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만년화리의 내단> >
약왕당의 일은 금세 가문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소가주 당연명의 행차를 눈여겨보는 이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가시나 했는데. 이런 사달이 날 줄이야."
"약왕당이 완전히 무너졌다는군. 살아남은 이들이 드물다는데."
"사실상 몰살이야. 전 약왕당주셨던 당호열 어르신과 그 손주인 당이전, 수습 단계에 있던 몇몇 아이들만이 살아남았으니까."
"소가주의 손속이 매정하다는 것은 어제 보아서 짐작했지만....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곧 공표하시겠지. 그나저나 걱정이군."
"뭐가 말인가?"
。흑사련이 득세한 후 본가의 자금줄이 거의 메말랐지 않나. 이곳 성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동안 약왕당이 벌어들이는 재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어찌 하실 생각인지...."
가솔들은 우려 섞인 얘기를 나눴다. 약왕당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공헌해온 바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선처할 여지가 있지 않았나 하는 얘기도 나왔다.
당연명은 당호열과 당이전, 그리고 봉위대 무사 몇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암독전으로 돌아갔다. 물론 만년화리의 내단을 챙겨서.
내단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통 영약이나 영단과 같이 영성을 품고 있는 귀물들은 나름의 보관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별다른 가공을 거치지 않은 영물의 내단 같은 경우에는 특수한 처리를 거친 공간에 두어야 그 영성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했다. 만년화리의 내단은 약왕당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약재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전 약왕당주였던 당호열이 있었기에 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
'이건 원래 가주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네. 전대의 가주들은 후대를 위해 내단을 기꺼이 포기했지. 화경에 이르셨던 분들은 본인의 무위로 충분하다고, 또 경지에 이르지 못하셨던 분들은 자질이 부족하다시면서. 때때로 약왕당주를 맡은 이의 실력이 부족해 내단을 다루지 못한 시기도 있었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영물의 내단은 대개 영성과 함께 강력한 독기를 품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걸 날 것 그대로 복용했다가는 독기를 이기지 못하고 절명하기 십상이었다. 적어도 지명적인 내상을 입거나. 그래서 내단보다는 약초나 영초의 수요가 높은 편이었다. 상대적 으로 보관도 까다롭지 않았고.
또한 내단의 독기를 제거하게 되면 금세 시들어버리는 까닭에, 미리 독기를 제거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독기와 균형을 이루던 영성이 금세 대기 중으로 흩어져버린다고. 그래서 만년화리의 내단은 여전히 독기를 품은 채였다. 게다가 애매한 실력으로 독기를 제거하려 들었다가는 품고 있는 영성의 상당 부분을 소실할 우려가 있었다. 죽은 당일이 그래서 그 방도를 알고자 당호열을 살려두었던 것이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온전하게 복용하기 위해서.
'이런 일이 있었으니 나는 차라리 소가주가 내단을 취했으면 하네. 며질만 말미를 주게. 내 깔끔하게 독기를 제거해줄 터인즉.'
'아뇨. 성의는 감사하나 이대로 가져가겠습니다.'
'...당장 복용할 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보관하는 게 좋을 걸세. 영성이 흩어질 수 있으니.'
'복용할 겁 니 다.'
그렇게 얼굴 가득 의문을 띄우고 있는 당호열을 뒤로 하고 왔다. 그간 당연명이 극독을 수도 없이 먹어 치운 것을 알고 있는 당이전만이 질린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당연명은 가져온 만년화리의 내단을 꺼냈다. 불그스름한 구슬 같은 모양새였다. 표면이 울통불통한.
내단에는 묘하게 자색 빛이 감돌았는데, 독기로 인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귀한 걸 그냥 없애다니. 안 될 말이지.'
당연명은 내단을 쥐고 그 속에 독요청광기를 흘려 넣었다. 사실 그냥 복용해서 터져 나오는 독기를 제거해도 될 일이었지만,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에 일단 독기만 흡수할 생각이었다.
'먹어 치워라.'
의념이 실린 독요청광기는 주인의 명에 따라 만년화리의 내단의 독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스으으으一
구슬의 자색 빛이 빠르게 옅어지기 시작한다. 독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열독(熱毒) 이군.'
독기의 성질이 익숙했다. 이미 화룡호독을 먹어 치운 바가 있었기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용암 속에서 산다는 만년화리니까. 아마 열양공을 기반으로 한 무학을 익히지 않은 이가 내단을 복용했다면 전신 경맥이 타들어가 버렸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래도 화룡호독만큼은 아니야.'
분명 만년화리의 내단이 품고 있는 독기는 당연명이 느끼기에도 극독의 범주에 속했다. 독요청광기의 몸집이 빠르게 커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가십독의 하나인 화룡호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당연명은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용암 속에 산다는 만년화리가 품고 있는 것보다도 더 지독한 열독이라니- 전해지는 얘기처럼 정말로 화룡의 숨결을 담기라도 한 것일까.
상념과 함께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구슬에서 자색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독기가 완벽하게 제거된 것이다.
당연명이 독요청광기를 다시 회수하자, 어느새 크기가 조금 작아진 내단은 완연한 선홍색으로 빛났다. 표면은 장인이 세공한 보석마냥 매끄러워졌고.
원래도 비범하게 풍기던 영성은, 이제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 복용하면 단번에 엄청난 양의 내공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당호열이 봤다면 기겁했을 광경이었다. 설령 그라고 해도 이 정도로 완벽하게 독기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어쨌건 당연명은 약간 증대된 내공을 느끼면서, 붉은 내단을 비단이 깔린 작은 함 속에 챙겨 넣었다.
애초에 만년화리의 내단을 그가 복용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화경에 이르러 내공의 순환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당연명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내공량이 증대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굳이 영약과 영단, 영물의 내단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경지인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진기의 효율이었다. 그리고 진기의 효율 역시 세맥 자극과 환골탈태를 거치면서 극도로 뛰어난 상태였다.
그래서 당연명은 생각했더랬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얻게 되면, 차라리 모친에게 드리자고.
단순히 내공이 많아진다고 해서 단번에 경지를 뛰어넘고 환골탈태를 이룰 순 없겠지만, 적어도 반로환등을 꾀할 순 있었다. 강대한 내공은 보통 육신의 노화를 더디게 만드는데, 그것도 정도를 넘어서면 아예 어려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오래 사셔야지. 아버지의 몫까지.'
당연명은 진심으로 모친의 행복을 바랐다. 전생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모정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여인이었으니. 오래도록 함께 평범한 삶을 누리고자 했다.
'지금쯤 와 계시겠군.'
당연명은 내친 김에 바로 밖으로 나섰다. 독기를 완벽에 가깝게 없앤 덕인지 내단의 영성이 그리 쉽게 흩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미약하게 조금씩 대기 중으로 녹아드는 게 느껴졌다. 가급적 빠르게 모친께 복용시키는 것이 나을 터였다.
봉위대에 물으니 과연 예전 소가주일 적에 쓰시던 처소에 계신다는 답이 돌아왔다.
당연명은 신법까지 펼쳐가며 독봉 당지혜가 머무르는 곳으로 움직였다.
"어머니."
"연명 이구나."
당지혜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아들을 맞았다. 그녀가 소가주였던 시절- 한창 꽃다운 때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어서일까. 어쩌면 귀천한 낭군을 추억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아직 당지혜는 약왕당의 일을 모르는 듯했다.
당연명은 곧장 입을 열었다. 내단이 들어있는 함을 건네면서.
"어머니. 이걸 복용하시지요/
"이게 뭐니...?"
의아한 얼굴로 함을 받아든 당지혜가 흠칫 놀랐다. 틈새로 빠져나오는 영성이 엄청났다. 안에 소림의 대환단이 들어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딸각, 함을 열어본 당지혜는 이내 눈이 커졌다.
"...이거, 만년화리의 내단 아니니?"
"알아보시는군요."
"이전이와 함께 약왕당에 다녀온 모양이구나. 당일, 그자가 쉽게 내주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당호열 어르신이라면 모를까."
// //
당연명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약왕당에 대한 일은 모친이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하고 나서 알려도 되는 까닭이다.
"정제를 마친 겁니다. 얼른 복용하세요. 지금도 기운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고맙긴 하다만 이건 네가 복용하는 게 올다. 앞으로 가문을 이끌어야 하지 않니. 어미가 되어서 네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귀한 것을 빼앗아 먹을 수는 없단다."
"귀한 것은 맞습니다만, 지금의 제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 복용하시는 것이 합당하지요."
"뭐…?"
고개를 내젓는 당연명의 말에 독봉 당지혜가 놀라 되물었다. 도움이 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자그마치 만년화리의 내단이다.
그 안에 담긴 영성을 제대로 흡수해낸다면 막대한 내공을 얻을 수 있을진대...!
"역시 보여드리는 게 빠르겠지요."
당연명은 어차피 모친이 호락호락 납득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기에 즉시 기세를 드러내보였다.
화아아아악-!
순간적으로 당연명의 몸에서 엄청난 기파가 치솟았다. 당연명은 물론이고 당지혜의 옷자락이 파라라라락 소리를 내며 펄럭였고, 방안에 있던 집기들이 들썩일 정도였다. 대체 얼마만한 내공을 지니고 있어야 이런 광경을 보일 수 있을까.
• • •
당지혜는 예상을 아득히 벗어나는 아들의 내공 성취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경합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실력이 일취월장 했다는 말인가...!
그러나 당연명은 모친의 놀란 얼굴을 보며 살짝 겸연쩍음을 느꼈다. 사실 방금 동원한 내공은 전력의 삼 할 정도에 불과했던 까닭이다. 반응을 보니 지나지게 힘을 쓴 건가 싶기도 했다. 주위를 경계하던 봉위대 무사들이 잔뚁 긴장한 것도 기감에 느껴졌다.
"...만년설삼이라도 먹었니?"
"그냥 이런저런 기연이 있었습니다."
당연명은 적당히 둘러댄 후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이제 독봉의 아들은 적어도 동년배 중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듭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강해지셔야 제가 마음을 좀 놓지 않겠습니까."
// //
당지혜는 잠시 침묵하며 그녀의 아들을 바라봤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로 번듯하게 자랐구나- 용모는 물론이고,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씀씀이에 더해 놀라운 실력까지 겸비했다. 친아들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잘났다. 언젠가 들이게 될 며느리가 복에 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머니. 지금도 아까운 기운이 흩어집니다."
"그래."
당연명이 한 번 더 보채자 비로소 당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래, 연명이의 말이 올다. 어미가 되어서 발목을 잡아선 안 될 것이다. 더 이상 아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강해지고 또 강해지자. 사천제일미이자 독봉으로 불렸던 젊은 날- 강해지는 데 여념이 없던 그때로 돌아가자.
당지혜는 그렇게 다짐하며, 스스로 가하고 있던 금제를 풀었다.
화아악-!
당지혜의 기운이 눈 깜짝할 사이에 폭증했다.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파가 꽤나 강력했다. 당연명이 보인 것에 비하면 분명 손색이 있었지만, 상당한 수준이었다.
"어머니...?"
당연명은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친의 수준은 누구보다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화경에 이른 무인의 기감을 속이는 것은 '
거의 불가능하므로.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모친- 독봉 당지혜는 그가 감지했던 것보다 월등한 수준의 기운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화경에 이른 고수의 기감을 속이고 성취를 숨겨왔다는 얘기다. 상식 밖의 일이다.
당지혜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놀라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나."
사실 이 어미도 그리 약하지만은 않단다- 그렇게 덧붙이며 당지혜가 붉은 구슬을 단번에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 60화<만년화리의 내단>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