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39화 (39/134)

39화<몰살(5)>

막인후는 당도하자마자 눈앞의 청년이 바로 막내아들 당인극과 태을묵검파의 제자들을 우모침으로 죽인 흉수라는 것을 알아봤다.

‘열양공까지 익힌 건가?’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에 느꼈다. 천진방주 정연송의 기척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것을. 그리고 치솟는 불길도 목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놈의 어깨 너머로 무언가가 타고 남은 재가 보인다.

‘...정 방주. 이리도 허망하게 가다니.’

막인후는 이곳에 온 게 점차 후회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막내아들 막인극의 죽음을 외면하지 못한 일이 이토록 뼈아프게 다가올 줄이야. 태을묵검파의 정예나 다름없던 제자들은 반수가 넘게 죽어나갔고, 절친하던 천진방주 정연송 또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잃은 게 너무 많다─

원래 막인후는 무당파의 속가제자였다. 한때 재능을 인정받아 기명제자로까지 추천을 받았지만, 익힌 무위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검에 살기가 너무 짙다'는 평을 받고서 기명제자가 되지 못했다.

막인후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차피 검이란 인명을 살상하는 도구에 불과한 게 아닌가? 검에 살기가 좀 묻어나왔다고 자신보다 자질이 떨어지는 이를 기명제자로 택한 무당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분개했다.

그가 익힌 것은 태을검식(太乙劍式)이라는 것으로, 무당파 태청검법(太淸劍法)의 열화판이라고 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검에 재능이 있던 막인후는 태을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상승의 경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상승의 무학을 익히는 것이 압도적으로 유리했기에, 그는 어떻게든 진산제자가 되어 온전한 태청검법을 전수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고작 살기가 짙다는 이유로 좌절되었으니, 속가제자이긴 했으나 막인후가 무당파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막인후는 상승 무학에 대한 갈망이 깊었기에, 비슷한 수준의 무인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비무를 해서 실력 향상을 도모하기도 하고, 영약 구매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복면을 뒤집어쓰고 이런저런 음지의 일들을 처리하기도 했다.

정연송과는 그때부터 교분을 다진 사이였다.

정연송은 막인후가 사천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그 덕에 막인후 또한 작은 방파를 하나 세울 수 있었으니.

태을묵검파(太乙墨劍派)─ 뿌리는 무당이었지만, 스스로 어두운 길을 걷다 여겼기에 지은 이름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가 흑색 검을 들고 다니기에 그리 이름 지은 줄 알았지만.

그렇게 사천에서 적당한 세력을 일군 그는 어느 날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막 장문. 흑사련에 투신하시오.’

정연송의 제안이었다. 점창파를 멸문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신진 사파 세력, 흑사련의 휘하에 들어오라는.

흑사련주 유길준에 대한 소문은 막인후 역시 들어 알고 있었다. 뒷골목 흑도 출신이라던가.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났다던가. 무학의 이치를 두루 꿰고 있기에 무공 창안과 개변을 우습게 해낸다던가 하는 얘기들 말이다.

정연송이 새로운 상승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것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흑사련주가 새로운 장법을 내려 준 덕분이라지.

막인후는 고뇌했다.

흑사련은 구파를 적대하는 사파 세력이다. 그 휘하에 든다는 것은 완전히 사도를 걷겠다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순히 세인들로부터 정사 중간의 세력이라 분류되는 것과는 무게감부터 다른 일인 것이다.

무엇보다 막인후의 소식을 알게 되면, 무당파에서 직접 나설 수도 있었다. 태청검법을 익힌 진산제자들이 그의 무공을 폐하러 오는 것이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일단 뵙기만이라도 할 수 있겠소? 그의 인물됨을 보고 판단하고 싶군.'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오.'

막인후의 사정을 이해한 정연송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막인후는 정연송의 추천 덕분에 흑사련주 유길준과 대면할 수 있었다.

대면하자마자 유길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운이 미묘하게 끊기는군. 온전치 못한 무공을 익힌 모양이야.'

'.......'

'검을 익힌 것으로 보이는데, 펼쳐보겠나? 정 방주와 교분이 깊다니 조금 손을 봐주지.'

'본파는 귀련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소만.'

'괜찮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무엇보다 그대의 자질이 아깝기도 하고.'

'!'

막인후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그의 자질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던, 고고하기만 하던 사문 무당파와─ 한눈에 자질을 알아보고 그 자질이 아깝다며 선의를 베푸는 흑사련주.

둘이 너무나 비교됐다.

'그럼.'

막인후는 평생 익혀온 태을검식을 위주로 한바탕 검술 시연을 마쳤고, 그걸 본 유길준은 진기 경로나 구결 따위는 묻지도 않은 채 말했다.

'역시 재능이 있군. 검 자체에 살기가 배여 있어. 오히려 무공이 그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군. 이건 개변보다 새로 만드는 게 나을 법한데.'

그렇게 중얼거린 유길준은 반개한 눈으로 허공에다 몇 번 슥슥 손을 휘둘렀다. 채 일 각이나 지났을까. 유길준은 시종을 불러 지필묵을 가져오라 이른 뒤 순식간에 글줄을 휘갈겨 쓴 후 막인후에게 던져주었다.

'태을검식이라 했던가? 조금만 고치면 쓸 만한 무공이다. 하지만 그대의 몸에는 이게 맞겠지. 타고난 살기를 억누르지 말고 표출해라. 또한 방어초보다는 공격초에 익숙한 듯하니, 아예 방어초를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막인후는 금과옥조 같은 조언과 태을쌍검식(太乙雙劍式)을 얻었다. 핵심요결을 읽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꿈에 그리던 상승의 무학임을. 단순히 태을검식에 좌수검을 추가한 것이 아니었다. 양손의 검식이 모두 공격 일변도였는데, 그럼에도 서로 검로가 얽히지 않고 상승 작용을 일으키게 짜여 있었다. 어찌 이런 검로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마치 개안하는 듯했다.

이건 명백한 은혜였다.

‘...앞으로 주군으로 받들어 섬기겠습니다.’

막인후는 결국 그날로 유길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뿌리인 무당파를 버리고 온전히 사도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사내는 자신을 알아보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던가. 막인후의 심정이 꼭 그랬다.

그 후로 막인후는 태을쌍검식을 대성했고, 유길준으로부터 묵룡심법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호흡법마저 전수받았다. 여태 익힌 무당파의 심법으로 쌓인 기운을 거스르지 않는 사파 무학이었다. 내공이 쌓이는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됐다. 비로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벗어버리고 꼭 맞는 것으로 갈아입은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인후는 사천에서도 손꼽히는 검도 고수의 반열에 이르렀다. 그의 태을묵검식은 적을 수백 조각으로 난자해서 완전히 도륙해버리는 극강의 쾌검식으로 알려졌다.

한 번은 무당에서 사람 십여 명이 왔다.

‘속가제자 막인후. 무당의 무공을 익히고서도 뻔뻔하게 흑사련의 주구가 되었다지. 네 무공을 회수해야겠다. 사문의 명예에 누를 끼친 죄는 목숨으로 씻어야 하는 법이지만, 스스로 죄를 뉘우치고 단전을 폐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스스로를 태청검수라고 칭한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지껄였다.

막인후는 실소했다.

‘지랄하고 있군.’

사문은 무슨 사문이란 말인가. 그깟 온전치 못한 무공 좀 알려준 것으로 생색을 내는군. 그렇게 말하며 막인후는 태을쌍검식으로 그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태청검법을 익힌 이들이 검하고혼이 된 모습은 막인후에게 묘한 감흥을 주었다. 고작 이 정도 알량한 무공을 익히고자 그리도 속을 태웠던가.

그 후로는 무당파에서 사람을 보내오지 않았다. 일정 수 이상을 보내자니 흑사련의 눈치가 보였을 것이고, 그렇다고 몇 명만으로는 막인후를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짐작됐다.

무당파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진 막인후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많은 것을 쌓아올렸다.

내공을 비롯한 무위는 물론이고 문파를 번성시켜 많은 재물을 쌓았고, 흑사련 내에서의 입지도 굳혀 왔다. 명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흑색 쌍검을 교차해 매고 다니는 그의 행색 특징은 성(城)을 넘어서까지 알려져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게 한 순간에 무너지게 생긴 것이다. 아니, 이미 어느 정도는 무너진 마당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죽여야 한다.'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며 막인후는 결의를 다졌다. 그동안 수없는 수라장을 헤쳐 오지 않았나. 쉽게는 당해주지 않는다. 그는 막내아들과 정연송, 그리고 죽어간 제자들의 원한을 짊어지고 있었다. 어깨가 무겁다.

등 뒤에 맨 흑색 쌍검을 소리 없이 잡아 빼며 막인후가 입을 열었다.

“모두 놈을 공격한다. 암기술과 독을 조심하고, 시간차를 두고 간격을 좁혀라.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것에 주력해라. 차륜진을 명심하도록. 마무리는 내가 하겠다.”

막인후의 말에 태을묵검파 제자들은 물론이고 방주를 잃은 천진방 방도들, 다른 문파의 문도들이 무기를 고쳐 잡고 투기를 끌어올렸다.

놈이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곤 있었지만 혼자였다. 태을묵검파 장문 막인후의 말대로 차륜진을 펼쳐 기력을 소진하게 하고 나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이들이 조심스럽게 당연명에게 접근하며 수군거렸다.

“장문의 말대로 거리를 둬. 지나치게 가까이 갔다간 당한다.”

“천진방주를 해한 수법을 조심해. 듣도 보도 못한 열양지력이었다.”

“분명 내력 소모가 클 것이오. 조금만 더 힘을 빼고 나면 태을묵검파 막 장문께서 충분히 감당하실 것인즉.”

“몸을 사려봐야 허망하게 죽을 뿐이야. 합심해야 한다.”

“그 말이 옳아. 만약 그런 놈이 보인다면 내가 먼저 베어주지.”

일백에 달하는 인원이 한 사람을 노리고 학익진 모양으로 압박해 갔다. 투심(鬪心)을 회복한 사파 무인들이 쏟아내는 기세는 제법 매서웠다. 범인이라면 그 자리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말 정도로.

그러나 그렇게 노려지는 미형의 청년, 당연명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재간을 부리는 예인을 보는 듯하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도주할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설마 아직 여력이 남은 것일까.

“차륜진이라─”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암기무학을 익힌 검신이 웃었다.

좋은 판단이긴 했다. 열독강을 시전하느라 제법 내력 소모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강기 무학은 그 위력만큼이나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 수준의 무인들을 상대하는 데 만전(萬全)의 상태일 필요는 없었다.

흑색 쌍검을 들고 있는 중년 사내에게서 제법 삼엄한 기세가 흘렀지만, 그를 상대할 방도는 따로 있었고.

어느새 제법 가까이 다가온 이들이 있었다. 일 장(대략 3m) 남짓 거리.

‘그걸 써봐야겠군.’

당연명은 문득 떠오른 암기무학 하나를 시험해보고자 했다. 만천화우에 대해 들었을 때 떠올렸던 심상들이 있었다.

‘진짜’에 비하면 손색이 있겠지만, 이 정도의 인원들을 처리하는 데는 그 모조(模造)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당연명이 신법 암영을 펼쳤다.

희끄무레한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 그가 다음 순간 나타난 곳은 날붙이 따위의 무기를 들고 있는 이들의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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