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제가(4)> >
"승리? 지금 연명이 네가 소가주 경합의 최종 승자라고 말한 것이냐...?"
"예.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 • ••
당적휘는 가느다란 날숨을 내뱉으며 생각을 다듬었다. 당연명이 소가주라니...!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지 않은 놈이란 생각이 들긴 했었다. 암왕대와 독왕대 무사들의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버렸던 것부터 해서, 일을 저지르고 태연하게 경합을 신청하는 대범함이며, 어린 나이에도 중심을 세운 소신, 협을 지니고 있었다.
사내로서 마음에 들었고, 진지하게 경합에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응원했더랬다. 독봉 당지혜의 혈육인 것도 기꺼웠고.
그런데 정말로 그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해서 돌아올 줄이야.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다른 게 아니었다.
놀란 것은 당적휘뿐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정말로, 네가 우승했단 말이냐?"
독왕대주 당지혁이 떠듬거리며 묻는다.
"못 미더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독왕대주."
"아니, 그, 못 미덥다는 게 아니라...."
당지혁은 당황했다.
'하나 그래봐야 사 년이다. 소가주가 되지 못한다면 너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테지. 독봉 역시 마찬가지다. 자식 간수를 제대로하지 못한 죗값을 치러야 할 거다.'
언젠가 그가 당연명에게 뱉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경솔했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내뱉었을까. 당연명이 소가주가 된다는 것은, 곧 장성하기만 하면 가주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의미였다.
당씨 성을 쓰는 주제에, 사천당가의 주인이 될 사람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미친 게지.'
당지혁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바라는 것은 당연명이 과거의 일을 잊었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당지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당연명이 입을 열었다.
"대주의 말씀대로 채 사 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가 경합에서 우승하였으니, 말씀하셨던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겠지요. 제 모친께서도 죗값을 치르지 않아도 될 테고."
당지혁은 더 입을 열지 못했다. 했던 말을 정확히 그대로 돌려받은 까닭이다. 당연명이 지난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완전히 끝장이라는 생각만이 뇌리에 멤돌았다.
눈을 질끈 감는 당지혁을 일별한 뒤, 당연명이 당적휘에게 말했다.
"대주. 제가 알기로, 소가주 경합은 이곳 암독전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래. 암독전이 가주전이었던 만큼, 장차 가주가 될 소가주를 뽑는 경합 역시 암독전 소관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경합의 우승자가 소가주에 오르는 데 필요한 다른 절차가 있습니까?"
"...일단 다른 것보다 지근거리에서 경합의 진행을 맡은 봉위대의 인정을 받아야겠지. 그들은 소가주 직속의 호위대다. 그들의 마음부터 얻는 게 순서겠지."
당적휘의 말이 잠시 멎었을 때였다.
당연명의 뒤로 도열해 있던 봉위대 무사들이 척 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백히 상관을 대하는 자세.
갑작스런 광경에 놀란 암왕대와 독왕대의 무사들이 눈을 치떴다. 전 소가주 독봉의 호위를 맡았던 봉위대는 하나하나가 상당한 실력의 고수였다. 독왕 당지혁 정도는 되어야 그들 개개인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당가의 최정예 무력대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 그들이 당연명을 향해 무릎을 꿇다니...?
당연명의 바로 뒤, 봉위대의 가장 선두에 있던 당원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암왕대주. 우리 봉위대는 이미 이분을 소가주로 인정하기로 했네. 경합에서 정당하게 승리하셨을 뿐만 아니라, 본가 후기지수 중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함을 지니셨지. 뿐만 아니라 독봉의 피까지 흐르고 계시니, 전대 가주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마저 갖춘 셈일세."
한바탕 말을 쏟아낸 당원진은 다시금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네도 곧 알게 되겠지만, 이분이 아니면 본가에 미래는 없네."
"대체...."
문득 당적휘는 경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어떤 모습을 보였기에 이토록 확실하게 봉위대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까. 듣자하니 독봉의 아들인 것을 밝힌 것도 겨우 조금 전의 일인 듯한데 말이다. 당가의 미래까지 운운하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도 마음을 빼앗긴 성싶었다.
"모두 일어나도록."
주인의 말에 무릎을 꿇었던 봉위대가 일어나 대열을 갖춘다. 말 한마디로 정예 무력대를 부리는 당연명의 모습에서는 제법 가문의 작은 주인다운 태가 났다.
당연명은 태연스레 말했다.
"대주. 다음 절차는 무엇인지...?"
"...경합의 공정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불문에 부치기로 한 고독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경합의 전 과정이 동등한 조건에서 또 공정하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펴야겠지. 원래는 봉위대와 제갈가, 그리고 다른 참가자들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지만.... 봉위대에는 물어볼 필요도 없겠군."
"물어보시지요."
당연명이 한쪽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그 움직임에 따라 봉위대 역시 길을 텄고, 남은 것은 탈락한 경합 참가자들과 제갈창신을 비롯한 제갈가 인물들이었다.
"먼저 경합 참가자들에게 묻겠다. 너희는 본가 소가주 경합의 명예로운 참가자로서 한 지의 거짓도 숨겨선 아니 될 것이다."
"예!"
"그럼 한 명씩 데려가서 묻겠다. 각자 경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또 불합리하다고 생각됐던 것은 없었는지 소상히 얘기하면 된다."
그렇게 말한 뒤 당적휘가 암왕대의 인원을 십여 명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한 명씩 경합 참가자
들을 데리고 어 딘가로 사라졌다.
"눈이 없는 곳에서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취합된 것들을 대조해 판단을 내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당연명이 대답하며 힐끗 독왕대주 당지혁을 봤다. 그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경합의 검증 과정에 조금도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덕분에 암왕대주 당적휘의 주도 아래 경합 절차 검증은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물론 이것 역시 당연명이 의도한 바였다.
"그럼, 제갈가 분들은 이리로 오시지요. 먼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본가를 위해 노고를 기울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암왕대주 당적휘라고 합니다."
"제갈창신입 니다. 부족하나마 가문에서는 무량전을 맡고 있지요."
"무량전주의 명성이야 익히 들었습니다. 희대의 절진인 질쇄환궁진을 완벽히 펼치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법가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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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월 잘못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과찬에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하하. 겸양이 지나치시군요."
당적휘와 제갈가 인물들 간의 대화는 부드럽게 진행됐다. 제갈가의 진법의 대단함을 치켜세워주고, 또 덕분에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안전하게 경합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는 당적휘의 공치사와, 경합에 참가한 어린 인재들을 보니 가문의 미래가 무척이나 밝아 보여 부럽다는 제갈창신의 덕담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졌다.
와중에 탈락한 참가자들을 데려갔던 암왕대 무사들이 검증한 바를 가지고 왔다. 참가자들이 얘기한 내용들은 대동소이했고, 크게 걸리는 부분이 없었다. 깔끔한 결과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명의 무위를 목도한 이상, 여기서 경합이 불공정했다 걸고넘어지는 이가 있을리가 없었다. 차기 가주의 눈 밖에 나고 싶은 것이 아니고서야.
"...그래서. 제갈무인의 말씀은 경합 과정 전체에 걸쳐 외부의 개입은 없었다는 거군요."
"정확히는 '고독전 이전'까지입니다."
"예? 그럼 고독전에서는 외부의 개입이 있었다는 뜻인지...?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만."
"공정치 않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고독전에서 예기치 못한 사태가...."
한창 얘기가 막바지로 치달을 때였다.
"멈추어라!!"
누군가 노성을 터뜨리며 암독전으로 접근해왔다. 목소리에 실린 내공이 장난이 아니었다.
'왔군.'
당연명은 감각도 주사망역을 상시로 펼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진즉에 확장된 기감으로 상당한 인원의 접근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곧 후욱 끼치는 바람과 함께 담장을 넘어 날아드는 인영이 있었다. 기다란 장포를 펄럭이며 내려앉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무위를 드러내는 듯했다.
그를 알아본 당지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삼장로 어르신...?"
"누구냐. 당연명이라는 놈이."
"접니 다만."
누가 봐도 노한 기색의 삼장로 당석형이었지만, 당연명은 태연한 안색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본 당석형이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생김새가 마치 독봉 당지혜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했던 까닭이다. 절세미청년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독왕대주는 고하라."
"예."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이지?"
"경합 참가자이자 우승자 당연명이, 소가주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여 경합의 전반적인 과정을 검증하고 있었습니다."
"하. 검증이라...?"
당석형이 기가 찬다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홱 돌려 당연명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 너를 익히 알고 있다. 분명 내 외손녀의 얼굴을 망가뜨렸었지. 당시에도 꽤나 영악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만, 그 성정이 여전하구나. 감히 본 장로의 허락도 없이 날치기로 소가주 자리를 탐내다니...!"
"영악, 하다고 하셨습니까?"
당연명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소가주 경합은 본래 가주전이었던 암독전의 소관입니다. 장로원이 아니라. 설마 장로씩이나 되신 분이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요."
"...이놈이?"
"가문에 들어서자마자 총관이 그러더군요. 장로원에 들러 먼저 보고를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그러지 않아서 화를 내시는 겁니까?"
당연명의 말에 당적휘와 당지혁이 경악했다. 그들은 당연히 당연명이 장로원을 들렀다 암독전에 왔으리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소가주가 된 것도 아니지 않나. 설령 장로들에게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더라도 일단은 숙이는 것이 현명할진대...!
"오면서 들었네. 정말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군...!"
"본가의 소가주는 장차 가문을 이끌 주인이 앉아야 하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 장로원의 허가도 없이 얼렁뚱땅 앉으려고 하다니."
다른 장로들 역시 말소리와 함께 속속들이 내려섰다. 하나같이 고절한 신법. 그들은 당연명을 심판하기라도 할 것처럼 준엄한 기세
를 흘려댔다.
당적휘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며 탄식했다.
'왜 일을 이런 식으로....'
아까웠다. 어쪄자고 장로들의 노여움을 샀단 말인가. 어쩌면 기껏 경합에서 승리하고도 소가주가 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반면, 당지혁은 희색이 만면에 번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꼼짝 없이 당연명이 소가주가 되는 줄 알았는데, 상황을 보아하니 장로들이 용납하지 않을 듯했다. 멍청한 놈...!
게다가 장로들로 끝이 아니었다.
암독전 바깥에서는 엄청난 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필시 각 장로들이 직속 무력대를 모조리 끌고 온 것이리라.
그렇게 여릿의 얼굴에서 희비가 교차하는 마당에서.
당연명은 입매를 살짝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고맙게도 생각보다 판을 크게 벌려줬다고.
< 48화<제가(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