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방비> >
"..그게 무슨 소리죠?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연명이가 소가주가 되었다구요? 귀환하자마자 대장로와 삼장로의 목을 날리고서."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아가씨."
미부인의 떨떠름한 물음에 그녀의 오래된 노복, 장춘삼이 감개가 무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부인이 독봉으로 불리기 전부터 그녀를 모셨던 충성스러운 노복은 당지혜가 혼인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입에 익은 호칭을 버리지 못했다.
장춘삼은 마침 일이 있어 암왕전 인근을 지나다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하고 곧장 이리로 달려온 길이었다.
"아주 헌앙하게 자라셨습니다. 젊을 적의 아가씨를 꼭 빼다 박았더군요.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송옥과 반안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휜한 용모를 지녔는데, 귀천하신 부군을 생각하면 당연할... 흐흠. 이 늙은 것이 신명이 나서 주책을 떨었군요. 아무튼 추상같은 기세로 장로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벌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이 장춘삼의 묵은 체증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습지요...!"
"어떻게... 아니, 그보다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
당지혜는 경악과 안도가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작게 흐느꼈다.
태연하게 보내긴 했지만 아들에 대한 신뢰와 별개로 염려가 없을 수가 없었다. 소가주 경합에 참가한 가문 요직 인사들의 혈육이나 제자들이 쟁쟁한 상대임을 익히 아는 까닭이었다. 최후에는 그들과 생존을 놓고 다투기까지 해야 했으니. 어미된 이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매일 같이 맑은 물을 떠다 놓고 천지신명께 아들의 생환을 기원 드린 것도 꽤 오래된 일이었다.
언감생심 경합의 우승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다친 곳 없이, 몸 성히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경합에 우승했단다.
소가주란다.
혈육과 제자를 잃은 장로들이 생트집을 잡았지만, 도리어 그들의 부정을 밝혀 명분과 무력으로 짓누르고 스스로 존귀한 자리를 거머쥐었단다.
놀라우면서도 대견했고, 벅찬 가운데 씁스레했다. 어미로서 도움이 되어야 했는데. 아니, 지금부터라도...!
독봉의 눈빛이 묘하게 번뜩였다. 모종의 결심을 한 듯.
"장 노. 번거롭겠지만 처음부터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 암독전에 장로들이 당도했을 때부터."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아가씨. 얼마든지 해드립죠. 가설라무네, 그러니까 삼장로 당석형. 그 작자가 크게 노성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벽을 타넘고는 독왕대주에게...."
당지혜는 질리지도 않는지 소가주가 된 아들의 행적을 몇 번이고 듣고, 또 들었다.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노복의 목소리가 쉬어 갈라질 때까지.
****
__어머니가 놀라시겠군.'
당연명은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는 와중에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소식이 전해졌을 지도一
가문에서도 외진 곳에 기거하는 모친은 소식이 늦을 수밖에 없다. 왕래하는 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나마 바깥 소식을 전해주곤 하던 당적휘는 암독전에 있었으니.
가급적 빨리 모친을 뵈러 가고 싶었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소가주가 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닌 까닭이다.
그의 손에 가문을 좌지우지하던 장로원의 장로 둘이 죽었다. 당장 지휘 체계에 공백이 생겼다는 얘기다. 또한 가문의 요직에 앉은 이들을 그대로 놔둘 수도 없었다. 그들 역시 장로원의 입김이 달던 이들 아닌가. 괜히 후환이 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겠지.'
생각해둔 인사가 있었다.
당연명은 가장 먼저 장로원에서 휘두르던 가문의 실권을 암독전으로 곧장 가져왔다. 앞으로는 주요 사안을 결정할 때 장로원이 아닌 소가주의 재가가 있어야 하도록.
남은 장로들의 반발은 없었다. 이장로 당명신이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장로 당지룡은 이상할 정도로 순종적이었고.
오장로 당명후만이 약간의 우려를 표했다. 소가주의 나이가 어리니 일정 기간, 장성할 때까지만이라도 대리청정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오장로의 말에 일리가 있다."
그 속셈을 모르지 않았지만 당연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소가주인 그가 직접 가문을 다스리기엔 연륜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아닌가一
그걸 벌충해줄 누군가를 세우면 되는 일이었다. 당명후는 당연히 그것이 그들 장로원일 거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어쨌거나 당연명이 순순히 인정하자, 당명후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물러났고 덕분에 장로원에서 암독전으로의 권한 이양이 부드럽게 합의됐다. 와중에 삼장로 당석형의 당가십독 밀반출이 사실로 드러났다. 화룡호독이 상당량 줄었다고. 당가십독의 관리 역시 가주전인 암독전에서 맡기로 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권한을 상실한 장로원에게 남은 유의미한 힘은 각 장로들이 공들여 키운 직속 무력대뿐이었다. 준령대, 건정대, 파롱대, 독검대, 암량대.
당가는 무가다.
그 말인즉슨, 가문에서의 지위나 발언권이 일신상의 무위나 따르는 세력의 무력으로 결정지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었다. 장로들 역시 다른 것은 몰라도 직속 무력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이대로 직속 무력대마저 빼앗긴다면 그들은 정말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 테니까.
하지만 당연명은 그들의 무력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지금처럼 장로들이 관리하도록. 다만 직속인만큼 유지에 드는 비용은 각 장로들이 부담하는 것이 맞겠지. 부총관은 저들에게 배정된 예산이 있다면 없애라."
머릿수만 일백이 넘어가는 무력대는 그 자체로 돈을 끝도 없이 잡아먹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단순히 입을 것, 먹을 것만 헤아려도 소모되는 물자가 엄청난 까닭이다.
뿐인가? 기본적인 봉급이 지급되지 않는다면 충성심 또한 옅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지였다. 다달이 은자 몇 냥씩만 챙겨줘도 수백 냥이 일시에 빠져나간다.
그간 꽤나 재물을 착복해왔던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결국 대장로와 삼장로의 직속이던 준령대, 파룡대는 장로들이 맡으려 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암독전 소속이 되었다.
당연명은 두 개 무력대를 합쳐 호원대(護院隊)라 하고 파롱대주였던 당계중을 대주로 삼아 외원을 호위케했다. 한때 실세 중의 실세 였던 그들이 번(備)을 정해 근무를 서는 수문 위사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봉급마저 기존 외원 무사들과 동일하게 책정됐다.
자신들이 지닌 무력 수준으로 이런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 생각지는 못했는지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계중을 비롯한 호원대 무사들에게 당연명이 말했다.
"그동안 받았던 과분한 대우는 잊어라. 지닌 실력을 과신하지도 말고. 그 정도 무력은 내게 있으나마나다. 당장 내치지는 않겠다만,
그만한 쓸모를 보여야 할 것이다. 만약 수련을 핑계로 맡은 소임을 등한시한다면 엄벌에 처하겠다. 외원 무사와 갈등을 일으켜도 마찬가지고."
단단히 주의를 주고서는 바로 외원으로 배치시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당연명에게 그들은 유의미한 전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장로원 직속 무력대를 구성하는 인원들이 예전 마광천과의 혈전에서 살아남은 이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전면에 나서지 않은 덕분이었다.
가주를 비롯한 가문의 실력자들은 최선두에서 마광천 고수들과 싸웠고, 대부분 공멸하고 말았다. 가전 무공의 핵심요결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호원대 무사들의 실력이 정말로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신임 소가주의 눈높이가 아득히 높았을 뿐.
사실 그만한 실력을 지닌 이들을 고작 외원 무사로 써먹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무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당연명은 기꺼이 그리 했다. 그 자신이 가문의 전력 대부분을 상회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화경에 이른 무인은 같은 화경의 무인이 아니면 대적할 수 없는 결전 병기나 마찬가지였다. 가문에서는 아직 소가주가 화경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었지만.
__그러니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게 옳아.'
가문의 방비에 생각이 미친 당연명은 다음으로 제갈가 인물들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소가주."
무량전주 제갈창신을 비롯한 진법 고수 일곱이 대번에 대령했다. 말투부터 아주 깍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제 당연명의 무게감이 완전히 달라진 까닭이다. 명분과 무력으로 장로원을 해체하다시피 하고 가솔들의 인정을 받아 단숨에 정식 소가주로 올라섰다. 그 권위가 가주에 비견될 수밖에 없다.
'당가에 잠룡이 나타났다...!'
지은 죄가 있는 지라 제갈창신은 마냥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주 가까이에서 당연명의 손속을 목격했다. 가문의 존장을 상대로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살수를 펼쳐내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그 냉혹한 손속이 혹시라도 제갈가를 향할까 두려웠다.
다만 제갈창신이 믿고 있는 것은 당가와 제갈가가 소원해지는 일은 없을 거라던 당연명의 약조였다.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
"듣자하니 귀가는 몇 겹의 진법들로 방비를 강화했다지? 허가받지 못한 불청객들은 길을 잃고 떠돌다 고혼이 되어버리고 만다던데."
널리 알려진 얘기였다.
마광천의 세력이 점차로 확장하고 있는 호북에서 어렵게나마 제갈가가 버티고 있는 것은 술법의 영역에 달은 진법 비기들 덕분이라고. 감각을 교란하고 사람의 심혼에 타격을 주는 진법들이 몇 겹으로 깔려 있다고 했다.
다만 그 진법 비기들을 유지하는 데는 물자가 적잖게 소모되는 터라, 가세가 기운 제갈가는 당가의 지원 없이는 가문을 수호하는 진법을 유지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예. 과대평가된 면이 없잖아 있긴 합니다만. 본가의 방비에 진법들이 큰 축을 맡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진법. 이곳에도 설치해주었으면 하는데. 사파 잡놈들이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당연명의 말에 제갈창신이 난색을 표했다.
"소가주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본가의 진법 비기는 우선 가주의 재가가 있어야 설치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설치하는 데만 몇 가지 귀물이 필요하고, 그건 본가에서도 가보로 내려오는 것들인지라... 아마 가주께서도 내어주시지는 않을 겁니다. 또 진법을 상시로 발동 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진법에 조예가 있는 인원도 여릿 필요한데, 본가에는 그만한 여력이...."
"본가의 율법을 들었겠지."
"...예?"
"가문을 전복시키려는 모략을 획책한 경우에는 참형."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 제갈 모는 도대체가...."
제갈창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피비 빗.
커억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창신을 제외한 여섯이 모두 쓰러졌다. 순식간에 살갗이 거무죽죽해지더니 숨이 끊긴다. 당연명이 섬전처럼 우모침 여섯 개를 흩뿌린 것이었다. 거기엔 대장로 당석중이 썼던 완성 직전의 무형독이 소량 발려 있었다.
가볍게 손을 내젓자 거짓말처럼 우모침들이 스르륵 시신에서 뽑혀 나오더니 당연명의 손으로 빨려 들어간다. 암기회수 무학 연기륜 이었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에 경악하는 제갈창신에게 당연명이 말했다.
"고독전. 당영령. 태을묵검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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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는 없다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하지만 내가 알고 있지. 그걸로 충분해."
당가의 새로운 소가주가 나직이 말한다. 제갈창신은 소름이 확 끼치는 것을 느꼈다. 설마했는데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경합에 제갈가가 개입한 사실을 당가의 차기 가주가 알고 있다...!
"봐서 알겠지만 본인은 자비가 많지 않다. 귀가가 지닌 재주가 아니었다면 공동산에서 모조리 목을 베었을 거다. 참, 경합 검증 때도 얕은 수작을 부리더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긴 말 않지. 귀가에 설치된 것에 준하는 진법 비기들을 본가 내원에도 깔아두도록. 그것으로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주지. 양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일도 없을 거야."
물론 거기에 들어가는 제반 비용과 인력은 모두 귀가에서 부담해야 하겠지一 그렇게 덧붙이는 당연명의 말에 제갈창신은 눈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아마 여기서 입을 여는 순간 그 또한 시체가 되고 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럼 빠르게 추진하리라 믿지."
당연명의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에 제갈창신은 혼이 빠진 것만 같은 얼굴로 힘없이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54화<방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