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조짐> >
당연명은 당미소에 이어 당미려의 삼음절맥마저 치료하고자 했다.
나도 옷을 벗어야 하는 거냐며 당미려가 수줍게 얼굴을 붉혔지만 당연명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미 당미소의 구음절맥마저 치료했지 않나. 이제 한기, 한독은 그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애초에 한기의 근원이 자리한 곳도 비교적 평범한 위치였고.
왠지 아쉬워하는 기색의 당미려를 돌려 앉혀 놓고, 당연명은 목 뒤 풍지혈(風池穴)부터 짚어나갔다. 거기에 한기의 근원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간 당미려의 안색이 창백했던 이유가 짐작되는 대목이었다.
흡(吸)의 묘리를 이용해 간단하게 한기의 근원을 제거한다. 당미소 때도 처음은 그리 어렵지 않았었다.
스우우우우우ㅡ!
세 개의 근원 중 하나가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나머지 두 개의 근원에서 한기가 거세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삼음뿐이라 그런지, 구음 때보다 한기의 증가폭이 컸다. 당미려 역시 예상을 웃도는 한기의 공세에 놀라 크게 움찔했다.
그러나 이미 구음을 겪어 본 당연명의 입장에서는 그리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손을 뻗은 곳은 우측 견정혈(潤井穴)이었다. 그곳에 자리 잡은 한기의 근원은 당미려가 세심한 암기술을 구사하는 것을 알게 모르게 방해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눈지 채기 힘들 정도로 미세한 차이겠지만, 앞으로 성취를 쌓아갈수록 뚜렷해졌겠지.
당연명은 그곳에서 기인한 한기를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그리고 체내로 들어온 한기를 독요청광기로 하여금 먹어치우게 한다.
'정말 영약이 따로 없군.'
단숨에 불어나는 내공량이 예사롭지 않았다. 직전에 폐맥은취로 막대한 내공을 경맥에 봉인한 뒤로 당연명의 체내에는 미묘한 변화가생긴 참이었다.
일단 운기의 효율이 상당히 떨어졌다. 이건 십이경맥 중 네 개의 기맥을 닫아 잠근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 비어버린 단전에는 아주 쉽게 내공이 쌓였는데, 마치 심법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화경에 오르고 난 뒤에는 강기를 사용하지 않는 한 언제나 넘치는 내공이 전신을 휘돌고 있었고, 대성한 독요청광심법 덕에 당연명의 단전은 언제나 만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넘치기 직전의 술잔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추가적으로 진기를 쌓아 올리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영물의 내단이나 영약을 복용하더라도 효율이 좋지 않은 것이다.
이미 육신의 한계까지 내공을 쌓았으니까.
그런데 폐맥은취의 수법으로 단전을 비워냈다. 경맥- 다른 술잔으로 술을 옮겨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워진 단전은 그만큼 채우기 수월해지는 게 당연한 이치.
당미려에게서 뽑아낸 한기, 한독을 먹어치우는 것만으로도 제법 충만감이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당가십독 정도는 되어야 기별이 올 정도였으니까.
'갈수록 쉽지 않겠어. 역대 가주들 중에서도 제대로 익힌 자는 드물겠군.'
당연명은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폐맥은취로 십이경맥을 모두 채워 호신강기 용린을 완성하는 것은 아주 지난한 일로 보였다. 경맥에 내공을 채우고 닫으면 운기에 제약이 생기니 호흡법의 효율이 떨어진다. 다시 단전을 채우는 것도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폐맥되는 경맥이 계속 늘어나니 심법 효율은 더더욱 떨어지고 단전을 채우는 것 역시 어려워지겠지.
십이경맥을 모두 채우려면 막대한 양의 영약을 복용해야 하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만년화리의 내단이 몇 개는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독요청광심법을 대성한 당연명으로서는 비교적 수월한 일이었다. 충분한 독, 극독만 있다면 독요청광기를 이용해 쉽게 내공을 늘릴 수 있었으니까. 당이전이 있으니 웬만한 극독은 자체적으로 제조가 가능할 터였다.
아마 무영객 또한 독요청광기를 이용해 호신강기 용린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당연명은 마지막으로 당미려의 왼쪽 손목 내관혈(內關穴)을 짚었다.
그곳이 바로 마지막 삼음이었다.
****
당미려의 집 문 앞.
막 떠나려는 당연명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딸아이들을 모두 구해주시다니. 소가주. 이 일을 어찌 보은해야 할지...."
당미려와 당미소의 부친인 당적신은 고마움을 숨기지 않았다.
당적신은 원래 안휘 태생으로 허씨 성을 썼다고 했다. 상재가 있었는지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하여 제법 큰 규모의 상단을 꾸리고 이끌게 되었는데, 어찌다 보니 사천에 자리 잡게 되었고 당미려의 모친을 만나 혼인까지 하게 되었다고.
당미려의 모친은 딸 둘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는데, 늘 손과 발에 한기가 돌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녀 역시 삼음이나 오음의 절맥을 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부인을 그렇게 떠나보낸 마당이었으니 당적신이 딸들, 특히 당미소를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젊을 적 모아둔 재산을 거의 다 써가면서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절맥의 치료법을 알 수 없었는데, 경합에 참가했던 당미려가 난데없이 소가주 당연명을 데려오더니 제 언니 당미소의 절맥을 완전히 치료케 한 것이다.
그냥 봐도 자매가 나란히 혈색이 좋아진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비보다 먼저 요절할 염려를 덜어냈다. 당적신이 당연명에 느끼고 있는 감사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늦지 않아 다행이지요."
당연명은 고개를 저으며 겸양을 떨었다. 그 역시 이번 일로 얻은 게 적지 않았다. 당미소의 구음으로부터 네 개 경맥, 당미려의 삼음으로부터 한 개 경맥을 채울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단번에 다섯 개 경맥의 폐맥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고도 단전에는 적잖은 내력이 쌓였으니 천년설삼을 몇 뿌리나 복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싶었다.
또 무엇보다 당미소의 호감을 제대로 사지 않았나.
당연명은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선녀인가.'
제대로 분홍빛 궁장을 갖춰 입고, 여러 장신구를 어울리게 착용한 당미소의 미모는 그야말로 가슴 떨리게 아름다웠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이 느껴질 정도. 그리고 당연명의 눈에는 아직 그녀가 나신으로 있던 때의 모습이 선명했기에, 괜히 야릇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살포시 웃음 지으며 입을 연다.
"조심히 가세요. 은공. 말씀대로 몸조리를 좀 하고 찾아뵙겠습니다."
"예. 소저. 언제든 방문하시길."
"거듭 고마워. 연명아. 언니를 구해줘서. 물론 날 치료해준 것도."
"아냐. 가볼게. 다음에 보자"
당연명이 자매를 대하는 것에 다소 차이가 있었다. 당미소에게는 누가 봐도 호감을 품은 청춘처럼 대하고는, 당미려에게는 그저 친우를 대하듯 담백하게 말한다. 그걸 느낀 당미려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당연명은 당적신에게로 고개를 돌린 참이었다.
"가보겠습니다. 그럼."
"공사가 다망하신 분을 사적인 일로 오래 붙잡아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만약 소가주께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예. 기억하겠습니다."
그걸 마지막으로 당연명은 봉위대 무사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단이라.'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흑사련의 발족 이후 당적신은 상단의 규모를 축소하고 기껏해야 성도 내에서만 이런저런 물건을 거래한다고 했다. 성도를 벗어나면 흑사련의 비호를 받지 않는 이상 노략질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당가의 사정을 아는 이들이 대놓고 덤터기를 씌워도 크게 따지지 못한다고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웃돈을 주고 구매하거나 비교적 싼 값에 팔아치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도 바깥에서의 상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했으니까.
지금껏 가문의 재원은 약왕당이 구 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제는 의각이 담당하게 될 터였고, 의각이 제대로 정비되기 전까지는 총관부에서 어떻게든 돈 나올 구석을 마련해보겠다고 했다. 그 일환이 장로들의 뒷주머니를 색출해내는 것이었지.
'손을 보긴 해야겠어.'
당연명은 가문의 영역을 '조금' 확장할 필요를 느꼈다. 영역이 성도에만 국한되니 상단을 운영하기도 어렵지 않나.
적어도 다른 성과 통하는 길목만큼은 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숨통을 틔운 다음 가문의 상단은 당적신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힌 당미려와 달리 당미소는 상단의 일을 배웠다고 했으니까. 필시 부친을 도와 상단에 합류하겠지.
'얼굴을 보는 일이 많아지겠어.'
호위로 따라나서기도 해야겠지. 사도천하라 불리는 사천이니까. 길만 뚫어뒀다고 해서 안심할 순 없지 않을까-
누가 예상이나 했으랴.
바로 이 순간.
사천당가 소가주 당연명의 연애사업 때문에, 십 년도 넘게 공고하던 사도천하에 금이 가기 시작했음을.
아직 사천의 하늘은 그저 푸르렀다.
****
호화롭게 치장된 방 안.
속살이 비칠 듯 몹시 얇은 침의를 입고서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이 있었다.
심화방주 여설련이다.
잘 익은 복숭아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녀가 말했다.
"...당지혜 그년이 당가주가 되었다? 그 아들은 소가주가 되고?"
"예. 방주."
엎드린 채 사내가 말했다. 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자칫 실수로라도 심화방주의 몸매를 눈에 담을까봐서였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에 보고를 맡았던 이가 눈동자를 잘못 굴려 그 자리에서 타죽은 일을 말이다.
"무슨 수로 그리 되었을까. 장로원의 영감들이 노망이 난 것은 아닐 텐데."
"일전에 공동산에서 소가주 경합이 벌어졌던 것은 아실 겁니다."
"그래. 태을묵검파의 막 장문이 그때 귀천했지."
"......"
심화방주는 나직이 말했지만 사내는 오싹한 살의를 느꼈다. 젊은 시절 여설련과 막인후 사이에 돌았던 염문을 모르지 않았다. 그게 진짜였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내는 얼른 입을 열었다. 괜히 심기를 상하게 하면 타죽는다...!
"그때 우승한 것이 바로 독봉의 아들, 당연명이라 합니다. 알아본 바로는 경합에 참가하기 전까지는 크게 두각을 드러낸 일이 없었다고...."
"그럼 불과 삼 년 남짓한 경합 기간 동안 실력이 일취월장했다는 거군. 다른 장로들의 혈육이나 제자 같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칠정도로."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 당연명이 돌아와서 벌인 일인데...."
사내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여기서부터는 정말 믿기 힘든 일들의 연속이었던 까닭이다.
"단신으로 삼장로와 대장로를 격살했다고 합니다. 경합 결과에 대해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그들을 도리어 추궁하여 소가주로서 엄벌을 내렸다고."
"뭐...?"
여설련이 복숭아를 씹던 것을 멈춘다. 순간 들은 것을 의심하는 모양새다.
"당연명. 독봉의 아들이라는 그 녀석의 나이가 약관도 되지 않은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장로 둘을 쳐 죽였다고...? 그 연배에? 가능한 일인가?"
"보고 들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도 믿기 힘들지만 세작들의 말이 하나같이 일치하는 터라...."
"재밌네."
심화방주 여설련은 어떤 냄새를 맡았다. 사천의 판도가 바뀔 것만 같은 냄새- 동시에 그녀는 직감했다.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 당가가 있을 거라고.
계속해봐-그녀가 말했다.
"그때 장로들을 추궁하면서 밝혀진 사실이 있습니다."
"뭐지?"
"태을묵검파의 막 장문이 데려간 삼백의 인원.... 그들이 모두 당연명의 손에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 68화<조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