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호신강기 용린> >
독봉이 입을 열었다.
"폐맥은취의 존재에 대해서는 장로들도 알고 있단다. 그리고 그들은 이 금제와도 같은 수법에 굳이 관심을 가지지 않지."
당연한 얘기였다. 어차피 성취가 높아지다 보면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 굳이 경맥과 기혈을 차단하면서까지 성취를 감출 이유가 있을까. 무영객이야 살행을 위해 그럴 필요가 있었겠지만 말이다.
모친의 얘기가 아니었다면 당연명 또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터였다. 화경에 이른 고수들의 기감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의 그에게 있어 분명 매력적인 공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필수적이라고까지 느끼지는 않았다.
모친이야 당연명이 화경의 고수와 마주했을 때를 염려하는 듯했지만 드넓은 천하에서도 화경에 이른 자는 극히 적다. 어쩌면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만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적은 화경의 고수들 중 누군가가 당가에 직접 찾아오기라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당연명이 화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쉽게 알려지지 않을 사실이리라.
더군다나 당연명은 천하를 활보한다거나 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모친과 더불어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었다. 가문의 운신 영역을 넓히기 위해 사도천하가 된 사천을 조금 정리할 필요는 느끼고 있었지만.
당지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무영객一 그분의 무학이 지금껏 전해져 오는 것에는 이유가 있단다. 아까 말했듯 그분은 상대가 화경의 고수라 할지언정 손쉽게 격살하는 무위를 지니고 계셨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만천화우 덕분 아닌가요? 버텨내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하셨으니."
"그래. 작게 보면 그렇지. 만천화우는 강기를 다루는 무학이니."
놀라운 얘기였다. 당가 암기술의 최정점이라 전해지는 만천화우가 강기 무학의 일종이었다니...!
당연명은 언젠가 공동산에서 창안했던 암기 무학을 떠올렸다. 철편표一 상대의 날붙이를 분쇄해 그 철편으로 회오리를 만들어내는 무공이다. 나름대로 만천화우를 심상에 두고 창안한 것이었는데, 또다른 암기무학 우모침우와 더불어 태을묵검파 무사들을 정리할 때 요긴하게 사용됐었다.
'강기 무학이라.'
당연명은 흥미가 동하는 것을 느꼈다. 강기 무학이란, 화경에 이른 자들만의 전유물인 강기를 이용해 구사하는 무학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극상승의 절기나 다름없었다. 입문이나, 적어도 제대로 된 효용을 발하기 위해서는 화경에 들어서야 한다는 뜻이니까.
전생의 그는 오로지 검술 하나에 심취해있었다. 강기 무학에 굳이 집착하지 않았다. 익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있어 검강은 그저 검초의 위력을 보강해주는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의 생을 통째로 바쳐 검신의 영역에 도달하여 완성된 검로를 얻은 지금은 다른 영역에 관심이 갔다. 다른 강자들은 어떤식으로 무학을 완성했을까하는 궁금증이었다.
당지혜가 말했다.
"무영객께서는 강기 무학의 달인이셨다고 하더구나. 강기 무학이라는 것은 애초에 화경의 고수를 상대하는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거란다. 때문에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지만, 후대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지."
"짐작이 갑니다."
당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화경에 오르는 것은 무척이나 지난한 일이다. 뛰어난 스승과 본인의 노력, 거기에 천운이 더해져야 했다. 당지혜의 경우처럼 만년화리의 내단에 준하는 귀물을 얻는다던가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깨달음까지 얻을 수 있는 그런 천운.
게다가 상승 무학이라는 것들이 대개 그렇듯 강기 무학 역시 핵심 요결이랄 수 있는 구결 몇 마디만이 드문드문 전해질 뿐이었다. 원래 그렇다. 상승의 무학일수록 중요시되는 것은 창안한 이의 심상一 진의(眞意)였으니까.
몇 대를 건너서 화경에 이르는 자가 나오더라도 그러한 강기 무학을 온전히 수습하기가 쉽지 않았겠지.
"때문에 실전된 무학들도 많단다. 만천화우만큼은 워낙에 압도적인 위력을 지닌 데다가 본가 암기 무학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절기이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전해지지만...."
당지혜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만천화우의 헥심요결은 전대 가주였던 그녀의 부친과 다섯 장로들이 알고 있었는데, 완전한 요결을 알고 있던 부친은 이미 십오 년도 전에 마광천과의 일전에서 귀천했고, 다섯 장로들 중 둘이 당연명의 손에 죽었다. 확인해봐야 아는 일이겠지만 장로들끼리 공유하지 않았다면 만천화우의 핵심요결은 불완전하게 남을 공산이 컸다.
"어쨌건 폐맥은취에도 숨겨진 효용이 있단다. 강기 무학으로 이어지는."
'..폐맥은취가 말인가요?”
당연명은 고개를 가웃거리며 물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경맥의 사이에 진기를 몰아넣고 폐한다一 금제나 다름없는 이 수법이 강기 무학과 달아 있다니...?
"그래. 화경에 이른 무인들의 싸움은 결국 강기와 강기의 격돌로 이어지기 마련이라더구나. 검강이니 도강이니 하는 것들을 두르고 부딪치지. 어느 한쪽이 강기를 시전하는 순간 다른 쪽도 강기를 꺼내들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당연한 얘기였다. 진기에 강력한 의념을 실어 만들어진 강기는 같은 수준의 강기가 아니면 막을 수 없었으므로. 그리고 강기의 구현에는 막대한 내공이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진기의 효율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이유기도 했다.
"호신강기(護身至M)를 아니?"
"예."
모를 리가 없다.
강기는 공격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강기를 쓰는 것이 능숙해지면 몸 전체에 두르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이걸 호신강기라 했다. 강기가 아닌 모든 공격은 호신강기 앞에 무용했다. 그야말로 전신을 물샐 틈 없이 엄호하는 갑주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강기는 시전자의 강력한 의념이 실려 있기에,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기끼리 부딪쳐 생긴 편린에라도 달는다면 어이없게도 중상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호신강기는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모친이 왜 갑자기 호신강기를 언급하는 것일까.
"의식적으로 호신강기를 펼치는 것은 그 자체로 심력의 분산을 의미한다더구나. 진정한 호신강기란 의식하지 않아도 상시로 강기가 육신을 보호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겠지."
"...어머니의 말씀은, 그게 폐맥은취로 가능하다는 말씀인가요?"
"궁극적으로는 그렇단다. 나 역시 전해들은 바를 읊는 것뿐이지만...."
당지혜의 얘기에 의하면, 폐맥은취를 이용해 경맥과 기혈 사이에 막대한 진기를 몰아 넣고 인위적으로 맥을 폐하면 그 부위는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고여 있는 막대한 진기에 의해 보호받게 된다고 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기에 화경의 고수라 할지라도 성취를 알아차릴 수 없게 됨은 물론이고.
그렇게 하면 본신의 무위는 실제로 낮아진다. 전신을 휘돌던 강력한 진기가 대거 사라진 탓이다.
하지만 무위가 낮아진 만큼, 새로이 진기를 쌓는 것은 비교적 수월해진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쌓아올린 진기를 또다른 경맥과 기혈에 넣고 봉한다. 폐맥은취를 한 번 더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임독양맥을 포함한 십이경맥 모두에 적용하게 되면....
놀랍게도 전신이 폐맥은취로 인해 머물러 있는 진기에 의해 보호받는 상태가 된다고 했다. 극도로 밀집된, 정적인 내력은 절로 육신을 보호하려는 성질을 띠는데, 이게 바로 무영객이 창안한 무학이었다.
호신강기一 용린(龍織)
용의 비늘이라는 이름답게, 완성하게 되면 극강의 방호력을 지닌다고.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당연명은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화룡호독도 그렇고, 가문의 시조가 되는 이의 무학에도 그렇고 '용(龍)'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이 왠지 단순한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나 상승무학인 호신강기 용린의 경우에는 심상이 되는 핵심요결이 중요할진대, 모친인 당지혜는 아무렇지 않게 용의 비늘을 언급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용이라는 게 실존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무튼 그러한 상념은 차치하고, 호신강기 용린의 공능은 방호력뿐만이 아니었다.
용린을 완성한 후, 폐맥을 해제하면 단숨에 몇 곱절은 증가한 내력을 얻을 수 있다고.
물론 이건 육신의 허용량을 넘어선 내공이기에 금세 체외로 빠져나간다 했다. 하지만 단기 결전, 특히 화경 고수와의 싸움에서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는 방도가 될 수 있어보였다.
폐맥을 해제하면 용린 또한 흩어지고, 다시 용린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폐맥은취를 다시 쌓아 올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당연명으로서는 크게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극독만 있다면 독요청광심법으로 내력을 쉽게 불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당연명은 모친으로부터 폐맥은취를 전수받았다.
****
하루 뒤 이른 아침.
햇살이 드리우기 시작한 암독전이 여느 때보다 북적거렸다.
다름아닌 소가주 당연명이 새로운 가주로 모친인 독봉 당지혜를 추대하겠다 선언한 까닭이었다. 소식은 금세 가문 전체로 퍼졌고,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직접 발걸음했다.
물론 축하하는 이들만 온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장로원의 세 장로들 역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전날 있었던 약왕당의 혈사야 짐작되는 구석이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던 그들이지만, 이번만큼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당연명이 소가주가 되었을 때, 오장로 당명후가 지적한 바가 있지 않았던가. 가문을 직접 다스리기엔 연륜과 경험이 부족함을 말하면서, 대리청정을 입에 담았었다.
당시 당연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었고, 세 장로들은 그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 자신들밖에 없음을 자신했기에 조용히 물러났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제 어미를 가주로 세우다니?
그들 장로원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나 다름없다. 막말로, 독봉 당지혜가 가주에 어울린다고 볼 수 있을까? 소가주 당연명을 흘륭히 키워내긴 했지만, 지금의 독봉은 그저 여염집 아낙이나 다름없지 않나一 그게 장로들의 생각이었다.
가솔들 중에서도 이번 당연명의 결정을 좋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었다. 가주의 자리는 지고해야 하는 까닭이다. 차라리 장로들에게 잠시 가문을 맡겼다가 장성해서 당연명이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게 올지 않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모인 이들 대부분이 독봉 당지혜가 가주에 오르면 그저 허수아비가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독봉께서 드십니다."
상석을 배정받은 이들이 모두 자리하고 나자, 봉위대 당원진이 소리쳐 당지혜의 등장을 알렸다. 왠지 그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당원진이 비켜서는 것과 동시에 한 인영이 햇살 아래 모습을 드러낸다.
약간 떠들썩하던 좌중은 금세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단순히 그 미모 때문만은 아니다. 엄청난 존재감이 훅 끼쳐왔다. 독봉 당지혜가 의도한 바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말문들이 트이기 시작한다.
"허."
"...맙소사."
"반로환동...?"
"대체 무슨 기연이 있었기에...."
"저분이 정말 독봉이셔? 소가주와 남매라 해도 믿겠는데...."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냐. 뭐지, 이 존재감은. 그간 실력을 숨기고 계셨던 건가?"
"말이 안나오는군. 독봉께서 언제 이 정도 성취를 이루셨단 말인가."
"장로들께서도 할말이 없겠어. 이 정도 무위라면, 가주의 위에 오르셔도 무방해."
당가는 무가다.
무력을 숭상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게다가 독봉 당지혜라면 전 소가주로서, 가문이 돌아가는 사정을 어느 정도 꿰고 있는 인물이
었으니 여기에 무력까지 받쳐준다면 가문의 누구보다 가주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다.
세 장로들은 경악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통성에, 무력까지 갖춘 독봉을 무슨 핑계로 끌어내린단 말인가.
꿀먹은 벙어리가 된 그들을 보며 당연명이 나직이 말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렇게 축하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64화<호신강기 용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