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약왕당주(1)> >
'연배는 어리지만 과단성이 있고, 명분을 중시하지만 거기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총관부에서 일하는 당규현은 한바탕 난리가 끝난 후 자연스레 소가주가 된 당연명을 그렇게 판단했다.
당연명이 장로들을 벌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일들을 듣고 나니 딸아이一 당유리가 경합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장로의 제자가 간자였던 것이나 태을묵검파가 급습한 것은 그렇다 쳐도, 삼장로가 외손녀에게 화룡호독을 쥐여준 것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소가주 자리가 달려 있다 해도 고작 약관도 되지 않은 아이들의 경쟁에 당가십독을 동원하다니...!
만약 딸아이가 고독전에 진출했다면 화룡호독에 당해 끔찍하게 죽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은 간자 당극린에게 무참히 살해당했거나.
'그런데 소가주는 어떻게 멀쩡했던 거지?'
생각해 보니 의문이었다. 당연명이 단숨에 장로들을 몰아쳤기에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은 없었다. 당영령이 화룡호독을 제때 쓰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게 상념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총관부 동료였다.
"규현. 부총관께서 찾으시네."
"...나를?"
"얼른 가보게. 급한 일 같던데."
동료의 재촉에 당규현은 부총관 당부윤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일까. 그간 당규현은 총관부에서도 한직으로만 나돌았다.
능력과는 별개로 인맥 중심의 인사가 주로 이루어졌던 까닭이다.
다른 동료들이 굵건 가늘건 장로원과 어떤 연줄이 있었던 것에 비해, 당규현은 누구와도 접점이 없었다. 천성이 그랬다. 가문 내부의 알력이나 장로들끼리의 권력 다툼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총관부의 일이 좋았고, 가문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비록 하는 일은 잡무에 가까울지언정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해왔다.
어린 당유리는 그런 부친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편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부친은 총관부의 그 누구보다 능력이 출중했는데, 단지 장로원에 달는 인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직을 전전하며 능력을 허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결단을 내려 소가주 경합에 참가했다. 그녀 스스로 부친의 뒷배가 되고자 한 것이다. 무공에는 나름대로 자질이 있었기에 경합에 참가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쟁쟁한 참가자들을 모두 제치고 소가주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은 아니었다. 설령 소가주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경합 과정에서 가문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의 자제들과 교분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계산이었다.
당규현이 딸의 그런 의중을 모를 리 없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마음씀씀이가 기특하긴 했지만 마냥 달갑게 여길 수는 없었다. 어지간한 연줄이 생긴다 해도 처지가 크게 나아지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당연한 얘기였다. 위쪽에서도 입맛대로 움직일 줄 아는 사람을 원할 것 아닌가.
딸이 설사 소가주 당연명과 교분을 다지고 왔다 하더라도 신세가 크게 바뀌는 일은 없으리라一 그렇게 상념을 접으며 당규현이 부총관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어서 오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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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규현은 의아한 눈초리로 부총관 당부윤을 바라봤다. 그는 꽤나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진중한 모습을 보이려 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꽤나 허둥대고 있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다 살짝 발이 걸린 듯했다.
"일단 앉지. 차는 뭘 좋아하나? 철관음? 용정?"
"아니,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말게.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까. 그저 자네와 교분을 좀 다지고 싶을 뿐일세."
"부총관께서 저와 교분이 라니요...?"
"으음... 솔직히 말하지. 곧 소가주의 명이 떨어질 걸세. 지금의 총관은 경질되겠지."
당연한 얘기였다.
소가주 당연명의 광폭한 행보는 총관부 내에서도 하루종일 떠들썩했던 주제다. 소가주에 올라서는 것과 동시에 장로원을 유명무실 하게 만들어 놓았지 않나. 심지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암독전에서 제갈가 무인들의 시체 여섯 구도 치웠다고 들었다. 무량전주 제갈창신이 헬쑥해진 낯빛으로 별다른 항의도 못했다고 하니 경합 과정에서 제갈가 측의 어떠한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 만할뿐이었다.
어쨌거나 다음 수순은 뻔했다. 이제껏 장로원의 수족으로 움직여왔던 이들을 쳐내겠지. 그리고 소가주 자신의 사람들로 채워 넣으려 할 것이다.
당규현은 눈앞의 부총관 당부윤을 바라봤다. 능력도, 출세욕도 고만고만한 인물. 특별히 뛰어난 구석도, 모난 구석도 없다. 다소 권위적이긴 하지만 상관으로선 나쁘지 않은 자였다. 아마 그는 이번 사태에도 자리를 보전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식 덕을 보는군.'
당부윤의 아들인 당정일은 소가주 당연명의 말에 따라 증인으로 나선 바가 있었다. 덕분에 태을묵검파 출신의 간자 당극린의 만행이 알려졌고, 대장로가 평정을 잃었더랬다.
그런데 총관이 경질되는 얘기를 왜 이 자리에서 꺼내는 걸까.
"...이쯤 얘기했으니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그 후임자로 지목된 것이 바로 자네일세. 소가주께서 직접 지명하셨지."
"예? 저를 말입니까? 왜…?"
"나야 모르지. 다만 경합 때 자네의 딸아이와 소가주께서 같은 조였다는 것만 아들 녀석에게 전해들었네. 아무튼, 사실 이렇게 하대하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다네. 곧 자넨 우리 총관부의 수장이 되실 몸 아닌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니까... 그리고 혹시나 이전에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당부윤이 그 뒤로 한참동안이나 뭐라 말을 이어갔지만 당규현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허.'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난다. 그리고 진정으로 자식 덕을 본 것은 당부윤이 아니라 그였다. 단숨에 총관 자리에 올라설 줄이야...!
총관이라 하면 가문의 대소사를 총괄하여 실제적으로 처리하는 막중한 자리다. 마음먹기에 따라 가문과 연관되어 있는 온갖 인물들 에게 특혜를 안겨줄 수도, 여차하면 불이익을 안겨줄 수도 있는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어지간한 신임이 없고서는 불가한 일이었다. 단순히 경합에서 같은 조였다고 해서 이런 인사를 했을 것 같진 않았다. 설마 소가주와 딸아이가 깊은 사이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차기 가주가 사위가 되는 건가...?
온갖 생각이 다 드는 당규현이었다.
'이따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들어봐야겠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대강 진정시키며 당규현은 앞으로의 일을 떠올렸다. 총관이 되면 가장 먼저 장로들의 뒷주머니로 빠져 나가는 돈들을 차단해야겠지. 그리고 죽은 대장로나 삼장로가 은닉해둔 재물 역시 찾아서 회수해야 할 터였다.
뿐만 아니라 전임 총관 또한 이런저런 방법으로 딴 주머니를 차고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정상화시키면 못해도 지금보다 삼 할은 더 가문의 사정이 좋아지지 않을까.
'그래. 어찌면 이건 가문을 부흥시킬 기회인 지도 모른다.'
문득 소가주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사도 천하가 된 사천 땅에서 안심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던가.
어린 나이에 포부가 대단했다. 총관부에서 일하면서 무공은 어느 정도 내려놨지만 그 말을 듣고 사내로서 가슴이 끓지 않았다면 거짓일 거다.
소가주 당연명에게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기에 암독전에 모인 이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무릎을 꿇고 그를 인정했겠지.
그런 사내가 자신을 총관으로 지목했다.
그래, 딸아이의 체면을 차치하고서라도, 한 번 제대로 능력을 펼쳐봐야겠다...!
결심을 내린 당규현의 눈빛은 어떤 비장함마저 어려 있었다.
****
암독전
한때 독봉이 거처로 사용했다던 건물 안에서 당연명과 질 조 인원이었던 당이전, 당유리, 당미려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당연명이 장로들을 격살하는 장면을 지근 거리에서 목도했다. 조금 전에는 분위기에 휩쓸려 무릎까지 꿇었으니 새삼 당연명이 어렵게 느껴질 만도 했다.
침묵을 깨고 당연명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유리의 부친을 본가 총관으로 임명한 참이야. 분명 성함이 당규현이었지."
"뭐? 지금 그게 정말이야?"
당유리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분명 가문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며 청탁 비슷한 얘기를 하긴 했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총관이라니?
"그래. 시기가 좋았지. 어차피 총관은 여러 장로들과 끈이 달아 있던 터라, 정리할 생각이기도 했고."
"와... 그런 걸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다니."
"연명이 너 지금 사실상 가주나 다름없는 거 아니야? 어쨌건 잘됐다. 유리야."
뜻밖의 소식에 당이전과 당미려도 자연스레 말문이 터졌다. 어느 샌가 어색했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당유리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아니. 나도 필요한 일이었어. 가문을 다스리는 것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특히나 총관부에는 확실한 내 사람을 심어둘 필요가 있었지."
"그래도. 부총관 어르신을 임명할 수도 있었잖아?"
당정일의 부친인 부총관 당부윤을 총관으로 세울 수도 있지 않았냐는 말이었다.
당연명은 말없이 웃어 보였다. 당부윤은 엄밀히 말하면 장로원 쪽의 사람이었다. 그 아들인 당정일의 공로가 있었기에 그냥 내버려 둔 것뿐이지. 부총관이 자신의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당연명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여겼기에 당유리가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조금 소란이 가라앉고 나서 당연명이 말했다.
"너희도 이제 배경을 밝혀 봐."
"우리...?"
"그래. 말했다시피 나는 믿을 수 있는, 내 사람이 필요해. 팔다리를 자른 것이나 다름없다고는 해도 장로들이 아직 셋이나 남았지. 그들의 입김이 달던 이들을 요직에 계속 앉혀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야. 가급적이면 유리처럼 너희와 관련이 있는 이들을 중용하고자 해. 뭐, 이전이는 안봐도 약왕당 쪽인 것 같은데."
당이전은 공동산에 있을 적부터 독의 제조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다. 약왕당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맞아. 조부께서 전 약왕당주셨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긴 한데."
"그 모종의 일로 경질당하셨다는?"
"미려는 아는구나. 맞아. 사실 말하기 조심스러웠던 게, 이건 연명이 너와도 관련이 있는 얘기라...."
"내가?"
당이전의 얘기에 당연명이 미간을 좁히며 의문을 표했다. 전 약왕당주라는 당이전의 조부와 그가 관련이 있을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잠시 망설이던 당이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네 부친이랑 관련이 있다고 해야겠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네 부친은 독살당했어. 거기엔 약왕당이 관여했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 55화<약왕당주(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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