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제가(2)> — 유료 시작 >
경합의 최종 승자라는 말에 가솔들이 낮은 말소리로 빠르게 떠들기 시작했다.
"당연명...?"
"생소한 이름인데. 누구의 자제지?"
"멍청아. 독봉...!"
"뭣...? 맞아. 그때 삼장로 어르신의 금지옥엽인 당영령 아가씨의 얼굴을 망가뜨리고는 경합에 참가했었지. 온 가문이 한바탕 떠들썩했었는데."
"정말 그 당연명이란 말야? 내가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데 저런 생김새는 아니었어."
"어릴 때잖아. 핏줄을 생각해봐. 성장하면서 진면목이 드러난 걸지도."
"하긴...."
"그보다, 어떻게 경합에서 우승한 거지? 참가자들 중에는 쟁쟁한 후기지수들이 한가득이었잖아. 당영령 아가씨도 그렇고, 그 왜 대장로 어르신이 총애하시던 당극린 공자도...."
"가만. 근데 그 둘이 모두 보이지 않잖아...!"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고는 하나 봉위대 정도 되는 이들이 그걸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독봉 이라니.'
그리운 울림에 당원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그들의 주인이었던 아름답고 강한 여인.
봉위대는 소가주를 호위하는 무력대였고, 때문에 독봉 당지혜가 소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그녀를 지킬 명분이없었다.
그런데 당연명의 이름을 들은 몇몇 가솔들이 독봉을 입에 담는다. 당원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설마 새 주인 당연명이, 옛 주인이자 전소가주였던 독봉 당지혜의...?
'운명인가.'
당원진뿐만 아니라 봉위대 전원의 뇌리에는 비슷한 생각이 흘렀다. 주인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 거라고. 대를 넘어서 말이다.
한편.
글지 아프게 되었군.'
총관 당기삼은 표정이 관리되지 않는 것을 느끼며 생각을 정리했다. 장로원의 다섯 장로 모두와 친분이 있는 그는 누가 소가주 경합에서 승리하건 크게 신경 쓸 일 없다고 여기던 차였다. 힘의 저울추가 삼장로 당석형에게서 다른 자에게로 넘어갈 뿐 그의 자리가 위협받을 일은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경합의 최종 승자라 밝힌 미청년의 이름이 당연명이란다. 생김새는 낯설었지만 당연명이라는 이름을 총관인 그가 모를 리 없다.
'독봉의 아들....'
당기삼은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 한바탕 난리가 날 사안이었다. 독봉에게서 소가주의 지위를 박탈한 것이 바로 장로원 아닌가. 그런데 그녀의 아들인 당연명이 경합에서 우승하다니...!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가 발생한 셈이다.
장로들에게도, 당기삼 자신에게도.
"총관께선 항명죄를 입에 담으셨지요."
당연명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가문의 요직에 앉은 이를 상대로도 여유로운 모습이다.
"다시 묻겠습니다. 가규에 의거했을 때一 본가에서 소가주에게 명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달리 있습니까?"
"그건... 가주뿐일세."
”가주의 자리가 공석일 때는 어찌됩 니까?”
"그때는 소가주가 가주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있지...만, 자네는 아직 정식 소가주로 임명된 게 아닐세."
"소가주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 해두지요."
당기삼은 말문이 막혔다. 당연명의 말이 올음을 아는 까닭이다. 경합에서 승리한 이상 당연명은 가문의 누구보다 소가주에 근접해있다.
"총관의 말씀에 따르면, 설사 장로원이라 해도 소가주에게 명을 내릴 수는 없겠군요. 애초에 명을 내릴 수 없으니 곧 항명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볼 수 있겠고."
'..아직 정식 소가주가 된 것도 아닌데, 이리 기싸움을 벌여 좋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나? 여러 장로 어르신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된다면 아무리 경합에서 우승했더라도...."
"그만."
당연명이 갑작스레 총관 당기삼의 말을 끊는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진녹색 안광이 피어올랐다. 마치 귀화가 일렁이는 듯하다.
당기삼은 당연명이 자신의 말을 자른 것에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보다는 갑자기 심장을 옥죄여 오는 기운에 대경했다. 겨우 입만뻐끔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뱀 앞에 선 생쥐 신세가 이럴까.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한 듯하다. 전신의 피가 차게 식는 느낌. 아무리 그가 총관으로서 문사에 가까운 인물이라지만 결코 얕은 무공을 지 닌 것은 아니었다. 수련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
데도 한낱 후기지수 앞에서 압도당하는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좀 조용해졌군.'
당연명은 냉랭한 눈빛으로 당기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별 의미 없는 논쟁에 휘말려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사양이다. 어차피 저쪽- 장로원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은 이쪽이 소가주의 위에 오르는 것이 달갑지 않을 테니까. 분명 막으려 들겠지. 초장부터 마냥그들의 뜻대로 휘둘려주진 않을 셈이었다.
고도로 정제된 살기를 순간적으로 뿜어내되, 그 영역을 총관에게만 해당되도록 한정했다. 압축된 살기의 권역이 선사하는 압박감은 장난이 아닐 것이다. 아마 심혼이 얼어붙는 감각에 입을 열기도 버거울 테지. 그의 수준을 짐작했을 때 해소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필요할 터一
그렇게 짐작하며 당연명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한껏 굳은 안색의 총관. 그의 귓전에다 대고 작게 말했다.
"가서 오만한 뒷방 늙은이들에게 전해. 소가주 경합과 함께 당신들의 시대는 끝났다고."
볼일이 있다면 직접 걸음 하는 것이 옳겠지一 그렇게 당연명의 말소리는 멀어졌다.
****
붉은 기가 도는 고급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원형의 탁자.
그걸 둘러싸고 앉은 다섯 사람이 있었다. 모두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들이었지만 행색으로 보나 풍기는 기세로 보나 하나같이 보통의 인물들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당가 장로원의 주축인 다섯 장로들이었다.
그중 한 인물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지, 총관?"
"들으신 그대로입 니다. 소가주 경합에서 최종 승리한 것은 독봉의 아들인 당연명...."
쾅!
"그럴 리가 없다! 무언가 잘못 안 게 아닌가? 제깟 놈이 무슨 수로 내 외손녀를 제치고...."
삼장로 당석형은 탁자를 내리지며 노기를 터뜨렸다. 단단한 자단목으로 두껍게 만들어진 탁자에 그의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단순히 공력을 실어 터뜨리기만 했다면 탁자가 그대로 부서졌겠지만 그저 손바닥 자국만 남았다는 것은 당석형의 내력 운용이무척 세밀하다는 것을 뜻했다.
당석형이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의 외손녀 당영령은 무려 당가십독 중 하나인 화룡호독을 가지고 경합에 참가했다.
용독술만 제대로 구사했더라도 당해내지 못할 이가 없을 터였다. 화룡호독의 위력은 누구보다 당석형이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경합에서 패배한 것뿐만 아니라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다니....
스물여덟 명의 참가자 중에 목숨을 잃은 것은 아홉이라 했다一 넷은 처음 일 년 동안, 다섯은 경합의 마지막 과정인 고독전에서 그리됐다고. 이건 봉위대가 아니라 제갈가의 사람들이 말해준 것이기에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당석형은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다른 이들은 화룡호독에 대해서 모른다. 그러니 속 시원히 의문을 뱉지도 못했다. 또한 당영령이 만약 화룡호독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분명 어 딘가 독병 째로 남아 있을 터였다. 가능하다면 회수해야 했다. 그건 당가의 보물이니까. 자칫 화룡호독을 빼돌린 걸 들킨다면 아무리 그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원래는 당영령이 소가주가 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일이 꼬인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분노하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다만 그는 삼장로 당석형과는 다르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채였다.
'극린이 당했다고...?'
장로원주이자 대장로인 당석중은 의문을 느꼈다. 제자인 당극린의 자질과 실력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았다. 괜히 일찍부터 경합의 기대주로 이름이 드높았던 게 아니다.
'심지어 그것도 삼 할 이상 실력을 숨긴 거였지.'
그랬다. 적당히 드러낸 실력만으로도 경합의 강력한 우승 후보로 첫손에 꼽히던 게 바로 당극린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됐지만 타고난 자질뿐만 아니라 노력까지 겸비한 인재였던 지라 망설임 없이 제자로 삼았었다. 특히 이번 경합에서 기대가 컸다. 승리하고 돌아오면 손녀딸과 맺어줄 생각까지 하고 있을 정도로.
사사로운 욕심을 제하더라도 차기 당가를 이끌 만한 재목은 당극린 뿐이라 확신하고 있던 당석중이었다.
게다가一
당석중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가주 경합을 위해 참가자들이 떠나기 전, 그때 일장 연설을 하면서 당연명을 눈에 담았었다. 한창 논란의 중심에 있었으니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 또래보다 나은 실력인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정도 실력이니 삼장로의 외손녀인 당영령과 다른 두 아이들을 상대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뿐이었다. 당극린과 비하면 한참 떨어진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간극을 고작 삼 년 만에 메웠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었다. 경합의 마지막 과정一 생존을 두고 다투는 고독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놈이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당극린을 합공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슨 비겁한 수를 썼을 지도. 그러지 않고서야 당극린을 누르고 승자가 되었을 리가 없다.
'진상을 알아봐야겠다.'
고독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一 장로원에서 결정된 사안이었지만, 대장로 당석중은 도무지 애제자가 당연명에게
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삼장로 당석형 역시 크게 노한 상태였으니 기세를 타고 자초지종을 캐물어도 큰 흠은 되지 않으리라.
"...대체 경합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유력한 후보들이 모조리 탈락하고 그 독봉의 아들이 우승하다니. 이 무슨 장난 같은 일이란 말이오?"
"애도를 표하오. 대장로, 삼장로.'
다른 세 장로들도 당연명이 경합의 승자라는 사실에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경합에 참가한 혈육이나 제자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을 전달받았기에 상심이 덜한 듯했다.
"그래서. 지금 그 당연명이라는 아이는 어디 있나, 총관? 우리에게 기별을 넣었으니 당연히 데리고 오리라 생각했는데."
삼장로의 기세가 잠깐 누그러진 틈을 타 사장로 당지룡이 물었다. 그는 데릴사위로 당가에 들어온 인물로, 원래 사천의 어떤 검파의 후예였다.
"그것이...."
총관 당기삼이 말끝을 흐렸다.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이미 당연명이 경합의 최종 승자가 되어 장로들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마당에 더한 충격을 줄 발언을 해야 했기에.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겐가?"
"아닙니다...! 당연명은 지금 암독전에 가 있습니다. 여러 장로 어르신들께서 기다리고 있음을 누차 강조했으나... 끝내 발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소가주 경합은 암독전 소관이라면서. 경합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장로들께서 직접 걸음하시는 것이 올다고...."
차마 '오만한 뒷방 늙은이들'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하는 당기삼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쾅!! 하고 굉음이 터졌다.
< 46화<제가(2)> - 유료 시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