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약왕당주(3)> >
당이전의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어찌 보면 밝히는 것만으로 가문과 약왕당을 뒤집어 엎을 만한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경합에 참가하기 전의 그는 고작해야 열 살을 조금 넘은 아이였을 뿐이다.
말에 신빙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당장 약왕당 내에서도 적아를 구분할 수 없었으니 진실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을 터다.
경합에 참가하고서도 마찬가지다. 암왕대나 독왕대는 물론이고 봉위대도 믿을 수 없었겠지. 그들 중 누가 약왕당과 관련이 있을 줄 모르니까.
하지만 새롭게 소가주가 된 당연명一 독봉의 아들이자 약왕당주 당일에 의해 부친을 잃은 그라면 신뢰할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이렇게 얘기를 털어놓게 된 것이다.
잠깐의 침묵 후 당연명이 입을 열었다.
"이전.”
"응?"
"네 조부가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약왕당주 당일과 그 끄나풀들을 모조리 죽여도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뭐...?"
당이전이 놀라 되물었다. 약왕당 사람들을 죽이겠다 말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원한이나 후환을 섣부르게 처리하지 않는 당연명의 성정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설마 조부님을 치료할 수 있단 말야? 무슨 독에 당한 건지 알고..?"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직접 살펴 봐야 알겠지만. 정말 독에 당한 것일 뿐이라면 손을 쓸 여지가 남아있을 수도 있어."
"...조부님은 뇌성단독(腦性短毒)에 당하셨어. 머리에 영향을 끼치는 뇌독(腦毒)의 일종인데, 아는지 모르겠지만 뇌독류 독들은 독기가 약한 대신 온몸 구석구석에 아주 미세하게 퍼져. 특히 뇌성단독은 뇌수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해약조차 듣지 않기에 무조건 중독 초기에 처지를 해야 해."
묻지도 않은 설명을 이어가는 당이전의 말에는 불신과 단념이 묻어나왔다. 아무리 당연명이라 해도 조부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라 여기는듯했다.
본래 뇌독은 취급하는 문파가 많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독문은 대개 독의 살상력을 중시했으니까.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을 말려 죽이거나 백치로 만드는 뇌독은 용법만 까다로운 게 아니라 제조에 들어가는 수고로움도 상당했다.
그나마 북경 황실이나 정계 인사들에게서 수요가 있는 편이었는데, 그조차도 뇌독의 독기가 워낙 미약한 지라 건강에 이상이 없는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당가 내에서도 뇌독을 다루는 것은 약왕당이 유일했다. 한때 사천성 형옥을 총괄하는 제형안찰사사의 수장인 안찰사가 원인 모를 치매 증세로 약왕당주를 부른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안찰사가 뇌독에 중독된 것이라는 것을 당시 약왕당주가 밝혀낸 것이 발단이 되어 뇌독에 대한 연구가 지금껏 이어져왔던 것이다.
그리고 약왕당주 당일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뇌성단독이었는데, 뇌독 특유의 미약한 독기 때문에 조기에 감지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지를 흐려지게 하는 독효가 있었기에 주변 인물이 이상함을 느끼고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뇌수에 독기가 스며들 때까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당이전의 조부는 이미 십 년도 전에 뇌성단독에 중독된 마당이었으니, 뇌수가 단순히 독기에 침습당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절여졌다 봐도 무방했다.
그런 조부를 치료한다? 완전히 어불성설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명이 말했다.
"네가 만든 극독을 내가 멀쩡히 복용했던 거 기억하지? 단장열지독 같은 것들 말야."
"...기억하는데. 이건 다른 얘기잖아. 해독에 관한 거니까."
당이전은 착각하고 있었다. 당연명이 단장열지독과 같은 극독을 먹어치우고서도 무탈했던 것이 독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서였다고 말이다.
대성에 이른 독요청광기의 공능一 독기를 먹어치워 그걸 진기화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하는 말이었다.
당연명은 굳이 더 얘기하지 않고 살짝 스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네 조부가 완치된다면 약왕당은 지워버려도 될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당장 일손이 모자랄 수는 있겠지만.... 약학에 두각을 보이는 자들을 어느 정도만 충원해주면 몇 달 안에 지금 약왕당이 하는 일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내 수준도 당일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잘 가르쳐 볼게."
놀라운 얘기였다. 약왕당주라 하면 당가 내에서 독은 몰라도 약학을 비롯한 의술에 대해서만큼은 최고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제 고작 열다섯 정도인 당이전이 그런 약왕당주와 비해서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지녔다고 자평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그럼 됐어."
당연명은 크게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이전의 실력은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약이 아니라 독을 조제하는 광경을 본 게 대부분이었지만, 약재나 독초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공동산에서도 여러 가지 극독을 금세 만들어냈던 당이전이다. 약학에도 웬만큼 조예가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약왕당주 당일이 그의 스승이었으니 누구보다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겠지.
"얘기가 길어졌네."
"정말."
당연명의 말에 당유리가 살짝 놀란 눈초리로 말했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불그스름하다.
"미려에 대한 건... 약왕당 일이 끝난 후 듣기로 하자."
"그래."
"이전이 넌 약왕당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을 거면 나와 같이 가고."
"...그래도 돼? 모친과 간만의 해후잖아. 괜히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안될 건 없지. 한두 해 함께한 사이도 아니고. 어머니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친구를 데려간 적은 한 번도 없거든."
당연명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당이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묘했다. 물론 조부의 안위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가 간다고 해서 당장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약왕당주 당일의 감시에 놓이게 되겠지. 차라리 소가주가 된 당연명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럼, 이만 자리를 파하도록 하자."
당연명은 일어나면서 말했다.
일이 많았던 하루였다.
아직 할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진 않았지만 급한 일은 대강 정리됐고, 또 앞으로 할 일도 대강 정해졌으니 이제 모친을 뵈러 갈 참이었다.
'어머니.'
삼 년 전 가문을 떠났던 작은 소년이, 모친의 뒤를 이어 소가주의 자리에 올랐다.
소가주 독봉이 쓰던 방을 나서며 소가주 당연명이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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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당위룡의 아들이라는 건가."
의외라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문사풍 차림의 중년 사내.
그는 바로 현 약왕당주 당일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적인 진료와 처방, 독과 약에 대한 연구를 하던 그가 조금 전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었던 것이다.
장로원에서도 실세로 통하던 삼장로 당석형과, 대장로 당석중이 죽었단다. 새로운 소가주에 의해 가문의 율법대로.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건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당일은 조만간 당가를 떠나 새롭게 일문을 일굴 생각이었으니까. 약왕당을 이끌고 흑사련 휘하의 새로운 의가(醫家)를 만들 셈이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에게서 상승의 무학 한 자락이라도 전수받은 다음에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하면 단번에 사천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을 꾸릴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그 새로운 소가주가 바로 당연명이라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독봉의 아들이라 칭하지만, 당일에게는 조금 달랐다.
'당위룡의 아들一'
이젠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희미한 옛날, 당위룡과 시비가 붙어 그를 독살했던 까닭이다.
그럴 일은 극히 드물겠지만 만약 이 일이 알려진다면 소가주가 된 당연명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슬슬 처리해야겠어.'
당일의 눈빛이 매섭게 번득였다. 당시의 일을 아는 것은 약왕당 소속의 인원들과 전 약왕당주인 당호열 뿐이었다. 약왕당의 수하들 이야 함께 일을 저지른 공범이나 다름없었기에 입단속만 시켜두면 될 일이었지만, 그의 스승인 당호열은 달랐다.
당호열은 무슨 숨겨놓은 아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위룡을 극진히 아꼈더랬다. 지금이야 뇌성단독에 중독되어 달포에 한 번도 겨우 정신을 차리는 마당이었지만, 혹시라도 당위룡의 아들이 소가주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내단의 독성을 완벽히 제거하지 못하는 게 아깝긴 하지만....'
만년화리의 내단一 당일이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마광천과의 혈전 때였다. 독봉 당지혜를 내놓으라는 미친 마인들의 습격으로 세가라 불릴 정도로 번성했던 가문의 전력이 단숨에 깎여나갔다.
무력 자체도 대단했지만 마광천 마인들에게는 어떤 광기 같은 것이 있었다. 실력이 모자라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동귀어진을 택하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가문의 고수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갔다.
이대로 멸문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위기 상황一 그때 약왕당주였던 당호열이 무심코 말을 꺼냈었다. 가주께 만년화리의 내단을 진상해야겠다고. 직접 암독전에 찾아가기까지 했었다.
당일은 경악했다. 만년화리의 내단이라니! 그런 귀물이 실존했단 말인가?
그러나 가주는 내단을 복용하길 한사코 거절했다. 그의 재능으로 만년화리의 내단을 섭취해봤자 커다란 성취를 얻기는 힘들 거라면서. 후대를 위해 아껴두는 것이 올다고 했다.
그리고 직후 마광천과의 전투 와중에 가주는 죽어버렸다.
어찌어찌 싸움이 마무리되고, 소가주였던 독봉 당지혜를 몰아내고 새롭게 실권을 장악한 장로원에서는 만년화리 내단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당호열 역시 그에게 당부했다. 내단의 존재가 알려지면 크게 피바람이 불 수 있으니 필히 함구하라고.
그때부터 당일은 모종의 계략을 꾸몄다. 어떻게든 약왕당주의 자리에 올라 만년화리의 내단을 섭취할 생각이었다.
원래 무공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무학에 대한 자질이 일천했던 까닭에 약왕당에 들어온 것이었다. 의외로 약학에는 재능이 있어 약왕당주 당호열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되었지만, 당일은 만족하지 못했다. 일신에 커다란 무력을 쌓고 무림의 강자로 행세하고 싶었다.
그런데 만년화리의 내단에 대해 알게 되자 잊고 있던 꿈이 욕심이 되어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다 독봉의 남편인 당위룡과 시비가 붙은 일이 화근이 됐다.
'실망이다. 네놈에겐 약왕당을 맡길 수 없겠구나.'
약왕당주 당호열의 말에 당일은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
만년화리의 내단이 손에 잡힐 듯하다가 완전히 멀어진 느낌이었다. 하루를 꼬박 새우며 고심하던 그는 결단을 내렸다. 방해되는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기로.
약왕당주이자 스승이었던 당호열을 무력화시키는 게 먼저였다. 뇌성단독을 이용해 이지를 흐리게 만들고 당호열의 심복이랄 수 있는 약왕당 인물들을 극독에 중독시켜 죽여버렸다. 사형이나 다름없던 부당주 역시 마찬가지.
큰 망신을 안겨주었던 당위룡 역시 비밀스레 독살해버렸다. 그 일로 독봉이 크게 상심했는데, 장로원에서 기꺼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약왕당에서 일어난 일을 내부 권력다툼으로 규정짓고 당일을 새로운 약왕당주로 인정한 것이다.
당일은 마지막으로 부당주의 아들이자 당호열의 손주인 당이전, 그 핏덩이도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스승인 당호열은 이제 잃을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코자 했다.
만년화리의 내단, 그 귀물의 독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방도를 알고 있는 것은 당호열 뿐이었으므로.
그러나 이젠 너무 위험하다.
당위룡의 아들이 소가주가 되었으니, 몸을 사리는 게 올다.
분명 당이전 역시 경합에서 돌아왔다고 했었지. 본당에 제 할애비의 얼굴을 보러 오면, 그때 조손을 나란히 황천으로 보내주마一 그렇게 생각하는 당일의 얼굴에 진득한 살의가 묻어나왔다.
< 57화<약왕당주(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