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66화 (66/134)

< 66화<구음절맥> >

'사람의 몸이 이럴 수도 있구나.'

당연명은 여인의 손목에서 손을 떼며 생각했다. 여인- 당미려의 언니는 침상에 누운 채 좀처럼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누가봐도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다.

묘령(妙齡: 20세 전후)이나 되었을까. 이름은 당미소라 했다.

보자마자 절세미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다름 아닌 당연명의 뇌리에도 그랬다. 모친의 영향인지, 좀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봐도 별 감흥이 없는 당연명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만한 미모를 지니고도 소문이 나지 않은 것은 아마 어릴 적부터 두문불출한 까닭이리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탓일까. 볼이 살짝 팬 채 눈을 감고 있는 당미소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녀를 오래 시중들어 왔다는 시비의 말에 의하면 며질 전까지만 해도 의식은 있었다고.

당미소의 몸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몹시 차가웠다. 문제는 그냥 살가죽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전신 경맥에 한기가 어려 있었는데, 이게 오랜 세월 뼈마디와 세맥에 축적되면서 몸을 쇠약하게 만든 것 같았다.

타고난 기운- 선천지기로 그간 한기에 대항을 해왔던 것 같은데, 이제 그것도 한계에 부닥친 모양이었다. 당연명이 살펴보니 선천지기가 소모되거나 손상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한기가 몸을 잠식하자 자연스레 의식마저 차단하고 마지막 저항에 들어간 것 같았다.

아마 여기서 한기가 더 짙어지면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영원한 동면에 빠지겠지.

신기하게도 당미소의 체내에는 한기를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근원 같은 것이 있었다. 보통의 무인들은 감지하기 어려울 터였지만 화경에 오른 당연명은 어려움 없이 '그것들'을 찾아냈다. 하나가 아니었다. 도합 아홉 개.

양해를 구하고 당미려의 체내도 살폈는데, 당미려는 한기의 근원을 세 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미려는 심법까지 익혀 내공을 어느 정도 쌓은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한기에 저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당미소가 구음절맥, 당미려가 삼음절맥인 모양이었다.

당미소가 내공을 쌓지 못한 이유는 뻔히 짐작이 됐다. 구음절맥- 아홉 개나 되는 한기의 근원이 진기의 집약을 방해했겠지. 자질과는 별개로 애초에 단전을 형성하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삼음절맥인 당미려 역시 심법을 익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단전을 형성한 것을 보면 역시 경합에 참가할 만큼 무학에 자질이 있는 것이리라.

"언니는 좀 어때...?"

"위중하지. 보다시피."

당미려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당연명이 태연하게 답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며질만 더 지나면 영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거야. 한기에 저항하는 선천지기가 완전히 한계에 달했어.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래의 기능을 극도로 제한당하고 있으니까. 이러다 기식이 완전히 끊어지겠지."

"아아.... 어떡하면 좋아...."

당미려는 상심을 감추지 못하다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언니 당미소는 어릴 적부터 병약한 몸 때문에 바깥나들이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요절할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이름처럼 미소를 잃지 않던 사람이었고, 비교적 멀쩡한 동생이 그녀 자신의 몫까지 오래오래 살아주기를 바라던 착한 언니였다.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기에, 언니와 자신이 이런 절맥에 고통 받아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이럴 거면....'

당미려는 예전에 했던 한 가지 상상을 떠올렸다.

흑사련주 유길준-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났던 그라면, 어쩌면 이 저주받은 체질을 다시 축복으로 바꿔 줄 빙공을 창안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당미소가 고개를 저으며 말렸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이 있다고. 그렇게 흑사련에 투신해서 빙공을 얻게 되면 끝일까? 아니, 오히려 시작일 터였다. 그만한 가치를 보여야 할 것이고, 어쪄면 절맥으로 인해 겪은 것보다 더한 지옥에 발을 들이 밀어야 할지도 몰랐다. 가문을 적대하는데, 혹은 또 다른 정도 세력을 상대하는데 앞장서야 할지도 모른다. 기껏 구한 목숨으로 남 좋은 일만 하게 될 공산이 컸다.

"미려. 네가 빙공을 말했었지."

당연명이 별 뜻 없이 건넨 말에 당미려가 흠짓 놀랐다. 생각을 읽힌 느낌이었던 것이다.

"확실히 빙공 무학을 익히면 어느 정도 한기를 제어할 순 있을 거야. 특히 삼음절맥을 타고난 미려 너는 꽤나 효과를 보겠지."

당미려는 한기의 근원이 고작 세 개뿐이었다. 제대로 된 빙공- 그러니까 음한지기를 다루는 무학을 익히게 되면 어려움 없이 한기를 조절할 수 있을 터였다. 좀 더 성취가 쌓이면 체외로 한기를 발출할 수도 있을 테니까.

원래 음한지기를 다루는 빙공(水功)이나 열양지기를 다루는 염공(炎功)은 그 대처만큼이나 익히기가 까다로운 무학이었다. 수련자는 호흡법을 이용해 진기를 무학에 적합한 성질을 지닌 내공으로 변환하여 적공해야 했으니까.

내공 성취가 더딜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삼음절맥이니 오음절맥이니 하는 체질을 타고난 이들은 몸속에 절로 음한지기를 만들어내는 근원이 있었으니 빙공 무학을 익히기엔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다. 강력한 빙공 무학의 유일한 단점인 진기 축적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 언니는 달라. 구음절맥을 타고났어. 빙공을 익히는 순간 한기가 걷잡을 수 없게 폭증할 거야. 어쩌면 전신이 얼어붙을 지도 모르지."

"빙공으로도 방법이 없다면, 그럼 언니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

"그건 아냐."

당연명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기공의 고수가 인위적으로 한기를 배출시켜주면 되겠지. 물론 그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야. 한기는 기본적으로 경맥과 세맥에 영향을 주니까.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내가 시도했을 거야. 문제는 지금 네 언니의 상세가 아주 심각하다는 거지."

"상세가 왜...?"

"어쭙잖게 조금씩 한기를 빼내면 괜히 한기의 근원을 자극할 우려가 있어. 그러면 자짓 한기가 순식간에 폭증하고 네 언니는 그대로 절명할수 있어."

"......"

"그러니 몸속 한기의 근원에 여지를 주지 않고 단번에 모든 한기를 빼내는 게 옳아. 하지만 이 방법은 나 역시 위험을 감수해야 해.

어느 정도의 한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올지 모르고, 또 그 한기를 내가 제어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니까. 만약 한기를 받아들이다 안 되겠다 싶으면 나는 그 한기를 다시 네 언니의 몸속으로 집어넣거나 멈추고 물러날 거야. 그렇게 되면 역시 폭증한 한기에 의해 네 언니는 절명하겠지."

당연명은 솔직하게 얘기했다. 당미려 역시 친우였기에 그녀의 언니를 치료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삶을 위협받을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 소가주다. 당장 모친이 아니라도 많은 이들의 삶을 떠안고 있는 셈이다.

당미소 하나를 살리고자 위험을 무릅쓸 순 없었다.

당연명은 다만 친우에게 선택권을 줄 뿐이었다.

"네가 선택해. 아직 며칠의 시간이 있을 테니 다른 방도를 찾을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한기를 제거하는 것을 믿어볼 것인지. 물론 나는 이미 얘기했다시피 안 되겠다 싶으면 물러날 거야. 그건 네 언니의 죽음으로 이어질 테고."

당연명의 말에 당미려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언니.'

무거운 선택이다. 이대로 두고 볼 것인지, 아니면 당연명을 믿고 맡겨 볼 것인지.

어느 쪽이건 당미소의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이 지경이 되도록 웬만한 시도는 다 해 보았으니, 며칠 더 두고 본다해봤자 별다른 수가 있을 리도 없었고. 늘 자신만만하던 당연명이 저렇게까지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쉽지 않은 일이겠지.

당연명이 냉정하게 말했지만 당미려는 조금도 섭섭해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줘서 더 고맙고, 신뢰가 간다고 해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어.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어서 연명이를 찾은 거였잖아.'

당미려는 이내 결단을 내렸다. 당연명을 믿어보자고. 만에 하나 언니가 이 일로 목숨을 잃더라도 그를 원망하지는 말자. 천명이 그것 뿐이었던 거겠지.

하지만 만약 그가 언니를 구해낸다면.

이 지독한 절맥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면...!

'...앞으로 널 위해 뭐든 다 할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도 좋아.'

당미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게 맡길게. 연명아. 언니의 한기를 제거해 줘."

****

당미려의 결정에 따라, 당연명은 직접 손을 쓰기로 했다.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주변에 사람이 접근할 수 없게 하고, 당미려로 하여금 당미소의 옷을 완전히 벗기고 가부좌를 틀고 앉게 만들었다. 당미려는 당연명의 주문에 약간 당혹한 듯했지만, 이내 제 언니를 나신으로 만들고 당연명의 말에 따랐다.

당미려는 당미소의 등 뒤 명문혈에 손을 받치고 앉아있었고, 당연명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당미소의 전면에 자리했다.

"......"

절세미녀의 나신이 눈앞에 무방비하게 있었지만, 당연명의 낯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굳이 당미소의 옷을 벗긴 것은 한기의 근원이 아홉 개나 되는 까닭이었다. 미간과 인중, 심장과 폐, 양팔과 양다리, 그리고 배꼽 아래 어딘가까지.

그 모든 부위에서 단번에 한기를 끌어내야 하는데, 옷가지가 방해가 되어선 곤란했다. 처음엔 민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당미려도 당연명의 진지함에 안색을 굳히고 집중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판국에 그깟 속살 좀 내보이는 게 어떻단 말인가.

"시작할게."

"응"

당연명은 당미소의 미간에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붙여 갖다 댔다. 위쪽 한기의 근원들부터 처리할 셈이었다.

'흡 (吸 ).'

기감으로 근원들의 위지를 파악한 이상, 한기를 뽑아내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근원들에서 한기를 뽑아내는 속도와 당연명의 체내로 들어온 한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당미소의 미간에 자리하고 있던 한기의 근원은 금세 흡(吸)의 묘리에 의해 한기를 바닥까지 뽑히고 사라졌다.

당연명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왼손을 뻗어 당미소의 인중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창백하지만 보드라운 입술이 손가락에 닿는 감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흡(吸)의 묘리를 이용해 한기의 근원을 뿌리 뽑는다. 역시 어렵지 않았지만 당연명은 조금 심각한 표정이었다.

'종전보다 한기가 증가했어.'

미간에 자리하고 있던 한기의 근원에서 나온 것보다, 지금 인중에 자리하고 있던 한기의 근원에서 뽑아낸 한기가 훨씬 많았다. 분명 기감으로 느꼈을 때 한기의 근원들은 동일한 수준으로 보였는데 말이다.

전완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면서, 당연명은 오른팔을 놀렸다. 이번에는 당미소의 왼팔 상완에 자리하고 있는 한기의 근원이다.

또 다시 흡(吸)의 묘리.

인중 때보다 더더욱 증가한 한기.

오른팔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끼면서, 당연명이 왼팔을 뻗었다. 당미소의 오른팔 상완으로.

흡(吸)의 묘리.

또 한 차례 증가한 한기.

당연명은 이제 확신했다.

이 한기의 근원들은, 하나씩 없앨 때마다 남은 것들에서 쏟아지는 한기가 강해진다...!

아홉 개의 근원들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연계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미 손을 댄 이상 기호지세였다. 잠시라도 근원들을 없애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아홉 번째 근원은 대체 어느 정도의 한기를 쏟아낼까- 그렇게 생각하며 당연명은 당미소의 가슴, 아니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 66화<구음절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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