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44화 (44/134)

44화<공동산에서 있었던 일>

밤이슬이 떨어질락 말락 하는 새벽.

거대한 공동산의 중턱 어딘가─

스윽 고절한 신법으로 내려서는 신형이 있었다. 발끝이 흙바닥에 닿을 때까지 바람 한 점 일지 않는다. 착지가 무척이나 고요했다.

황색 도복을 입은 중년의 도사였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한동안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시신이 무려 삼백 구에 달했다. 대부분은 같은 수법에 당한 것으로 보인다. 세침류 암기와 독.

일각쯤 흘렀을까.

후욱 끼치는 바람과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내려서는 인원이 몇 있었다. 그들 역시 중년 도사와 같은 황색 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중년에 막 접어드는 연배로 보였다.

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사백. 혼자 그리 가시면 어떡합니까? 장문께서 염려하십니다. 이제 화경에 오르셨으니 조금은 진중함을 보이시는 게...."

"기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사파 놈들을 죽이자마자 떠난 게지. 이상하지 않느냐?"

사백이라 불린 인물─ 그는 아무렇지 않게 딴소리를 했다. 타인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고 하고픈 말만 하는 성미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리고 괴팍한 성미는 대체로 자신만의 무학을 완성한 고수들의 특징이다.

그는 공동파에서도 가장 높은 배분을 지닌 태허였다. 무려 장문인 태청의 사형되는 신분인 것이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공동파 장문 태청은 고희(70세)를 훌쩍 넘어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사형인 태청의 외형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중년의 그것이었다. 설마하니 반로환동이라도 이룬 것일까?

"이상하다뇨?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는 풍경을 옆에 두고 잠이 오겠습니까. 저 같아도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움직일 여력만 있다면요."

처음 말했던 사내, 현소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의 사백은 원래 사고방식이 범인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화경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인 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현소는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삼백이나 되는 인원을 몰살시킬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의외라면 의외였다.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던 당가의 인원이 일백 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무려 세 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단순히 우위를 점하는 것도 아니고 깡그리 죽여 버리다니. 과연 한때 사천제일가였던 가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얼마나 지독한 독을 썼는지 시신 부근에는 죽어 있는 짐승들이 꽤나 있었다. 중독된 시체의 살점을 파먹은 놈들이 마찬가지로 중독되어 죽은 것이겠지.

사실 공동파는 당가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저 적지 않은 재물을 보내며 공동산의 한 귀퉁이를 내어달라기에 그리 했을 뿐이다.

사천은 사도 방파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으니 무슨 행사를 하건 쉽지 않았을 테고. 만약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공동파의 비호를 받아보려는 심산임을 능히 짐작했다.

공동파로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당가를 보호해주기로 약조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래서 사천의 사파 세력이 영역을 침범한 것을 알았을 때도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이 공동파가 아니라 당가에 있음을 짐작한 까닭이다.

흑사련주 유길준에 의해 구파가 육파가 된 이후, 남은 여섯 정도 대방파 중에서 가장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공동파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쪽으로는 곤륜파가 있긴 했지만 곤륜 혼자서는 준동하기 시작한 마교를 감당하기 벅찼고, 북쪽으로는 언제나 그랬듯 북방 기마 민족들이 내려와 양민들을 약탈하기를 일삼는다. 또한 아래 남쪽에서는 흑사련을 중심으로 한 사파 세력이 규모를 끊임없이 키우고 있었고, 그나마 동쪽은 다른 대방파들이 있어 사정이 나았지만 마광천을 항시 경계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파가 몸을 사리는 것은 당연했다. 세간의 평판 따위보다 문파의 존속이 먼저다. 정이니 협이니 하는 기치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일단 살아있고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니겠나.

그래서 이번 일 또한 당가에 맡기고 관망하고자 했다. 물론 당가와의 싸움으로 사파 세력의 세가 약해지면 언제든 달려 나가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다.

받은 게 있으니 돕기는 하되 당가를 위해 애써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 그게 공동파 장문인 태청이 견지하는 자세였다.

몇 년 전이었다면 아예 돕지도 않았을지 모르지만, 지금 공동파의 입장에서 흑사련도 아닌 그 휘하 사파 세력 따위는 몇이 뭉치건 그다지 위협적인 적이 아니었다. 공동파는 이제 화경의 고수를 보유하게 됐으니까.

태허─ 젊을 적부터 공동파에서 손꼽히는 고수였던 그가 부단한 수련 끝에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에 오른 까닭이다. 불과 일 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화경에 오르면서 태허는 반로환동했고, 엄청난 무위를 이룩했다.

어쨌거나 태허 역시 장문이자 사제인 태청의 의중을 헤아리고 있었기에, 굳이 당가를 구원하러 나서지는 않고 있었는데 상황을 살펴보라고 보낸 제자가 돌아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사파 세력으로 보이는 자들의 시체만 수북하게 쌓여 있고, 당가의 인물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흥미가 동한 태허가 바로 움직인 것이다. 수상하군. 이라는 말을 남기고서.

‘너희 사백을 쫓아라. 괴팍한 분이시니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항상 옆에서 수행해야 함을 잊지 마라. 그분에게 공동의 안위가 달렸음이니.’

‘예. 스승님.’

태허를 급히 따라나선 이들은 장문인 태청의 제자들로, 공동파의 중견이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나마 그들 정도나 되어야 태허의 경신법을 조금이라도 따라잡을 수 있었기에 태청이 하명한 것이다.

아무튼 태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게 이상하다는 거다. 이곳은 본파의 영역이다. 이만한 일이 벌어졌으면 응당 본파에 들러 언질이라도 주는 게 사리에 맞는 일 아니겠느냐? 쉴 곳을 원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본파가 이놈들 같은 사파도 아닌 데다, 당가에는 받은 것도 적잖은데 하룻밤 재워주는 것을 거절할 리도 없는 마당에.”

“...사백의 말씀은 이곳에 머물던 당가 사람들이 일부러 저희를 피한 거란 말씀입니까?”

“그래. 뭔진 몰라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냄새가 나는구나.”

“듣고 보니 이상하게 여기실 법도 합니다만, 그들이 숨길만한 게 있을까요?”

“그건 모르지. 한데 당가의 암기술이 이토록 고절한 줄 몰랐구나. 단신으로 대체 몇 명을 살해한 것인지.”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한 명이라니요?”

현소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곳의 시신은 삼백이 넘는다. 그게 단 한 명의 소행이라고...?

“이 사백의 눈은 속일 수 없느니라. 시신의 흔적을 봐라. 내가 암기 무학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다만, 세침류 암기로 이렇게 깔끔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가 많을 리는 없다. 게다가 흔적만 있지, 암기는 모조리 회수한 것을 보아 암기의 발출과 회수가 자유로운 지경에 다다른 이다. 극소량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극독도 놀랍지만, 그보다는 무척이나 고절한 암기술이 인상적이구나. 또한 무기도 제대로 뽑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을 보아라.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수십 명이 일수에 당했다는 의미다. 당가에 이 정도 인물이 있었군.”

“팔다리가 잘려 나간 시신들도 제법 있습니다만.”

“그것도 같은 자의 소행이겠지. 얼핏 보면 쾌검으로 잘라낸 것 같겠지만 상흔의 결을 살펴봐라. 엄청난 빠르기로 회전하는 무언가에 의해 도려내진 거다. 필시 날붙이가 달린 암기를 사용했겠지. 이건 순전히 암기술만으로 살해한 것이로구나. 역시 고절한 암기술이다.”

태허는 감탄하며 시신들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상흔을 살피기 위함이다.

“살해 수법이 아주 효율적이고 깔끔하구나. 하긴 예로부터 당가의 무학은 대량살상에 적합했지.”

“...사백답지 않게 극찬을 하시는군요.”

“이자를 만나봐야겠다. 사천으로 가자.”

“예? 안됩니다. 자칫 흑사련주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걱정 마라. 이 사백이 화경에 오른 것을 잊었더냐? 이 한 몸 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니. 사백은 그러시겠지만 저희는....”

“유가 놈도 섣불리 싸움을 걸어오진 못할 게다. 아직까지는 내공량에서 날 따라오지 못할 테니.”

“...일단은 본파로 돌아가시지요. 장문께 말씀은 드리고 출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소는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사백을 한두 해 보는 것도 아니니 이미 마음이 기울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사백, 태허는 뭐든 성미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태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은 갔다. 지금 공동파는 사면초가나 다름없는 형국.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서쪽의 마교나 남쪽의 흑사련 중 적어도 하나는 해결해야 했다. 아마 당가로 가서 직접 이 참상을 자아낸 암기술의 고수를 만나 그 무위를 가늠해볼 생각이리라.

당가 역시 고립무원이나 다름없는 형편이니 그들에게 사천의 흑사련을 맡기고 그 틈에 곤륜파와 협력하여 마교를 물리칠 생각이겠지. 그러나 태허가 시신들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몰라도 현소는 회의적이었다.

당가가 쇠락한 지는 꽤 오래된 일이었다. 만약 그들에게 흑사련을 감당할 만한 힘이 있었다면 진즉에 떨치고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또 날 보내시겠군.’

현소는 생각했다. 장문이 분명 태허만 보내지는 않을 거라고. 현소는 어릴 적부터 사백인 태허의 시중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학을 연마하기 바빴던 태허는 따로 제자를 들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태허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현소의 말은 가끔 듣는 척이라도 했다. 드물게 가르침을 주기도 했는데, 덕분에 현소는 현자 배 사형들보다 뛰어난 무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렇기에 늘 태허를 수행하는 것은 현소의 몫이었다.

“돌아가자꾸나.”

“예. 사백.”

태허의 말에 그의 사질들이 답하며 경신법을 전개했다.

현소 역시 그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부디 사천행에서 복마검법(伏魔劍法)을 펼치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

“삼장로 어르신.”

서예를 연마하던 걸까.

정갈한 차림을 한 채, 단정하게 앉아 종이에 크게 획을 그려 나가던 노인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무슨 일이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찰나에 들려온 목소리에 그만 획이 미세하게 어긋났다. 심기가 불편했지만 노인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양이 깊어서라기보다는 오랜 세월 그를 섬겨온 노복을 잘 아는 까닭이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그를 귀찮게 할 이가 아니다.

용독술의 고수이자 장로원의 실세인 삼장로 당석형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를 부른 노복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봉위대가 경합 참가자들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경합이 일찍 끝난 모양이군.”

당석형은 소가주 경합이 예정보다 일찍 끝난 것에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납득했다. 그의 외손녀인 당영령은 당가십독의 하나인 화룡호독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적절하게 활용했다면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었을 터. 경합이 일찍 끝날 만도 했다.

당석형은 외손녀의 생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미나 자질이 그를 꼭 닮은 당영령은 보기보다 모진 구석이 있었다. 무림의 상층부를 살아가려면 독심은 필수다. 당석형은 당영령이 망설이지 않고 경쟁자들을 제거했으리라 여겼다.

그때 노복이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그런데 어르신....”

“왜 그러느냐?”

“돌아온 이들 중에... 아가씨가 보이지 않습니다.”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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