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제가(6)> >
'이건 기회다!'
제갈창신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합의 우승자인 당연명과, 장로원에서도 실세로 통하는 삼장로 당석형이 모두 동의했다. 그의 발언으로 인해 당가와 제갈가가 소원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제갈가에 대한 당가의 지원이 끊어지는 없을 거란 얘기였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一
제갈창신의 머리가 빠르게 굴렀다. 장로원은 당연명이 소가주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당연명은 그가 경합의 공정함을 증명해주길 바랄 터였다.
원래라면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당연명이 경합에서 우승한 인재고 당장의 명분을 쥐고 있다 하더라도 장로원의 눈 밖에 나면 소가주에 오르는 것은 지난한 일이 될 터였다. 봉위대의 마음을 얻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입지와 '무력'이 장로원에 비할 바는
못 될 거다. 삼장로의 편을 드는 것이 올다.
'...무력이 라.'
문득, 제갈창신의 뇌리에 그간 봐왔던 당연명의 모습들이 스친다. 처음 봉위대의 시험을 듣도 보도 못한 착(着)이라는 수법으로 간단히 통과한 것부터, 제갈가 비전 안법 진명안을 간파하는 기감, 진법세계와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검격을 구사했던 것과, 삼백에 달하는 사파 인원을 단신으로 몰살시킨 무력....
'마지막엔 질쇄환궁진까지 파훼했다.'
과연 당가 장로들이라 해서 그런 무위를 보여줄 수 있을까. 제갈창신은 결코 아닐 거라고 여겼다. 흔히 절진이라 부르는 진법은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그런 진법을 파훼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의지를 쳐부술 수 있는 무력을 지니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기에 의념을 싣는다는 화경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그러나 제갈창신은 당연명이 화경에 올랐으리라고는 추호도 의심치 못했다. 그의 연배를 아는 까닭이다. 열다섯. 어미 뱃속에서부터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난 흑사련주 유길준 정도 되는 천재라면 모를까...!
무언가 다른 방법을 써서 진법을 파훼했을 거라 여겼다.
어쨌건 제갈창신의 입장에서 당연명은 무척 낄끄러운 존재였다. 대적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소가주가 되도록 돕는 것도 애매했다. 당장 삼장로 당석형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중요했고.
결국 마음을 굳힌 제갈창신이 입을 열었다.
"경합의 과정 자체는 공정했습니다. 적어도 봉위대나 저희 제갈가가 개입할 수 없었던 고독전까지는 말입니다.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지요."
"말에 뼈가 있군. 고독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다는 건가?"
삼장로 당석형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와 같은 눈빛.
당연명은 그저 표정 없이 제갈창신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제갈창신이 말을 이었다.
"태을묵검파를 아실 겁니다. 이곳 사천에 자리 잡은 사도 방파지요. 흑사련 휘하의."
"...알다마다. 한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건가."
"그곳의 장문인 막인후가 수하 삼백을 이끌고 질쇄환궁진에 들어섰습니다. 무엇을 노린 건지는 명약관화지요. 경합에 참가한 당가의 예비 소가주들을 처리할 심산이었을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어찌 피해가 이리도 적었지? 그렇군. 질쇄환궁진 덕분이겠군."
"꼭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습니다."
제갈창신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들어선 것은 바로 고독전을 위해 펼쳐진 새로운 진법 세계였지요.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당원진 무사는 고독전을 치르고 있는 참가자들을 어떻게든 빼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때는 이미 저희 제갈가에서도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진법을 닫아 잠그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였지요."
"고독전을 치르던 인원들은 누구였나.""일곱 개 조에서 각 한 명씩 뽑힌 자들로 2호 당영령, 10호 당극린...."
제갈창신이 각 조 조장들을 호명하기 시작하자 삼장로 당석형과 대장로 당석중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영령과 당극린 등이 최종 관문인 고독전까지 이르러 진법 안에 갇힌 상황에서 태을묵검파, 사파 잡놈들과 마주했다는 얘기로 들렸으니까.
소가주가 되기 직전까지 달았다 미끄러진 것이다.
특히 삼장로 당석형은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놈이 어부지리를 얻은 모양이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외손녀인 당영령이 사파 무인들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다 화룡호독까지 소진하고 쓰러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아마 상당한 수의 무인들과 동귀어진을 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당가십독까지 지니고서 고독전에서 패배할 수 있을까.
대번에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당석형을 의식하며, 제갈창신이 입을 열었다. 이제 판을 깔아줘야겠지.
"결국 고독전에서 살아남은 것은 태을묵검파가 진입하기 전에 기권을 한 당정일과,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낸 당연명뿐입니다."
"태을묵검파 놈들은 어찌 됐지?"
"모조리 죽었습니다. 하나같이 끔찍한 독과 암기에 당한 모습이었는데, 개중엔 태을묵검파 장문인 막인후의 신물로 알려진 흑검 두 자루도 있었습니다. 가지고 왔으니 확인해보시지요."
제갈창신이 눈짓하자, 제갈가 인물 중 하나가 황톳빛 천으로 칭칭 감아둔 무언가를 끌러냈다. 거기엔 과연 범상지 않아 보이는 흑색검 두 자루가 있었다.
"...맞는 것 같군. 막가 놈이 휘두르는 걸 몇 번 본적이 있으니."
검에 조예가 있는 사장로 당지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장로들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정말로 막인후가 죽었단 말인가? 그는 흑사련 휘하 사파 수장들 중에서도 수위권에 드는 인물이었는데. 고작 후기지수에 불과한 이들이 협공해서 어찌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하나 삼장로 당석형은 막인후를 죽일 수 있을 만한 수단을 알고 있었다.
화룡호독一 열독의 극지라 할 수 있는 그 극독이라면, 분명 소량만으로도 막인후를 살해할 수 있을 터였다. 화경에 이른 자들이라 해도 쉽게 해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당가십독이었으므로.
의심이 확신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네놈."
당석형이 말했다.
"고독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소상히 말해야 할 것이다."
"제가 그걸 말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건 고독전에서 있었던 일은 불문에 부치기로 한 것으로 압니다만."
"지금 본 장로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쾅!!
당석형이 발을 내딛으면서 노성을 터뜨렸다. 진각에 실린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당장 출수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되었다.'
제갈창신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최대한 사실만을 얘기함으로써 당연명과는 척을 지지 않고, 장로원이 물어뜯을 빌미를 적당히 제공했다. 이제 남은 일은 그저 구경하는 것뿐이다. 기왕이면 장로원이 경합의 결과 자체를 무효화했으면 좋겠다싶었다.
당연명은 그가 보기에 찜찜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 소가주, 그리고 가주가 된다면 제갈가에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거란 직감이 들었다.
꾸우욱 당석형이 지르밟는 땅이 계속해서 파인다. 계속해서 발바닥 용천혈에 내공이 축적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언제든 쏘아져 나갈 수 있는 자세는 일촉즉발의 기류를 자아냈다.
당석형이 말했다.
"고독전에서 있었던 일을 불문에 부치는 것은 참가자들끼리의 싸움에 대한 것뿐이다. 이번 사안은 논외다. 외부 세력이 개입됐지 않느냐!"
"삼장로의 말이 올다. 경합은 온전히 참가자들 간의 우열을 가리는 장이어야만 한다. 한데 사파 놈들이 끼어들었다면 제대로 된 경쟁 이었다고 볼 수 없겠지."
"정말로 정당하다면 안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
사장로와 오장로가 말을 보탰다.
당연명은 그 꼴을 보고 있다 입술을 뗐다.
"아무래도 제가 어부지리로 득을 취한 줄 짐작하시는 모양인데."
말하면서 묘한 미소를 짓는다. 그걸 본 당석형은 왠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압박하고 있는 것은 이쪽인데...?
"태을묵검파一 라고 했던가요. 그 사파 놈들이 고독전의 진법으로 들어선 것은 이미 경합이 모두 끝난 뒤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설마하니 네놈 혼자 삼백에 달하는 인원을 죽이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얘기냐?"
"예. 그게 진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고독전에서 죽인 것은 단 둘뿐입니다. 당영령, 당극린. 다른 자들은 이미 둘의 손에...."
"놈!!"
과앙!!
당연명이 외손녀를 죽였다는 말에 기어이 삼장로 당석형이 땅을 박찼다. 그의 손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려 있었는데, 그게 귀살독장(鬼殺毒掌)임을 알아본 이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명백한 살수였다. 귀살독장에 적중당한 이는 시력과 청력을 순서대로 잃고,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독장인 만큼 시전자의 진기 성질에 크나큰 영향을 받는데, 용독술의 고수답게 당석형은 익힐수록 독기가 짙어지는 전독심법(燕毒心法)을 익히고 있었다. 그의 전독기가 실린 귀살독장은 특히나 지독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후기지수에 불과한 당연명에게 쏟아낸다는 것은 살심을 제대로 품었다는 뜻이었다.
//
!!!
다급히 암왕대주 당적휘와 봉위대 당원진이 몸을 날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진각을 밟은 뒤 용천혈에 내력을 축적해 이미 앞으로 쏘아질 준비를 마치고 있던 당석형의 돌진은 그야말로 쾌속 그 자체였던 까닭이다.
그나마 가까이 있던 당원진이 땅을 박찰 때, 당석형은 벌써 당연명의 코앞에서 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당연명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맞부딪쳐갔다. 설마 당석형의 귀살독장을 받아질 셈일까. 하지만 장법은 원래 타격이 주가 아니다. 특히나 독장은 접촉하는 그 자체로 위험할진대...!
당연명의 손은 살짝 진녹색이 감돌뿐이었다. 그게 독요청광기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본 이들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어렸다. 독요청광기는 가전 심법 중에서도 기본 중의 기본일 뿐. 다른 이들은 대개 상위 심법을 익히고 있었으니까.
독요청광기로 전독기를 상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 간에는 엄청난 연배의 차이도 존재했다. 연배, 세월은 곧 내공량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언가 기연이 있거나 엄청난 영약을 섭취하지 않았다면 세월의 간극을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게 지켜보는 모두가 곧 끔찍한 광경이 펼쳐질 거라 예상하고一
두 사람의 장이 부딪쳤다. 과앙, 살과 살이 부딪친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후우욱一!
맞부딪친 손바닥을 중심으로 엄청난 기파가 번졌다. 당연명과 당석형의 옷자락이 파라락 휘날린다. 지켜보던 이들이 눈을 크게 지떴다. 이건 두 사람의 공력이 거의 비등할 때나 가능한 일 아닌가...!
'이놈...?'
이 순간 누구보다 당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살수를 펼친 삼장로 당석형 본인이었다. 손바닥을 맞부딪치고 있는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당연명의 내공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이게 말이 되나?
당석형은 질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부단히 수련했다. 당연히 내공량 역시 그에 비례한다. 그런데 어찌 이제 열다섯에 불과한 당연명이 그의 장력을 받아낼 수 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버젓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믿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세 영약이라도 주워 먹은 건가.'
어쩐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더라니.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장력보다는 독기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으니까.
곧 놈은 질공에서 피를 쏟으며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당석형은 귀살독장의 기운을 당연명의 장심으로 한껏 쏟아냈다.
그러나 곧 이상함을 느꼈다.
'뭐냐. 어떻게 멀쩡한 거지?'
지사량을 진즉 넘었을 만큼의 독기를 흘려보냈는데도 당연명은 고통스럽기는커녕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 50화<제가(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