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동상이몽>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군.’
제갈창신은 봉위대에 둘러 싸여 이동하면서 생각했다. 봉위대는 나름대로 제갈가의 무인들을 보호하면서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제갈가 무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옥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이대로 제갈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가주 경합이 정상적으로 끝났고, 또 공정했음을 당가에 가서 얘기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도 새로운 소가주의 탄생을 축하해야 하기도 했으니 어쨌건 당가에 들러야 한다.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
제갈창신은 선두에 있는 미형의 청년을 바라봤다. 삼 년이 넘는 소가주 경합 끝에 탄생한 당가의 새로운 소가주다. 당연명⎯
사천당가주의 자리는 공석이니 그가 마땅한 무위와 연배를 갖추게 되면 자연스레 새로운 당가주가 될 것이다.
그런 그를 사파세력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했으니 어찌 불안하지 않을까. 심지어 제갈가의 제안을 수락한 당영령이나 거절하긴 했지만 개입의 정황을 알고 있는 당극린. 그 둘로부터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했다.
‘답답하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둘이 모두 죽었다는 건데.’
제갈가가 개입했다는 물증은 없다. 칠쇄환궁진 역시 파훼되어 사라졌으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당연명이 언급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정식 소가주가 되지는 못했으니 괜히 잡음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것일 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제갈창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만약 당연명이 당영령으로부터 무언가 들었거나, 또 어떤 심증을 가진 채로 가주가 된다면?
‘자칫 본가가 끝장날 수도 있다.’
제갈창신은 칠쇄환궁진을 가르고 나오던 당연명의 모습을 떠올렸다. 괜히 식은땀이 날 것만 같다. 제갈가 무량전의 수많은 진법 중에서도 비기로 분류되는 것이 칠쇄환궁진이다. 그걸 파훼했으니, 웬만한 진법은 그에게 무용할 터.
‘절대 적으로 돌려선 안 된다.’
행여나 당가와 무력충돌이 벌어지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진법을 가르고 단신으로 삼백 명을 죽일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한 괴물을 어찌 당한단 말인가? 아무리 수많은 절진으로 겹겹이 보호받는 제갈가라 해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빠르게 당가에 복속되는 게 나을 지도.’
당가를 집어삼키려던 계획은 일단 미뤄두고, 당장 가문이 살아날 방도부터 모색해야 했다. 어차피 당가로부터의 지원이 끊기면 제갈가는 지금의 가세도 유지할 수 없다.
당연명이 정식으로 소가주가 되어 실권을 쥐기 전에 가문을 당가에 복속시키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일단 당가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면 당연명이 대놓고 손을 쓰지는 못할 테니까.
그 후에 기회를 보면 됐다. 만약 지금의 걱정이 기우였고 당연명이 제갈가의 개입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그때는 혼사를 추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가만. 본가의 여아 중에 소가주의 마음에 들 만큼 재색을 겸비한 아이가 있던가...?’
제갈창신은 당연명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마침 옆의 7조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옆모습이 보인다. 절세보검처럼 날카로운 콧날과 새하얀 피부. 길게 뻗은 검미가 인상적이다. 보통의 미모로는 그를 유혹할 수 없을 듯했다.
‘됐다. 일단은... 가주와 상의해봐야겠다.’
제갈창신은 시급한 일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어차피 당연명이 정식으로 소가주의 위에 오르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봉위대가 제멋대로 충성을 맹세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소가주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문에서 적법한 절차를 거치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간 당가를 입맛대로 주물러 왔던 장로들이 순순히 권력을 내놓으려 할까.
제갈창신은 아직 당연명의 진실한 신분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설령 그가 장로 중 누군가의 혈육이나 제자라 해도 다른 장로들의 반대에 부딪칠 수밖에 없으리라 여겼다.
‘약간의 빌미만 던져줘도 신나게 물어뜯겠지.’
그리고 그렇게 당연명이 정식 소가주가 되는 것이 지체되는 틈을 타 가문을 합친다⎯ 계략을 꾸미는 제갈창신의 눈이 간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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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우리가 말을 높여야 하는 건가?"
"아직 정식으로 소가주가 된 것은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소가주가 되는 것은 반쯤 확정인데. 봉위대가 인정했잖아."
7조였던 당이전, 당미려, 당유리가 자기들끼리 조심스레 속닥였다. 고독전을 끝마치고 살아돌아온 당연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봉위대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더니 한순간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당연명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봉위대의 주인으로 자연스럽게 행세했고, 그 탓에 왠지 다가가기 힘들었던 것이다. 봉위대가 당연명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기도 했고.
그런 그들을 당연명이 불렀다.
쭈뼛거리며 당미려가 입을 열었다.
"불렀어...요?"
"웬 존대야. 그냥 하던 대로 해."
당연명은 실소하며 말했다. 어려워하는 게 이해는 간다. 가주의 자리가 공석인 당가에서 소가주가 된다는 것은 가문에서 가장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연배를 불문하고 가솔이라면 공대를 하는 게 옳겠지.
하지만 당연명은 굳이 사석에서까지 권위를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는 없던, 벗이라 부를 만한 이들 아닌가. 고작 호칭이나 존대 때문에 거리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돼? 소가주잖아."
"아직 아니다. 그리고 소가주가 되더라도 사석에서는 그냥 이름을 불러. 괜히 어색해하지 말고."
"거봐. 연명이라면 저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까."
"아니... 미려, 네가 제일 걱정했잖아. 연명이랑 멀어질까봐."
"뭐래. 당이전. 지어내지 마."
경합 7조에 속했던 소년소녀들은 금세 예전처럼 웃고 떠들며 장난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다른 참가자들이 몹시 부럽게 바라봤다. 현 시점에서 차기 가주의 자리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는 것이 바로 당연명 아닌가.
경합에 참가한 소년소녀들은 대부분 가문의 요직에 자리한 이들의 혈육이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장로원을 주축으로 휘둘러지는 권력의 달콤함을 누리며 자랐다. 때문에 소가주가 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당연명과 벗처럼 지낼 수 있다는 게 장래에 얼마나 큰 이점이 될 지 대강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러움과 질시가 섞인 시선 사이에서, 무언가 다른 이들과는 결이 다른 눈빛을 빛내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개자식...!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원독 어린 눈빛이 잠깐 일렁였다가 사라진다. 그는 바로 당문찬이었다. 당연명에 의해 왼팔이 부러진 그는 깨어나고 나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팔을 치료하기 힘들다는 것─ 단순히 뼈가 부러진 것만이 아니었다. 혈맥과 세맥이 크게 상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고 했다. 부친인 독왕대주 당지혁이 애를 썼지만 약왕당에서도 고개를 내저었다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촉망받는 후기지수로서 경합에 참가하는 것까지 허락받은 그가 하루아침에 팔병신이 되다니?
차라리 끔찍한 꿈이길 하고 빌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하다 못해 팔을 그렇게 만든 당연명이라도 어떻게 보복해달라고 부친께 빌었지만─
'지금은 녀석을 건들 수 없다. 삼장로께서도 가만 계시지 않느냐.'
영악하게도 당연명은 일이 벌어진 직후 소가주 경합에 참가했다고 했다. 면책 특권을 노린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당문찬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경합에 참가할 속셈으로 손을 과하게 쓴 게 분명했다.
듣자하니 당영령은 피부가 완전히 뒤집어져 두꺼비 같은 꼴이 되었다 했다. 면사를 착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다닐 수 없는 몰골이라고. 하지만 아끼던 외손녀가 그리 호되게 당했는데도 삼장로 당석형은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당연명이 경합에 참가해 예비 소가주의 신분이 되었다는 이유로.
'권력에 미친 괴물 늙은이.'
당문찬은 속으로 당석형을 마구 욕했다. 분명 소가주 경합을 앞두고 다른 장로들에게 책 잡히지 않으려는 심산이겠지. 당영령은 피부만 상하고 실력에는 문제가 없다 들었다. 그러니 경합의 승리를 노린 것일 터. 차라리 자신도 당영령처럼 얼굴 좀 벗겨지고 왼팔이 멀쩡했더라면...!
지옥 같은 시간도 흐르고 흘러 결국 경합이 시작됐고, 경합 참가자별 번호가 부여됐다. 당문찬은 4호로 불리게 되었다. 1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영령과 같은 조였다.
당문찬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한쪽 팔의 혈맥과 세맥이 모두 망가져 제대로 된 운기가 불가능했다. 내력을 쌓는 것도, 발출하는 것도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문찬은 차라리 당영령에게 일찌감치 줄을 대고자 했다. 다행히 당영령은 그를 받아주었다.
'만약 내가 소가주가 된다면, 네 팔을 고칠 방도를 알아봐줄게.'
당문찬은 당영령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비록 약왕당의 어른들은 고개를 저었지만, 당영령이 소가주가 되어 가문의 총력을 기울인다면 분명 치료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타고난 재능 덕인지 당영령은 무난하게 임시 조장이 되었다. 보상으로 주어진 천심환을 복용했고 내력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식 조장이 되기 위해 세 명을 모두 상대하는 건 분명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때 당문찬이 나섰다. 은근슬쩍 다른 조원들의 공격을 방해하고, 시야를 가리거나 하는 식으로 당영령에게 조력했다. 결국 당영령은 1조의 정식 조장이 되어 고독전에 나가게 됐다.
당문찬에게는 당영령이 소가주가 되는 것만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이 거의 현실로 다가왔다 싶었는데...!
'그런데 왜 저놈이....'
처음 당연명이 진법을 찢고 나왔을 때, 그리고 진법이 무너지고 삼백에 달하는 사파 무인들의 시신이 드러났을 때.
당문찬은 누구보다 빨리 그가 당연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연명이 들고 있던 수리검, 그건 팔이 부러졌던 그날 당문찬이 빼앗겼던 것이었으므로.
'저걸 아직도.'
울분이 치솟는 동시에, 당문찬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그토록 나약하던 당연명이 어떻게 이렇게나 변한단 말인가? 얼굴은 송옥과 반안이 떠오를 정도로 절세 미남자가 되었고, 왜소하던 체격은 사내답게 커진데다 팔다리가 길쭉한 것이 고수의 풍모를 제대로 갖췄다. 거기다 단신으로 삼백을 상대할 정도의 고강한 암기술과 용독술까지.
'왜 네놈만 다 가지는 거냐...!'
당문찬은 가슴 속에 불길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원통하고, 증오스러웠다.
믿었던 당영령마저 죽고 말았다. 완전히 끈 떨어진 연 신세다.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문찬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명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단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복수하고 말겠다. 귀신에게 혼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모두가 제각각의 흉심을 품고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사천당가가 있는 성도에 당도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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