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제가(7)> >
삼장로 당석형의 전독기가 실린 귀살독장의 기운은 분명 강력했다. 범인이었다면, 아니 원!만한 고수라 해도 스치는 순간 독기가 침입하고 얼굴색이 푸르죽죽해지며 시각과 청각이 흐려질 터였다.
그러나.
당연명의 독요청광기가 어떤 기운이던가. 이미 당가십독의 하나인 화룡호독까지 먹어치워 덩치를 키운 바 있다. 삼장로의 독기가 아무리 강력하다한들 당가십독만큼은 아니었다.
ㅡ쇠락할 만해.'
당연명은 안간힘을 쓰는 삼장로를 보며 생각했다. 가문에서 용독술과 독공으로 손꼽힌다는 이가 겨우 이 정도 독기를 가지고 있으니 가세가 기울지.
"삼장로께서는."
당연명이 문득 입을 연다. 그에 당석형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장력을 대결하는 와중에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공에 여유가 있다는 의미였던 까닭이다.
"외손녀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으시나 봅니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요. 당가십독까지 들려보냈는데, 경합 우승은커녕 목숨마저 잃었으니." 갑작스러운 당연명의 얘기에 당석형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그걸 어찌...?
그러나 당석형은 입을 열어 의문을 뱉을 수 없었다. 이미 장력을 쏟아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는 때문이다. 힘을 거두면 역으로 당할 수 있었다.
"지금 놈이 뭐라 지껄인 거요? 당가십독이라니?"
”설마 삼장로께서 당가십독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건가? 외손녀의 경합에 유리하도록?"
"놈! 소상히 말해라. 방금 말한 게 무슨 뜻이냐?"
다른 장로들이 당석형의 열세를 보고도 도울 생각도 못한 채 놀라 외친다. 그도 그럴 것이, 당가십독은 당가의 가보나 다름없었다. 설사 화경의 고수라 해도 죽일 수 있는 귀물일진대. 고작 내부 경합으로 소모하기엔 그 가치가 너무도 컸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아무리 삼장로라 해도 중형을 면치 못한다...!
당연명이 말했다.
"확인해보시면 될 일입니다. 아, 원래 당가십독을 관리하는 것이 삼장로셨으니 그 수하들을 문초해보시지요. 당영령이 가지고 있던것은 화룡호독이었습니다."
"...화룡호독이라니."
"삼장로. 어쩌자고 그런 짓을...!"
대장로와 이장로가 탄식했다. 당연명의 말이 진실임을 직감한 것이다. 원래 당가십독의 존재는 극비였다. 당연한 일이다. 절세고수마저 죽일 수 있는 극독 중의 극독이었으니. 그 종류나 용법, 보유량 같은 것은 보통의 가솔은 알지 못하는 정보였다. 그런데 당연명은 '화룡호독'을 정확히 입에 담았다...!
당연명을 대하던 장로들의 기세가 한풀 크게 꺾였고, 삼장로 당석형은 미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정말 상정하지 못한 사태였다. 당연명의 무위도, 갑작스런 폭로도.
화룡호독을 유출한 것은 금방 드러날 일이었다. 그리되면 이번 일이 어찌저찌 끝난다 해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어찌면 장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지도 몰랐다. 그가 지닌 권세를 탐내는 장로들이 있었으니.
'죽인다, 놈. 반드시 죽인다...!'
당석형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살의를 불태웠다. 맞부딪친 채 묶여 있는 손만 어떻게 해결이 되면 품속에 있는 극독들로 당연명을 한줌 독수로 만들어버릴 참이었다. 과연 귀살독장도 먹히지 않은 당연명에게 당가십독이 아닌 극독들이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러나 당석형에게 기회는 없었다.
당연명이 말했다.
"봉위대주."
"예. 주군."
"가문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당가십독을 정당한 절차나 허가 없이 사리사욕을 위해 유용한 이가 있다면, 그 처벌은 어떻게 되지?"
"...극형이 마땅한 줄로 압니다."
당원진이 조심스레 답했다. 왜 이런 걸 묻는 걸까. 마치 삼장로 당석형을 직접 처단하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네놈이 정 녕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냐!"
"보자보자하니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감히 가문의 어른들을 희롱해?!"
"얼른 그 손부터 놓지 못할까!"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당석형은 당가의 장로 신분이다. 그가 한낱 후기지수한테 심문당하는 꼴을 보여서야 장로원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호통과 함께 장로들이 막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가문의 율법에 따라 삼장로 당석형을 극형에 처한다."
당연명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화르르르류一!
거짓말처럼 엄청난 불길이 터져 나왔다.
진원지는 다름아닌 당석형이었다.
당연명이 열독강一 화룡호독의 심상으로 창안된 강기 무학을 펼친 것이다. 모두 태워버린다는 의념이 실린 강기가 당석형의 장심을 타고 파고들었다.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잖음을 느낀 당석형이 내공을 동원해 방벽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열독강은 내공 방벽을 허물고 들어가 그대로 발화했다.
불길은 폭발하는 것마냥 타올랐고, 당석형은 커컥 하는 짧은 숨소리를 남기고 새카맡게 그을렸다. 마지막 한 줌 호흡까지 태워버린 불길은 그의 새카만 신형이 진흙인형마냥 부서져 내리고 나서야 사라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내에 자리한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코앞에서 목도한 까닭이다. 장로원에서도 실세로 통하던 삼장로 당석형이 살해당했다...!
"지금, 이게, 무슨?"
"그 삼장로 어르신이... 당했다?"
"뭐냐. 저 열양지 력은...! 사람이 한 순간에 재가 됐어."
"본가에 저런 열양공이 있었나...?"
"일개 후기지수의 수준이 아냐. 경합에 우승한 것도 거짓이 아니다...!"
"그딴 게 문제가 아냐. 대체 뒷감당을 어찌하려는 거지?"
한 박자 늦게 수군대는 말들이 터져나왔다. 충격적인 광경을 놓고 감상들을 읊는다.
그 말소리들을 들으며 정신을 차린 대장로 당석중이 외쳤다.
"뒷들 하는 거 냐! 감히 가문의 원로를 살해한 놈이 다. 당장 추포해라!"
"예!"
대답과 함께 장로원 직속 무력대가 암왕전으로 속속들이 진입한다. 선두에는 삼장로 직속 무력대인 파롱대를 이끄는 당계중이 굳은 낯빛을 하고 있었다.
봉위대가 그 앞을 막고서 경계 태세를 취했지만, 전력 차이가 너무 컸다. 장로원 쪽은 얼핏 봐도 수백에 달하는 인원이었으니까.
"봉위대는 물러서라."
"주군.... "
"두 번 말하게 할 참인가?"
"......"
당연명은 봉위대를 물리고 전방에 나섰다. 정면에 장로들과 그들의 직속 무력대가 보인다. 이쪽과는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다.
"감히."
나직이 입을 여는 당연명의 눈에 불현듯 진녹빛 귀화가 일렁인다.
"장로원 따위가 본가의 율법을 비껴갈 수 있을 거라 여겼나?"
"삼장로 당석형은 가문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당가십독一 화룡호독을 사사로이 외손녀에게 주어 경합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게 했다.
이는 가문의 미래를 걸고 진지하게 임하는 다른 참가자들을 기만하는 행위이며, 또 죽어 마땅한 죄다."
어조가 완전히 바뀌었다. 하대가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 같은 모습이다.
게다가一
당연명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더해질수록 그에게서는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장로들은 물론이고 원!만큼 성취가 있는 이들도 안색이 파리해진다. 몇몇 이들은 숨을 쉬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 무려 수백에 달하는 이들이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이건 당연명이 광대한 살기의 권역을 형성한 때문이었다. 단순한 살기가 아니다. 경지에 이른 검도 고수나 뿜어낼 수 있는 고도로 정제된 살기. 그게 반경 백여 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안 그런가? 이토록 추잡한 짓을 일삼는 장로원에게, 본가 소가주를 심의할 만한 권한이 주어지는 게 옳은가?"
드넓은 암독전에, 오로지 당연명의 목소리만이 울린다.
"본인은 전대 가주의 직계 혈통이자, 장로원에 의해 자격을 박탈당한 전 소가주 독봉의 아들이다. 또한, 본가 소가주 경합의 정당한 우승자이니, 이것만으로도 소가주의 위에 올라설 자격이 충분하다 할 것이다."
썩어 빠진 장로원의 인정 따윈 필요치 않다一 그렇게 말한 당연명이 좌중의 모두를 한 차례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이 순간부터, 내가 당가의 소가주다."
"!!!"
• • •
경악이 물결처럼 번져 나간다.
스스로 가문의 소가주를 자처하다니?
게다가 장로원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하는 오만한 태도...!
그러나 이미 한 수로 삼장로 당석형을 귀천시킨 무위를 드러낸 뒤다. 오만함에 걸맞은 실력을 지닌 소년은 오히려 사내들의 가슴을 뛰게 할 만큼 당당한 모습이었다.
"아...!"
봉위대는 물론이고, 암왕대와 독왕대의 무사들은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실로 엄청난 패기다. 수백의 인원을 앞에 두고도 오히려 기세에서 압도한다. 마치 장판파에서 홀로 조조군을 상대했다는 장비 익덕을 보는 듯했다.
지금도 이만큼 출중한 기량을 보이는 소년이, 장차 세월이 흐르면 어떤 모습으로 자랄까.
'당연명이 소가주가 되는 것이 옳다...!'
그러한 생각이 각 무력대 무사들과 가솔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일파만파 번져 나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장로 당석중이 기운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에 일시적으로 살기의 권역이 흐트러진다.
"네놈은 가문의 존장을 살해한 죄인이다. 어디서 궤변 따위로 얼렁뚱땅 소가주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냐!"
"죄인...?"
당연명은 묘하게 음을 높이며 말했다.
"대장로 당석중. 경합에 참가했던 당극린이 너의 제자라지."
"이놈이 그래도 하대를...!"
"당극린은 내 손에 죽었다. 왜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당석중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당연명은 고독전에서 단 둘만을 죽였다지 않았던가. 그리고 둘 중 하나인 당영령은 화룡호독을 지니고 있었다. 명백한 부정.
그러나 당석중은 이내 불안감을 털어냈다. 애제자였던 당극린의 실력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안다. 어떤 부정을 저질러 대사를 그르칠 녀석이 아니었다.
"극린을 왜 죽였지...?"
"놈은 태을묵검파의 간자였다."
"헛소리!!"
대장로 당석중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무슨 얘기를 하나 했더니, 당극린이 태을묵검파의 간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필시 누명을 씌우려는 것이리라.
그렇게 당석중이 다시금 말하려고 할 때였다.
"증인이 있다."
"뭐라...?"
증인이라 함은, 같은 공간에 있었음을 의미할 터다. 그러고 보니 당연명 말고 고독전에서 살아 나온 이가 또 있다고 했다. 일찍이 기권한 덕에 목숨을 건졌다고.
당연명이 그를 불렀다.
"정일."
"으, 으응."
"놈의 만행을 얘기해라."
"...그게."
당정일은 괜히 마른 침을 삼키는 척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순간이 그의 인생을 판가름할 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한쪽에선 부친인 당부윤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그가 이렇게 주목받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당정일은 그간 봐왔던 당연명을 떠올렸다. 어릴 적 호되게 당한 그때부터, 당연명은 늘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상전벽해라는 말을 사람에게 쓴다면 가장 잘 어울리는 게 당연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독전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때도, 단신으로 삼백의 사파 무인들을 쓰러뜨렸을 때도, 또 지금 이 순간도.
당연명은 늘 상상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왔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젠 알아야 했다. 당연명이 나서는 것은 언제나 만용이 아니라 자신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게 당정일은 결정을 내렸다.
"...경합 참가자 당극린은, 태을묵검파의 간자가 맞습니다. 여러 명의 참가자들이 당극린에게 당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건 경합을 위함이 아닌 본가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저를 죽이기 직전에 조롱하듯 알려주더군요. 만약 당연명이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 역시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 51화<제가(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