을 한껏 끌어올렸다. 장심이 뻥 뚫린 것마냥 콸콸콸 내력이 새어나가고 있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내력 대결의 양상으로 넘어간 까닭이다. 만약 여기서 손을 거두게 되면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공산이 컸다.
정연송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아까 우모침을 이용한 암기 무학을 펼치고 나서 내력이 부족하리라 짐작했는데, 대체 뭐란 말인가, 이 끊임없이 대항해오는 기운은...!
한편.
기운을 끌어올리느라 점차 창백해지는 안색의 정연송과 달리, 당연명은 여전히 태연한 기색이었다.
'상대하기 어렵지 않군.'
적이 제법 강맹한 기운을 쏟아내고 있긴 하지만, 전생에 다뤘던 패력진기에 비하면 보름달과 반딧불 정도의 차이나 다름없었다. 내력 또한 적당히 흘리는 중이었다. 비등비등한 상태가 되도록.
이대로 정연송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화경에 이르러 임독양맥이 타통되면 한 순간에 움직일 수 있는 내공량이 어마어마해진다. 그냥 내공량으로 찍어누르기만 해도 정연송은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여서는 의미가 없다.
'열독이라 했지.'
당연명은 당영령이 당가십독─ 화룡호독에 대해 얘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열독 중에서도 가장 지독하다고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먹어치웠고.
'독요청광기는 모든 독을 포식할 수 있는 기운이다.'
당연명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독요청광기의 독기가 화룡호독처럼 열기를 품게 만들 수는 없을까.
안될 리가 없다.
당연명은 화경에 이르렀다. 화경이라 함은 곧 기에 의념을 실을 수 있는 경지였고. 기에 의념을 실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성질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즉─
무엇이든 베고 말겠다는 의념이 실린 검기가 바로 검강이었다. 나뭇가지 하나로 쇠를 벨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태워버리겠다는 의념을 실은 독요청광기는 열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독강(毒罡)이겠지.'
불현듯 당연명의 눈에서 진녹색 기운이 일렁인다. 어떤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듯 안광이 형형했다.
심상찮음을 느낀 정연송이 불안한 눈빛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장력을 회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게 될 것이었으므로.
'모조리 태운다─'
당연명은 손바닥 장심으로 흘러나가는 독요청광기에 의념을 실었다. 화경에 이른 절대자들만의 무학, 강기를 펼친 것이다. 당연명의 손에 진녹색 기운이 어리더니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권장법 고수들의 장강(掌罡)이나 수강(手罡)과 비슷한 형태였지만 엄연히 달랐다.
이건 열독의 정점, 화룡호독의 심상이 담긴 독강이었다.
"!!!"
손을 마주대고 있던 정연송은 경악했다. 갑자기 천진장의 기운이 낱낱이 분쇄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명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일변했다는 것은 감지하고 있었다. 충분히 주의하고 있었고.
하지만 새롭게 느껴지는 기운은 밀도 자체가 달랐다. 천진장의 기운이 닿자마자 버티지 못하고 부서질 정도로.
아무리 내력을 쏟아내고 쏟아내도 막을 수 없다.
"무슨...!"
결국 정연송은 물러나기로 마음먹었다. 놈의 장력이 심상치 않았다. 이대로 일장을 허용하느니 내상을 감수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태을묵검파 장문 막인후가 올 테고.
그렇게 정연송이 차츰 내력을 거두며 뒤로 빠지려 할 때였다.
"어딜."
당연명이 착(着)의 묘리를 구사했다. 정연송은 손바닥이 떨어지질 않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그리고 그 순간.
당연명의 장심에서 움텄던 독강이 정연송의 손바닥 내력방벽을 뚫고 침투했다.
그와 동시에.
화르르르륵─!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불길이 치솟았다.
"...!"
정연송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미 화마(火魔)가 그의 성대나 혀, 마지막 숨결까지 집어삼킨 까닭에.
불길은 환영이었던 것처럼 금세 사라졌다.
당연명의 앞에 천진방주였던 것의 재를 남기고서.
엄청난 위력이었다.
'열독강(熱毒罡)이라 하자.'
대강 이름지은 당연명은 정면을 바라봤다. 눈이 달린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턱이 빠질 듯이 입을 벌린 채로. 고절하기 짝이 없는 무학을 코앞에서 목도한 때문이었다.
당연명은 그들에게 옅은 웃음을 보이며 다가갔다. 붉은 입술이 살짝 떼진다.
"다음."
"!"
작은 말소리에 수십이 넘는 인원이 화들짝 놀란다.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가 이런 느낌일까. 그들은 모두 심장이 움츠러드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당연명이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합공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그제야 후열에서 도착한 막인후가 나섰다.
"...네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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