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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58화 (58/134)

< 58화<약왕당주(4)> >

날이 밝았다.

대문까지 나온 미부인이 말했다.

"조심하렴."

"예. 어머니."

"이전이, 너도. 만나서 반가웠단다. 앞으로도 연명이를 부탁할게."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신세를 졌습니다."

당이전이 정중하게 인사하며 생각했다. 과연 독봉이시구나. 아침햇살 아래 그 미모가 더욱 선명했다.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독봉 당지혜는 아름다웠다. 오히려 세월로 인한 원숙함이 더해져 고풍스러운 기품 같은 것이 몸짓이나 말투에 절로 묻어나왔다. 왕부의 공주 출신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연명은 그런 당지혜를 보며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나이가 드셨어.'

가문을 떠나 경합에 참가한 세월이 삼 년이 넘는다. 그 사이에 모친은 눈가나 입매에 맺히는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고, 목소리도 미세하게 달라졌다. 몇 가닥이지만 희어진 머리칼도 언뜻 보인다. 아들에 대한 심려가 작지 않았던 탓일까.

마음이 좋지 않다.

당연명은 모친의 애정과 온기를 오래도록 느끼고 싶었다. 요절한 부친과는 다르게 주어진 젊음과 천수를 온전히 누렸으면 했다. 아니, 그 이상으로 누리시길 바랐다.

"수행하겠습니다. 소가주."

상념을 깨며 다가오는 인물이 있었다. 봉위대 당원진. 그는 당지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소가주의 모친이자 전 주인에 대한 예를 표한 것이다.

전날. 해후를 나눈 것은 당연명 모자뿐이 아니었다.

'...지켜드리지 못해 송구했습니다.'

'봉위대 잘못은 아니잖아요? 괜찮으니 모두 고개를 드세요. 그리운 얼굴들이 많은데, 제대로 볼 수가 없네요.'

'...아가씨.'

__장 노도 그렇고 여전히 다들 그렇게 부르네요. 이제 제가 아가씨라 불리기엔 조금 늙지 않았나요? 후후. 이렇게 장성한 아들도 있는데.'

옛 주인과 재회한 봉위대, 그리고 독봉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어떤 소회를 느끼는 듯했다. 대를 이은 인연이 묘하기도 했고.

한편, 당지혜는 어떻게 당연명이 경합에서 승리하여 소가주가 될 수 있었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경합에서 죽음을 맞이한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 중 몇의 목숨은 아들인 당연명의 손에 끊어졌을 테니까. 나름의 배려였다. 나중에 봉위대 무사들에게 물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고.

그저 몇 년 전과는 달리 휜질해진 용모에 대해서나 물어봤을 뿐이다. 환골탈태로 한 거니. 당연명은 그저 웃으며 답했다. 당연명은 웃으며 답했다. 당연한 거 아닐까요. 누구 핏줄인데一

오늘 있었던 일이야 이미 노복 장춘삼으로부터 종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바였고.

독봉은 앞으로 가문을 이끌어가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 아들에게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고자 했다.

'이 어미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말하렴.'

'예. 조만간 부탁드릴 겁니다.'

당연명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둔 바가 있었기에.

당이전에게 들었던, 부친의 원한이 얽힌 약왕당의 일에 대해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모친의 손에 굳이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차후 알게 되겠지만, 일단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것이 올다고 생각한 당연명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곧 총관부에서 사람이 나올 겁니다."

"그래."

"세간 같은 것은 어머니 취향대로 마련하시고, 거처 역시 편하신 대로 정하세요."

"알았다. 내가 쓰던 것들이 대부분 그대로 있을 테니 크게 필요한 건 없을 것 같구나. 어서 가보렴."

이제 당연명은 소가주였으니, 그 일가 역시 가주전인 암독전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 그의 일가라 해봐야 독봉 당지혜와 노복 몇 뿐이었지만.

소가주로서의 위신도 있었고, 여러 대소사를 처리하기 위해서도, 또 호위를 위해서도 암독전에서 지내는 것이 옳다.

아무튼 그렇게 간단한 당부와 함께 당연명이 걸음을 옮겼다. 옆에는 당이전이 함께했고, 뒤로는 봉위대가 길게 줄을 지어 따랐다.

사천당가 소가주의 행차다.

목적지는 약왕당이었다.

****

약왕당 당주의 집무실.

"묘한 일이군."

정갈한 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가 금이 간 찻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꽤 오래 되긴 했지만, 이건 백자기의 장인이 오랜 세월 공을 들여 만든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새하얀 배경에 청색으로 아주 정교하게 학과 사슴이 그려진 찻잔은, 약왕당주인 그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듯해 무척 마음에 들었었다. 평범한 차를 따라 마셔도 약차처럼 느껴지곤 했다.

여느 때와 같이 오늘 아침도 입맛을 돋울 겸 가볍게 차를 따랐다. 한데 난데없이 작은 소리와 함께 잔에 쩍 실금이 생긴 것이다.

아깝기도 했지만, 이 갑작스런 일이 무언가 불길한 징조처럼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당이전 그 녀석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당일은 괜히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의외였다. 어려서부터 제 할아비라면 끔찍이 아끼는 놈 아니었던가. 무려 삼 년이 넘는 경합이 끝나고 가문으로 귀환했으니 마땅히 제 조부의 안위부터 확인할 줄 알았는데.

아랫것들을 불러 물어보니 밤새 약왕당에는 발길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째서일까. 평생 약왕당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라 이곳이 아니면 오갈 데도 없을진대.

당일의 생각이 깊어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 속에서 변수라 할 만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어제 오랜만에 과거의 일을 회상한 탓일까.

깨진 틈으로 울컥울컥 찻물을 뱉어내는 찻잔의 모습이 마지 검붉은 핏물을 토해내며 죽어가던 사형一 당이전의 아비와 겹쳐 보인다.

그때였다.

"당주!"

"...이른 아침부터 웬 소란인가."

뛰어들듯 들어오는 부당주에게 당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약학이나 의술에는 큰 재능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오로지 흑사련과의 연줄 때문에 부당주로 세워둔 참이었다. 맡은 일보다는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관심이 많은 이였다.

안 그래도 찻잔의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마당에 호들갑을 떠는 그를 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부당주의 다음 말에는 그도 놀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큰일입니다! 소가주 당연명이 봉위대를 이끌고 본당을 방문했습니다!"

****

당연명은 당이전과 함께 봉위대 무사 몇을 이끌고 약왕당에 들어섰다. 나머지 인원은 약왕당을 포위하고서 도주 등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려둔 채였다.

"소가주께서 어쩐 일로...."

"이제야 인사를 드림을 용서하십시오. 원체 본당의 업무가 바쁜 지라...."

"이럴 게 아니라 우선 당주부터 뵙는 게 어떠할는지. 제가 기별을 넣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마주친 약왕당 인물들은 당연명과 봉위대 무사들의 기세에 눌려 불안해하면서 말을 건네 왔다. 당연명은 그런 그들을 말없이 냉엄한 눈초리로 훑어 내렸다. 당이전의 말에 의하면 지금 약왕당에 있는 자들 대부분이 부친의 독살에 가담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만 아직은 징벌할 때가 아니었다. 당이전의 조부인 전 약왕당주 당호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당이전은 원래 조부와 함께 머물던 약왕당 내 거처로 당연명을 안내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조부께서 보이지 않아."

당이전의 말에 당연명은 눈치를 살피던 약왕당 인물을 손짓해 불렀다. 쭈뻣거리며 다가오는 그들에게 물었다.

"전 약왕당주를 어디로 옮겼지? 여기 당이전의 조부 말이다."

"그것이...."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당연명이 대충 눈짓하자 당원진이 앞으로 나섰다. 언제 꺼냈는지 그의 손에는 기다란 비도가 들려 있었다. 섬전처럼 팔을 휘두르자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망설이던 사내의 머리통이 허무하게 떨어져 내렸다. 툭.

"어 ?"

"..."

"지금, 무슨 짓을?"

"소가주. 제정신이십니까...!"

지켜보던 약왕당 인물들이 경악하며 말문을 터뜨렸다. 대답을 좀 망설였다고 사람을 죽이다니...?

방주의 권위가 무지막지한 사파 세력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시급한 사안이니 빨리 말하도록. 어차피 말할 입은 차고 넘치니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

• • • •

당연명의 말에 약왕당 인물이 기가 막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음으로 지목된 인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전 약왕당주 당호열은 지금 지하 뇌옥에 있다고.

약왕당에 뇌옥이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따금씩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알고 있는 가솔들을 격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뇌옥에까지 가두어 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차고 습기 가득한 지하 뇌옥은 병세가 악화되면 악화됐지 호전될 일은 없을 정도로 환경이 좋지 않았으니까. 쉽게 말해 그곳에 가두어 둔다는 것은 죽기를 바라며 방치해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자식들이...!"

당이전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의 조부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된 것이 누구 때문이던가. 약왕당주 당일이 쓴 뇌성단독 때문이었다.

멀쩡하던 사람을 그리 만들어놓고 그가 경합에 간 동안 뇌옥에 가두어두다니...? 열불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명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원진."

"예. 소가주."

"여기 놈들을 모두 죽이고 뇌옥으로 오도록."

"...존명"

곧 당원진의 손짓과 함께 봉위대 무사들이 스르륵 사라졌다.

당연명은 당이전과 함께 뇌옥 방향으로 이동했다. 등 뒤에서 봉위대 무사들이 내던진 암기들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다니는 게 기감으로 선명히 느껴진다. 극독이 발린 걸까. 단말마의 비명이나 중독되어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천천히 숨이 끊어지는 소리들이 귀에 잡혔다.

말 한 마디로 끔찍한 광경을 자아낸 소가주는,

무심한 낯빛으로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약왕당 내에 들어서자마자 그득했던 약재 냄새가 점차 옅어진다.

외곽 쪽의 뇌옥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야."

당이전이 약왕당 뇌옥 입구에서 말한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는데, 거기서 올라오는 퀴퀴한 습기가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했다.

"살아계신다. 걱정 마."

당연명은 감각도 주사망역에 걸리는 하나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뇌옥 쪽이다. 실낱같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숨결이 미약하긴 했지만 분명 생존해있었다. 필시 당이전의 조부인 전 약왕당주 당호열이겠지.

안도하는 당이전과 함께 뇌옥으로 내려갔다. 석벽에는 온갖 종류의 이끼가 자라 있었고, 통로 가운데쯤 횃불 하나만이 놓여있어 불빛이 희미했다.

내려가는 와중에 몇 개의 나무문을 지나야 했는데, 어찌나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문의 가장자리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닫는 게 썩 여의치 않은 것들은 그냥 발로 부수면서 지나쳤다.

그렇게 조금 더 내려가자 쇠창살로 막힌 칸들이 몇 개 보였다. 그중 한곳에서 흐으으으 하는 노인의 신음이 들렸다.

"할아버지...!"

당이전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쇠창살 너머에는 여러 갈래로 뻗친 수염과 마지막으로 정돈한 것이 언제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 산발을 하고 있는 노인이 족쇄에 매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 58화<약왕당주(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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