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귀가>
“...그러니까.”
당원진이 입술이 마르는지 살짝 혀로 핥고는 말했다.
“고독전에서 살아남은 것은 너와 저기... 당정일이라는 녀석뿐이고, 당정일이 진법을 빠져나가고 며칠 뒤 사파 무인 삼백이 들어섰고, 그걸 너 혼자 모두 해치웠다는 거냐...?”
“예.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머릿수만 많을 뿐.”
당연명은 순순히 긍정했다. 실력을 무작정 감출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봉위대 전원은 소가주가 되는 즉시 자신의 수하가 될 자들이었다. 나이는 어려도 주인 될 자의 무위가 낮지 않다는 걸 각인시켜 두는 것도 좋으리라.
또한 조장이 되지 못했지만 살아남은 다른 참가자들. 그들은 어떻게 보면 소가주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이들이자, 당가의 동량들이었다. 당연명은 그들이 헛된 생각을 품거나 하지 않고 경합의 결과에 승복하도록 만들 심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들었어? 혼자서 삼백을 죽였대.”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태을묵검파라면 꽤 규모 있는 사도 방파인데.”
“이미 후기지수의 수준을 벗어났어...!”
“차라리 조장이 못 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 줄이야. 고독전에 나가봤자 소가주는커녕 개죽음만 당할 뻔한 거잖아.”
“그보다 얼굴 뭐야...? 그 당연명이 저렇게 컸다니....”
“환골탈태를 했다고 해도 믿겠는데.”
“그러니까. 소가주가 되면 얼굴만으로 가문의 위신이 서겠어.”
경합 참가자들은 수군대며 당연명의 실력을 인정했고, 그들 사이에는 소가주 자리에 어울리는 건 당연명뿐이라는 공감대가 자연스레 확산됐다.
‘어이가 없군.’
당원진은 태연한 표정의 당연명을 보며 생각했다. 가문을 부흥시킬 인재로 점찍긴 했지만 이 정도로 성장했을 줄이야.
‘실력을 대체 얼마나 숨기고 있던 거지?’
극독과 암기가 주어진다 해도 홀로 삼백의 인원을 살상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장 당원진 자신만 해도 만전의 상태를 가정해도 삼백은커녕 삼십을 감당하기도 벅찼다. 게다가 사도 방파의 수장급 인물도 둘이나 있었지 않나.
하지만 당유리가 발견한 흑색 쌍검. 그건 태을묵검파 장문 막인후의 애병이 분명했다. 흑색검을 쥐고 있는 팔은 무언가 예리한 것에 의해 전완부터 절단돼 있었는데, 극강의 쾌검식을 구사한다는 소문을 생각하면 그가 당했다는 것은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쾌검의 고수를 쓰러뜨리려면 그보다 더한 쾌를 구사하거나, 상대가 받아치지 못할 정도의 강격을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대체 무슨 수로 쾌검식을 뚫고 팔을 잘라낸 것일까.
또한 시신들의 대다수는 독살당한 것으로 보였는데, 세침류 암기에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우모침이겠지.’
당원진은 당연명이 지니고 있는 암기들의 구성을 알고 있었다. 임시조장이 되었을 때 보상으로 주어지는 영약 천심환 대신 그만의 암기를 요구했던 것을 기억한다. 분명 우모침 다발과 수리검 몇 개, 그리고 묘하게 생긴 표창 여덟 개였지.
하지만 당연명의 암기 구성을 알고 있다 해서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세침류 암기인 우모침은 원래 다발로 흩뿌려야 개중 눈먼 몇 개가 적중하는 정도였다. 원체 가늘어 다루기가 힘든 까닭이다. 아무리 기감이 뛰어나다 해도 사방으로 비산하는 미세한 침들을 일일이 감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므로.
그런데 시신에는 많아야 네댓 개의 우모침 흔적밖에 없었다. 아주 효율적으로 적을 살상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흔적만 있을 뿐 우모침이 꽂혀 있는 시신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연기륜.’
당원진의 뇌리에 언젠가 당연명에게 가르쳐주었던 암기회수 무학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연기륜을 이용해 새로운 암기 무학을 창안하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연기륜은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는 까닭에 거의 사장된 무학인데...?
“.......”
확인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당연명의 무학 수준을 비롯해서 안에서 벌어진 일의 구체적인 경위. 그리고 태을묵검파와 천진방을 포함한 사파 세력들이 어떻게 경합 장소를 알고 왔는지. 당연명과 좀 더 얘기를 나눠보면 알 수 있을 듯한 것들이 있었지만 당원진은 굳이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고독전이 끝났다.”
당원진이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고독전의 승자는 28호. 당연명이다. 여기에 이의가 있는 이는 지금 나서라.”
태을묵검파와 천진방을 비롯한 사파 세력들의 급습으로 고독전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물고 늘어지는 자가 있을 수 있기에 한 말이었다. 차라리 그가 먼저 말을 꺼내서 차후 장로들이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없나?”
“.......”
당원진이 십여 명의 참가자들을 스윽 둘러보며 물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얼굴만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하긴 이의가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소가주 자리에 근접했던 이들은 조장이 되어 고독전에 참여했지만 승자인 당연명과 중도 포기한 당정일을 제하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거기다 다른 참가자들은 삼백에 달하는 시신이 굴러다니는 풍경에 완전히 기가 질려 있었다. 사람 한 번 죽여본 적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의가 없다면, 이것으로 경합의 모든 과정이 ‘공정하게’ 끝났음을 선언하겠다.”
당원진의 말에 제갈창신이 괜히 흠칫한다.
“...이로써 우리 봉위대는 경합의 최종 승자 당연명을 본가 소가주로 추대할 것인즉.”
잠시 말을 끊은 당원진은 봉위대 무사들과 눈을 맞췄다. 함께한 세월이 십여 년이 넘었다. 눈빛만 봐도 의중을 알 수 있다. 몇몇은 고개까지 끄덕인다.
다시 몸을 당연명 쪽으로 향하게 한 당원진이 두 손을 마주잡고는 한쪽 무릎을 쿵 소리 나게 꿇으며 말했다.
“봉위대 당원진 외 82명. 사천당가의 새로운 소가주를 뵙습니다.”
“소가주를 뵙습니다!”
다른 봉위대 무사들도 쿵쿵 무릎을 꿇으며 당원진의 말을 반복했다. 팔십이 넘는 장정들이 한 사람을 향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다. 순식간에 장중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 무게감에 다른 경합 참가자들이나 잡일을 담당하던 가솔들까지 저도 모르게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가문의 다른 이들이 뭐라 하건, 저희는 경합의 승자이신 소가주만을 인정하고 따를 것입니다. 장차 가주의 위에 오르시는 그날까지, 저희 봉위대가 수행토록 하겠습니다. 부디 수족처럼 부려주시길.”
마침내 봉위대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가문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봉위대는 이미 당연명을 새로운 소가주로 받아들인 셈이었다.
봉위대⎯ 일찍이 모시던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그 죄책감에 뼈를 깎는 수련을 마친 당가의 최정예 무력대가 당연명의 직속이 된 것이다. 가문에서 알게 되면 한바탕 난리가 날 일이었지만, 지금은 무거운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명은 묘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모두 일어나라.”
어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가문의 작은 주인으로서 행세해야 함을 인지한 것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아주 오랫동안 절대자로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뿐만 아니라 당연명은 진기를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하들이 그의 성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소가주의 음성에서 느껴지는 내공 화후에 흠칫 놀라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이들에게 당원진이 눈짓했다. 불경하다고.
당원진은 속으로만 감탄했다.
‘제대로 골랐다.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이런 성취라니. 장성하시고 나면 그 흑사련주와 비견될 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은 가당찮은 기대이긴 했다. 흑사련주 유길준은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났다 알려졌다. 무학의 이치를 두루 꿰뚫고 있기에 무공 창안과 개변이 숨 쉬듯 자연스럽다고 했다. 그가 손을 대면 평범한 무공도 상승의 무학으로 변모한다고.
하지만 당연명이 화경에 이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거기서부터는 순전히 깨달음의 영역인 까닭이다. 화경 고수들 간의 싸움은 단순히 어느 한쪽이 위력적인 무공을 익혔다 해서 우위를 장담할 수 없다.
흑사련주 유길준이나 마광천주 연중혁이 무림을 완전히 제패할 수는 없는 이유였다. 아직까지 명문대파로 불리는 곳에는 화경에 발끝이나마 걸친 이들이 몇몇 존재했고,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유길준이나 연중혁이라 하더라도 위험부담이 있는 까닭이다.
당원진이 기대하는 것은 장차 당연명이 조화경에 올라서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된다면 사도천하가 된 사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가문의 부흥은 그뿐만 아니라 봉위대 전체의 염원이었다. 당원진은 다시 한 번 당가가 명문세가로 우뚝 서는 그날이 머지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당가의 작은 주인이 입을 열었다.
“너희가 무얼 바라는지 안다.”
“...!”
생각을 읽은 듯한 말에 당원진이 움찔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믿고 따르도록.”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무엇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말일까. 가주에 오르는 것이? 가문의 부흥이? 아니면 설마 화경에 오르는 것이?
무엇하나 쉬운 일이 없을진대 당연명이 보이는 자신감은 대단했다. 당원진을 비롯한 봉위대 무사들은 아직 어린 주인이 하는 말에서 왠지 모를 든든함을 느꼈다.
“해가 지는군.”
문득 당연명이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이젠 노을빛마저 옅어지고 있었다. 공동산에 밤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채비를 해라. 일단 본가로 돌아간다.”
새로운 소가주로서의 첫 명은 가문으로의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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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은 빨랐다.
장원에서 하루를 묵을 수도 있었지만, 당연명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바로 근처에 시신 삼백 구를 쌓아둔 것도 있었고, 그 시체 냄새를 맡고 모여들 짐승들이 귀찮기도 했고, 무엇보다 괜히 미적거리다 공동파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을 경계한 까닭이다.
물론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엄연히 공동파의 권역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으니 괜히 그들과 엮여서 좋을 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혹시나 화경에 이른 자가 오기라도 하면 귀찮아질 수도 있고.’
당연명은 일부러 겉으로 드러나는 기세를 적당히 조절하고 있었다. 다른 경합 참가자들보다 조금 뛰어난 정도로만 보이도록.
하지만 이걸로 속일 수 있는 건 화경에 이르지 못한 이들의 기감뿐이다.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공동파에 화경에 이른 고수가 있다면 이번 일을 수습하러 나올 수도 있었다. 무려 삼백에 달하는 사파 무인들이 영역을 침범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화경의 고수가 당연명을 보게 되면 단번에 성취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공산이 컸다. 마찰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자칫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화경에 올랐다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
그리되면 곤란하다.
진위 여부는 둘째 치고 온갖 세력들의 이목이 당가에 집중될 것 아닌가. 사실로 밝혀지면 또 온갖 견제와 회유가 쏟아질 것이었다. 평범한 삶을 꿈꾸는 당연명에게 있어 세상에 무위를 들키는 일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아직은.
산을 내려오자 작은 마을이 보였다. 경합이 치러지는 몇 년 사이에 생긴 것일까.
일행은 마을에 들러 넉넉한 값을 치르고 간단히 요기를 했다. 은자가 손에 쥐여지자 마을 사람들은 서슴없이 닭과 돼지를 잡았다.
“다시 출발한다. 쉬는 것은 사천에 진입하고 나서다.”
“예!”
배를 든든하게 채운 이들은 군말 없이 당연명의 말을 따라, 또 달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남하(南下)⎯ 사천당가가 있는 성도를 향해서였다.
어느새 휘영청 떠오른 달은 하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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