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제가(9)> >
당연명의 말이 떨어진 직후였다.
그의 수도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준비 동작 따위는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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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로 당석중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검신의 영역에 달았던 당연명 아닌가. 그의 입장에서야 무난한 검로를 따라 가볍게 손을 휘두르는 것뿐이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절세검객의 쾌검이 현현한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당석중의 오른팔에 금세 혈선이 그려진다.
'이런 미친!'
당석중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킨다. 설마하니 조짐도 없이 수도를 휘두를 줄이야. 팔에 내공을 둘러지기도 전에 당하고 말았다. 오늘따라 상정하지 못한 일이 유난히도 많이 발생했다. 모두 놈, 당연명과 관련된 일이다.
그러나 당석중은 알지 못했다. 설사 내공 방벽을 둘러쳤다 하더라도 당연명의 수도를 막을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을. 화경 정도의 무위에 이르게 되면 작정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의념이 모든 움직임에 배기 마련인 까닭이다.
이미 당연명이 '벤다'는 의념을 실은 순간 어쭙잖은 내공 방벽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원가 일을 꾸미려 했던 것 같은데.'
당연명이 낭패한 기색의 당석중을 보며 생각했다. 어차피 감각도 주사망역을 상시로 펼치고 있었기에 그가 무슨 일을 꾸미건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긴 했지만 굳이 당해줄 필요도 없기에 빠르게 형을 집행했다.
곧 특 하는 소리와 함께 당석중의 팔이 떨어졌다. 상완 한 가운데가 끊어졌는데, 단면은 보기 드문 명검에 잘린 듯 깔끔했다. 수도에 의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상처다.
"크윽!"
당석중은 짧은 신음과 함께 흔들리는 눈빛으로 왼손을 다급히 놀렸다. 얼핏 보기엔 잘린 오른팔을 지혈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연명은 곧 이상을 감지하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절로 독요청광기가 움직인 까닭이다.
'독?'
당석중이 무언가 수작을 부린 모양이었다. 체내로 홀러들어오는 독기가 제법이었다. 그간 독요청광기는 당이전이 만들어 낸 많은 극독과 당가십독인 화룡호독까지 먹어치우면서 제법 덩치가 커져 있었다. 웬만한 독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상당한 극독인 모양이었다.
'신기하군. 기감을 이렇게 피할 수도 있나.'
당연명은 눈을 빛냈다. 미세한 분독(粉毒: 가루독)마저 감지해낼 수 있는 것이 감각도 주사망역이었는데, 당석중은 묘한 수법으로 주사망역을 피해 당연명에게 독을 뿌리고 있었다.
일단 독을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당석중이 하는 짓거리가 속속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지금 지혈하는 척하며 약지와 소지로 어떤 액체를 찍어낸 뒤 내공으로 증발시켜 그걸 당연명에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흡입하도록.
"같잖은 짓을 하는군. 대장로."
당연명의 말에 숨을 멈추고 있던 당석중이 살짝 헛숨을 들이켜며 기겁했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눈빛이 흔들린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무형독을 알아차린 것일까? 어떻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무형독은 원래 용독의 은밀함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독이다. 기감이 극히 뛰어난 고수들이라 할지라도 중독 되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독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은 체내에 독기가 스몄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당연명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 상황이어야 할진대 어찌 멀쩡할 것일까. 그의 무형독은 거의 완성 직전인지라 거의 당가십독에 비견되는 위력일 터인데...!
그러나 당연명은 당석중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마땅한 응징만을 가할 뿐이다.
품에서 수리검을 꺼내 휘두른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순식간에 수리검 끝에서 삼 척(90cm)쯤 되는 진녹색 검기가 치솟는다.
서걱!
역시나 쾌속한 검격이 휘둘러졌다. 당석중의 왼팔이 거질게 날아갔고, 그 절단면에서는 이내 푸확 하고 피가 솟구친다.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했다.
스스로 소가주가 되겠다 선언한 당연명이 당극린이 간자였음을 폭로하고 형벌 운운하더니 대장로의 한쪽 팔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팔마저 날아간 것이다. 가문의 최상층부에서 권세를 누리 던 인물이 너무도 허망하게 무력화 됐다.
검을 주로 익힌 사장로 당지룡의 경우에는 다른 이들보다 월씬 놀란 눈지였다. 당연명이 수리검을 휘두를 때 무언가 보기라도 한 것일까.
한편.
거질게 날아간 당석중의 팔은 모두가 보기 좋은 곳에 철퍼덕 떨어졌는데, 직후에 시커멓게 변색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공으로 보호되던 살갗에 무형독이 스며들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저거...!"
"독이 다. 그것도 극독이야!"
"설마 대장로께서 암수를 준비하다 들통 나신 걸까. 그 상황에서?"
"어째 순순히 인정한다 했더니...."
。추태가 따로 없다. 내가 다 부끄럽군...."
참담한 어조로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건 누가 봐도 대장로 당석중의 잘못이다. 지혈하는 척 하며 암습을 하려 하다니.... 아무리 독과 암기를 쓰는 가문이라 한들 그들은 정도를 걷는 무가다. 이건 비겁해도 너무 비겁한 행위였다.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친다.
"목숨은 살려주려 했는데, 무공을 폐하지도 않을 셈이었고."
다행으로 여기란 말을 귓등으로 들었군一 그렇게 말하며 당연명이 수리검을 들어 양 팔이 잘린 충격으로 비틀거리는 당석중을 겨눈다. 그는 더 이상 지혈할 팔조차 남지 않아 출혈로 안색이 빠르게 헬쑥해져가고 있었다.
"가주에 대한 모반은 참형으로 다스린다 했었지. 지금 본가는 가주가 부재하니, 소가주인 내가 가주를 대리한다 볼 수 있을 것인즉."
"아아... 소가주. 제발...!"
"구태여 말할 필요 없다. 그저 선고일 뿐이니."
파리한 안색으로 애원하는 당석중의 말을 단호히 끊는다.
여전히 진녹색 검기가 길게 치솟아 있는 수리검을 들고서.
당연명이 힘주어 말했다.
"대장로 당석중. 모반죄로 참형에 처한다."
참형(新刑)一 목을 베어 죽인다는 뜻이다. 당연명은 그대로 수리검을 휘둘렀다.
좌아악!
망설임 없는 검격에 당석중의 머리통이 곧장 허공을 날았다.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은 채다. 잠시 간의 체공이 끝나고 머리통은 툭 땅바닥에 떨어졌다.
원래도 비틀거리던 당석중의 몸은 머리가 땅에 떨어지고 나서 뒤로 넘어갔다. 과당 넘어진 후에는 잘린 목의 단면에서 핏줄기가 솟구친다. 하나 이미 팔로 새어나간 피가 많은 까닭인지 세찬 것은 잠시뿐이었다.
"...!!!"
당석중의 몸에서 새어나온 피가 바닥을 둥글고 붉게 물들여 갈 때까지 한동안 적막만이 감돌았다. 잔혹한 광경으로 인한 충격이 침묵을 강제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이 믿기 힘든 부분이 컸다.
생각해 보라.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당가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오던 장로원의 다섯 기둥 중 둘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소가주를 자처하는 당연명의 명분과 무위에 잡아먹힌 것이라 봐야 했다.
"장로원은."
당연명이 말했다.
"본가 율법을 우습게 여기는 것인가?"
"...!!!"
"가보나 다름없는 당가십독을 혈육의 이득을 위해 유용하고, 마땅히 내려진 형벌에 죄를 뉘우치지는 못할망정 앙심을 품는다一 끝내는 소가주인 본인을 해하려고까지."
"그건...."
"남은 장로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은 당가의 율법 위에 있나?"
"...아니오."
대답하고서 사장로 당지룡은 흠칫 놀랐다. 절로 입에서 반공대가 나온 까닭이다.
'...분명하다. 당연명... 소가주는 엄청난 검도의 고수다. 이해할 순 없지만....'
당지룡은 어느새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은 것을 깨달았다. 데릴사위 출신이지만 원래 사천 어느 검파의 후예였던 그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명이 대장로 당석중을 향해 휘두른 검격은 그가 달고자 애써도 달을 수 없던 그런 검로를 자연스레 그려냈다.
믿기지 않는 일이긴 했다. 고작 열다섯에 불과한 당연명의 검격에서 평생 고련한 검도 고수의 흔적이 보이다니...!
하지만 당지룡은 그의 눈을 믿었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들도 믿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광대한 살기의 권역을 형성했던 것이나 삼장로 당석형의 장력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심후한 내공과 사람을 단번에 태워버릴 정도의 강력한 열양지력을 보유하고 있던 것.
또한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장로의 독에도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 어느 것 하나 범상한 게 없었다.
사장로의 대답을 들은 당연명이 말했다.
"다른 장로들은 율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리가."
"아니오. 율법 위에 있는 것은 오로지 가주 뿐."
이장로 당명신과 오장로 당명후도 황급히 대답했다. 그들의 실력이라고 해서 죽은 삼장로나 대장로와 큰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떨어지는 편이었지. 이렇게 된 이상 당연명에게 날을 세울 순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당연명은 그런 장로들을 슥 훑어보고는 입을 열었다. 모인 모두를 향해서다. 목소리에 내력이 실려 있어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경합의 마지막 과정인 고독전에서는 이렇듯 당가십독으로 인한 부정과, 간자로 인한 태을묵검파의 습격이 있었다. 사파 놈들이 왔을 때는 이미 고독전의 생존자는 본인뿐인 상황이었고, 홀로 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당연명은 말을 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사람들에게서는 그의 말을 의심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본인은 그런 곳에서 생환했고. 자격을 얻어 이제 마땅히 소가주가 되려 한다. 부정과 간자에 관계된 장로원의 인정 따위는 필요 없다. 오히려 가솔인 그대들의 인정이 필요하다면 모를까."
"...!!!"
당연명의 말에 좌중이 술렁인다. 암왕대나 독왕대, 장로원 직속의 무력대는 물론이고 집안일 따위를 하는 평범한 가솔들이 모두 그랬다. 장로들을 무참히 죽이고 명분과 무위를 앞세워 독단적으로 소가주가 되려는 줄 알았는데, 한낱 가솔인 그들의 의사를 묻다니...?
"가문의 성세가 많이 쇠락했다. 사천은 지금 사도천하라 해도 좋을 만큼 정도 무문의 씨가 마른 상황이고, 이제껏 스러진 다른 방파나 가문들처럼 본가 역시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위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당연명은 계속해서 말했다.
"본인이 소가주로서 약속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그대들이 안심하고 이 사천 땅에서 살아갈 수 있고, 또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걸 내 소명으로 여기겠다."
어떤가. 그대들은. 날 소가주로 인정하겠는가一
당연명의 말이 아스라이 멎었을 때였다.
문득 구름이 드리우더니 짙은 그늘이 깔린다.
그 아래에서.
암왕전에 모여들었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하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봉위대는 물론이고 당적휘를 비롯한 암왕대와, 당지혁을 비롯한 독왕대. 심지어는 장로원 직속의 무력대까지.
시비나 짐꾼 노릇을 하는 가솔들도 예외는 없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서 있던 장로 셋도 눈치를 보더니 거의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서 있는 신형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마침내.
사천당가에 새로운 소가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드리웠던 구름은 서서히 걷히고, 투명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 53화<제가(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