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무영객(1)> >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이제 막 약관이 된 암독전의 시비 정진희는 치솟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 당연명이 정진희를 호출했을 때,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감주지 못했다. 소가주께서 왜 나를...?
절세미남이라 불려도 부족함 없는 용모를 지닌 소가주가 굳이 시비를 찾는다- 그건 곧 여인이 필요한 일이란 말인데, 정진희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발칙한 상상이 떠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다르게, 당연명은 그저 평범한 일을 지시했다. 모친이 머무는 처소에서 기다리다가, 목욕 시중을 들어라. 아마 세신(洗身)이 필요할 것이니-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뼈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계속 나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아닌 게 아니라, 벌써 한 시진이 넘게 우두두두둑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진희는 몇 번이고 독봉 당지혜를 부르며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지만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살짝 떨어진 채 주변을 경계하던 봉위대 무사들이 신법까지 펼치며 다가와 정진희에게 말했다. 독봉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들어서지 말라고.
'당연한 거 아닌가. 누구 명인데.'
정진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절세의 미모와는 별개로, 소가주 당연명의 손속이 무척이나 잔혹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하겠지.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은 방 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드드드드득-
뼈가 부러지는 것보다는 어긋났던 것이 맞춰지는 소리로 들린다.
그리고 또 일 각 가량의 시간이 흐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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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낯선 침묵이 찾아왔다.
정진희는 어떤 인기척을 느끼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님. 소가주께서 보내셨습니다.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다른 사람들은?"
"봉위대 분들이 멀찍이 떨어져 계십니다."
대답하면서, 정진희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그녀가 알기로 소가주의 모친인 독봉은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아주 젊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그녀의 또래라 해도 믿을 정도.
"들어오렴. 그런데 조금... 아니, 심한 악취가 날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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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지혜의 경고에 정진희는 또 한 번 의아함을 느꼈다. 다른 이도 아닌 독봉의 처소에서 악취가 날 일이 있나...?
그러고 보니 두두둑 거리는 소리가 꽤 오래 들리긴 했다. 정진희는 무학에 조예가 없었지만 그 소리가 어떤 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난 게 아니었을까하고 조심스레 짐작했다.
땀이라도 흘리신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깥문을 열었는데....
"읍!"
정진희는 기겁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콧속으로 훅 끼쳐온 냄새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아직 당지혜가 있는 방까지는 문이 하나 더 남았는데도.
'...방안에서 용변이라도 보신 걸까.'
체면이 있으신데 그럴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점점 짙어지는 악취는 정진희로 하여금 어떠한 확신을 하게 만들었다. 똥이다...
이건 똥 냄새가 분명해...!
정진희는 마음을 굳게 먹고자 잠시 심호흡을 했다가 곧 크게 후회했다. 폐가 더럽혀지는 기분이다. 아니, 썩어 들어가는 것만 같다.
천이라도 꺼내 입과 코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소가주의 모친 앞에서 그러는 것도 예의가 아닌 지라, 정진희는 자꾸만 쩡그려지는 인상을 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마님...!"
드르륵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정진희는 굳게 각오를 다졌다. 냄새로 보아 어쩌면 방안이 온통 뚱오줌으로 범벅이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 당황하진 말아야지.
그러나 의외로 방안은 정갈했다.
한가운데에는 웬 절세미녀가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악취는 그녀로부터 홀러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입고 있던 궁장- 원래는 분홍빛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옷에서 기인하고 있었는데, 무엇으로 더럽혀진 것인지 검은색과 황토색으로 여기저기가 얼룩진 상태였다. 게다가 군데군데 옷감마저 상한 듯했다. 흡사 지독한 독에 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진희를 놀라게 한 것은 절세미녀의 나이가 기껏해야 이십대 정도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소가주 당연명과 남매지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
정진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러보았다.
"마님...?"
"고맙구나. 이리 와줘서. 일단 옷을 좀 벗겨주겠니...? 보다시피 온몸이 끈적대는 탓에 혼자서 벗기가 쉽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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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을 보니 독봉이 맞다.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제 정진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봉 당지혜가 세월을 거스르고 젊어졌다...!
****
'이게, 화경...!'
시비 정진희의 도움을 받아 목욕까지 마친 뒤 당지혜는 내부를 관조하며 감격에 빠졌다.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강대한 내공이 단전에 자리 잡고 있었고, 또 그로부터 기인한 진기가 엄청난 기세로 온몸을 휘돌고 있었다. 임독양맥이 타통된 덕분이다.
무인으로서 누구나 바라마지 않는 화경의 경지에 단숨에 올라섰다. 기연 중의 기연이라 할 만하다. 감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지혜는 반로환등까지 이뤄냈다. 동경을 보니 이십대의 미녀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바로 젊은 날의 그녀였다.
아무리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했다고 하지만 얻은 게 지나지게 많았다.
당지혜는 이게 모두 누구의 덕분인지 잘 알고 있었다.
소가주 당연명- 어느 날부터 달라진 그녀의 아들 덕이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삼장로의 외손녀였던 당영령을 비롯한 또래 셋을 단신으로 혼풀을 내주고, 경합에서는 아예 우승을 해버리고, 돌아와서는 장로들마저 무력으로 심판하며 장로원을 해체해버리다시피 하고선 스스로 소가주가 되기까지.
아들의 무위가 어느 정도기에 그러한 일이 가능한가 싶었는데....
'화경이 라니.'
당지혜는 당연명이 그녀의 등 뒤 명문혈에 손을 대고 진기를 불어넣어 깨달음을 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의념만으로 기운의 성질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랬다. 몇 번이나 보고나니 당지혜 역시 깨달음을 얻어 시도해볼 수 있었고, 천운으로 단번에 성공한 것이다. 막대하던 내단의 기운을 송두리째 내공화했고, 그 내공으로 임독양맥까지 타통...!
그런 깨달음을 줄 수 있을 정도이니 당연명 역시 화경에 올랐을 것이라 보는 게 타당했다.
솔직히 믿기 힘들긴 했다. 고작 열다섯의 나이에 화경이라니...?
기나긴 무림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곧 알게 되겠지.'
당지혜는 기감의 수준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처소 주변에 퍼져 있는 인물들의 무위가 낱낱이 파악되는 감각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또한 아직은 어색하지만, 집중하면 강기 역시 사용할 수 있었다. 비도를 들고서 연보랏빛 도강을 만들어냈다 없앴다 하면서 몇 번이고 연습을 했다. 내공 소모가 엄청났지만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한 뒤로 그보다 월씬 막대한 내공을 얻었기에 감당할 만했다.
그러길 반 시진.
곧 그녀의 기감에 숨길 수 없는 커다란 존재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
모친이 정신을 차리고 목욕까지 마쳤다는 말을 듣고 당연명이 방문했다.
"경하 드립니다. 어머니."
"다 네 덕이지. 내가 아들 하나는 정말 잘 낳았구나."
"뭘 또 새삼스럽게...."
당연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모친이 하는 말이 낯간지럽긴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그 뒤에 당지혜가 몇 가지를 물었다. 주로 약왕당의 일에 대한 것이었다. 목욕을 하면서 시비 정진희에게 들은 것이다. 아침 일찍 나선 당연명이 약왕당을 완전히 몰살하다시피 했다고.
당연명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이전과 그 조부이자 전 약왕당주였던 당호열의 얘기. 부친인 당위룡과 당호열의 인연. 부당주 당일이 부친을 독살한 정황까지.
독봉은 딱히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들었다. 그녀의 낭군이 귀천한 지도 벌써 십오 년이 흘쩍 지났다. 가솔 중 누군가가 독살 했으리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그녀는 분란을 피하기 위해 조용히 있었다. 폐맥은취를 이용해 무공 수준까지 숨기면서.
모두 아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이렇듯 장성하여 제 부친의 원한을 갚았다. 분노보다는 대견함, 후련함이 앞섰다. 원래 손속이 너무 잔혹한 것 같아 몇 마디쯤 하려고 했었는데, 당지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약왕당 잡것들은 마땅한 벌을 받은 셈이었으니.
애매하게 후환을 남기는 것보다 확실히 마무리하는 게 낫다- 당지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 역시 사천당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에.
"그런데 연명아."
"예. 어머니."
"화경에는 언제 올라선 거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단다. 네 나이가 고작 열다섯인데. 빨라도 너무 빨라. 무림사에 이런 경우는 없었을 거다. 그 달마나 장삼봉이라 해도 너처럼 성취가 빠르진 않았을 텐데."
"경합의 마지막, 고독전 때 올라섰습니다."
당연명은 무위를 숨기지 않고 바로 인정했다. 어차피 이젠 모친 역시 화경의 경지 아닌가. 그녀의 기감을 속일 순 없었다.
"잘된 일이다. 그래서 태을묵검파 놈들을 손쉽게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구나."
"예. 그런 셈이죠."
"아무튼 네 성취는 빨라도 너무 빠르구나. 걱정이 될 정도다. 자짓 사도나 마도 방파에서 네 성취를 알게 되면 무리해서라도 없애려고 들 수 있잖니. 특히 흑사련주나 마광천주와 마주하기라도 하면...."
당연명은 조용히 모친의 말을 들었다. 우려하는 부분이 이해가 된다. 사도와 마도의 입장에서는 당연명이 설사 화경에 이르렀다 해도 위험을 감수하고 제거하려 들 공산이 컸다.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더욱더 강해질 테니까. 더 큰 위협이 되기 전에 싹을 자르려 하겠지.
어쩌면 흑사련주 유길준이나 마광천주 연중혁이 나설 지도 몰랐다.
'아직 놈들과 맞붙는 건 시기상조일지도.'
당연명은 전생에 한 번 검신의 영역에 달았던 만큼, 설령 상대가 화경의 무인이라 해도 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공량과는 별개로, 그가 지닌 검술에 대한 깨달음이 지극한 까닭이다.
하지만 둘이나 셋, 혹은 그 이상의 화경 고수들의 합공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특히나 사천은 사도천하가 된 지 오래였다. 함께 흑사련을 견제할 정도 방파가 전무한 실정이니, 여러 세력들에게 둘러싸여 합공당할 여지가 있었다. 흑사련에 화경의 고수가 몇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친의 말대로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지혜가 말했다.
"그래서 이 어미는 네가 성취를 좀 숨겼으면 한다. 폐맥은취를 이용해서."
"폐 맥은취라시면...?"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할 때 보여줬었지."
"아."
"폐맥은취를 이용하면 설사 화경인 상대에게라도 성취를 들키지 않을 수 있단다. 본가의 가주나 소가주에게만 전해지는 전용 무학인셈이지."
그렇게 말하며 당지혜가 폐맥은취를 시전했다. 당연명은 살짝 놀랐다. 정말로 모친의 성취가 그저 평범한 수준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화경에 이른 무인의 기감을 속이다니...?
"본가에 왜 이런 무학이 전해지는지 궁금할 거다."
당지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가의 시조는 옛날 천하제일살수로 불렸던 무영객(無影客)이라는 분이다."
< 62화<무영객(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