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금지> >
한편.
심화방 외 다른 사도 방파들에서도 소가주 당연명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몇 방파들一 특히 성도 인근에 자리 잡은 곳들은 당연명이 태을묵검파의 삼백 인원을 몰살시킨 것이나 장로들을 처단한 것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필시 소문이 와전되었겠지. 혹은 소가주 측에서 공연히 꾸며냈거나. 어린놈이 인정받기 위해서 무위를 부풀리는 일은 흔하잖나."
"장로들을 격살하는 장면은 본 이들이 많네. 과장은 있어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 봐야겠지."
"흥. 다 늙어 빠져서 권력이나 탐하는 너구리들일세. 방심했거나 은밀한 하독에 당했겠지. 당가 놈들의 수법이야 뻔하잖는가. 한심한 일이야. 지금은 그보다 중한 것이나 논하세. 약왕당이 무너졌다는 게 사실인가?"
"그렇다는군. 당주였던 당일을 포함해 약왕당의 핵심 인물들이 모조리 죽었다 들었네. 이 역시 소가주의 짓이라더군. 아침부터 봉위대라는 직속 무력대를 잔뜩 이끌고 들이친 모양이야."
"사유는? 그만한 인원을 몰살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새로 가주가 된 독봉이 천명하기로는 남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더군. 약왕당 전체가 말이야. 소가주 당연명의 입장에서는 죽은 아비의 원한을 갚은 셈이지."
"어려서 그런가? 아무리 원한이 있다한들 지금의 당가에서 약왕당이 차지하는 비중을 모르지 않을 텐데. 뒷일을 생각지 않은 처사 같군. 약왕당이 벌어들이는 재물 없이 앞으로 어찌 가문을 굴릴 셈이지? 무력대를 비롯해 딸린 입들을 감당하는 것만도 상당한 은자가 소모될 텐데 말이야."
"총관부에서 장로원의 뒷주머니를 털고 있다는군. 당분간은 그걸로 충당할 셈이겠지. 오래 가진 못하겠지만."
"그나저나 아까운 일이야. 끌끌. 마지막으로 당일 그놈을 보았을 때를 떠올려 보면 거의 이쪽으로 넘어온 듯했는데 말이지. 망해가는 가문에 무슨 미련이 남아 그리 망설였을꼬. 혼자만 아는 보물이라도 꿈쳐두었던 건지...."
"일이 어렵게 됐군. 아니 쉬워진 건가? 어쨌거나 약왕당이 사라졌으니 말일세."
"쉬워졌다 봐야지. 원래 련주께서도 당가 약왕당이 사천 민생에 도움이 된다 하여 그간 공격을 금하지 않으셨던가 말일세. 죽은 당일놈을 꾀어 약왕당을 아예 별개의 방파로 빼내려 했건만, 제 놈들 손으로 없애버리다니. 그간 회유를 위해 미끼를 던졌던 게 허탈할 정도군."
"그럼 이제 당가의 존재 가치가 없어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 련주께 당가 불가침령을 거두어 달라 청할까 하는데."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일세. 약왕당을 대신해 의각이라는 게 만들어졌다고 하니까."
"의각? 거긴 다 늙어빠진 전대 약왕당주와 의술을 제대로 펼쳐본 적도 없는 아해들로만 구성되어 있다지 않았나? 약왕당을 대체하기엔 무리지."
"의각이 제대로 구색을 갖추기 전에 밀어버려야겠군. 서둘러야겠어."
"...불가침령을 어길 생각은 아니겠지? 련주의 명은 지엄하네. 아무리 성도 땅이 탐이 난다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 법일세."
"놈들과 전면전을 유도해 보지.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순 없는 법 아니겠나. 혹은 우리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방법도 괜찮겠지."
"전면전? 어떻게?"
"이 사람. 잊었나 보군. 곧 사천지회가 있지 않나. 그간 가주와 소가주의 자리가 공석이어서 참가를 거절해왔던 당가도 이번만큼은 명분이 없겠지."
****
암독전으로 돌아온 당연명은 몇 가지 일들을 처리하고- 그래봐야 모친인 독봉과 식사를 함께하고 봉위대 무사들의 성취를 간단히 봐주는 정도였지만... 곧장 당가십독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원래 당가십독의 관리를 맡았던 것은 장로원- 그중에서도 용독술의 고수였던 삼장로 당석형이었지만, 당연명이 그가 화룡호독을 사적으로 유용했음을 지적하며 암독전의 관할로 가져왔더랬다. 그리고 가주가 된 당지혜가 당가십독의 운용과 관리를 소가주 당연명에게 맡겼다.
"이쪽입니다."
장로원으로부터 당가십독에 대한 것을 인계받았다는 암왕대 소속 무사가 안내를 맡았다.
'가문 내에 이런 곳이 있었군.'
당연명은 낯선 풍경을 눈에 익히며 생각했다.
한때 세가로 불렸던 만큼, 당가의 영역은 꽤나 넓었다. 가주전인 암독전이나 장로원, 총관부 등을 비롯한 가문의 헥심 운영 주체가 자리한 내원만 해도 그 규모가 제법이었지만, 방계를 포함한 온갖 가솔들이 모여 사는 외원까지 포함하면 웬만한 마을보다 크다고 봐야했다. 몇몇 어린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살면서 가문 밖으로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다.
"소가주를 뵙습니다."
인적이 뜸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계를 서고 있던 암왕대 무사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그들의 눈에는 어떤 경외 같은 것이 어려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문에 복귀한 지 며칠 만에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린 당연명 아닌가.
누군가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다. 스스로 일군 무위로 존엄한 자리에 올라섰다. 누구보다 가문의 영광을 바라는 이들이었으니 당연명에게 거는 기대가 크겠지.
당연명은 인사하는 암왕대 무사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특특 토닥여주면서 격려했다. 아랫사람을 다루는 것은 익숙지 않았지만 모친에게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약간만 신경 써줬을 뿐인데도 암왕대 무사들은 감격한 듯 보였다.
그렇게 조금 더 들어가자 견고하게 만들어진 석실(石室)이 나타났다.
독중독고
극독 중에서도 극독이라 불릴 만한 것들을 모아 놓은 곳이라는 뜻의 현판이 달려 있었다.
"이곳입니다. 소가주."
안내를 맡았던 무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말한다.
진녹색과 자색이 신비롭게 어우러진 구슬이었다.
"들어가실 때에는 이걸 지니셔야 합니다."
"이건?"
"피독주(避毒珠)라는 것입니다. 웬만한 독은 이걸 입에 물고 있는 것만으로 침범하지 못하지요. 본가의 보물 중 하나입니다. 독고의 안에는 오랜 세월 당가십독을 보존해온 탓에 공기마저 독기를 머금고 있습니다. 그냥 들어갔다가는 아무리 소가주라 하셔도 순식간에 중독되고 말 것이니, 부디 지참하시기를."
"필요 없다."
당연명의 단호한 거절에 암왕대 무사가 멍청히 되물었다. 지금 소가주께서 피독주가 필요 없다 하신 건가?
독고 안에는 당가가 존속해온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농축된 독기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범인이라면 들어서자마자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을 것이고, 어느 정도 독에 내성이 있는 당가의 무인이라 한들 반 각(7분가량) 이상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만큼 엄청난 독이 퍼져 있는데, 피독주 없이 들어가겠다고...?
"그거. 입에 물어야 한다면서."
죽은 삼장로는 물론이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입에 머금고 있었을까.
"난 그리 못한다."
"...당연히 제가 깨끗이 닦아두었습니다. 안심하시지요."
"싫대도."
당연명은 그리 말하며 암왕대 무사가 내미는 피독주를 피해 독중독고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적으로 신법 암영까지 펼쳤기에 암왕대 무사가 당연명의 신형을 놓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가주...!"
암왕대 무사가 토해낸 경악 어린 외침을 뒤로 한 채 당연명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내부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야명주-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돌조각들이 천장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까닭이었다.
사실 보통 사람에게라면 희미한 빛에 불과할 테지만, 안법을 연성한 당연명에게 이 정도 밝기면 사물을 분간하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좋군.'
당연명은 스읍 숨을 들이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암왕대 무사의 경고대로 독고 안의 공기는 예사롭지 않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 그가 걱정한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독요청광심법을 대성한 당연명에게 있어서는 그저 호흡할 때마다 내공이 불어나는 영지(S地)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보통의 경우에는 피독주를 물고 가급적 호흡을 얕고 적게 가져가려고 애쓰는 편인데, 당연명은 되레 심호흡을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명산의 맑은 공기를 음미하듯.
이 광경을 암왕대 무사가 보았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렇게 걷던 와중이었다.
'음?'
당연명은 순간적으로 어떤 이질감을 느꼈다. 폐맥은취로 인해 내공성취가 낮아진 꼴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기감이 무뎌진 것은 아닌 까닭이다. 감지 가능한 영역이 줄었을 뿐.
즉시 안법 시류안을 발동했다. 진녹색 안광이 귀화처럼 줄줄 흘러나온다. 그 상태로 주변을 훑는다. 시류안은 흐름을 보는 안법이다.
대번에 한쪽 공기의 흐름이 어색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언가 현상이 왜곡되고 있다는 뜻이다.
'진법?'
당연명은 의아함을 느꼈다. 당가십독이 보관된 창고나 다름없는 이곳에 웬 진법이란 말인가? 그것도 아주 은밀하게 설치된 것이었다.
화경에 이른 자의 기감이 아니면 쉽사리 발견할 수도 없도록 말이다.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당연명은 수리검을 꺼내들며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엔 널린 게 독기였다. 내공을 좀 쓴다 해도 금방 보충할 수 있으리라.
'갈라져라.'
화르륵!
수리검에 진기를 두르고, 진기에 의념을 싣자 대번에 진녹색 불꽃이 타오른다. 검강의 현현이다. 그대로 흐름이 이상한 곳에 대고 긋자, 허공이 난데없이 쯔어억 갈라지며 숨기고 있던 광경을 드러낸다. 진법이 순간적으로 효력을 잃은 것이다.
그곳엔 웬 통로가 나타나 있었다.
기괴한 것은, 붉은 글씨로 '금(禁)'이라 써져 있는 황색 종이가 수도 없이 통로 입구를 둘러쳐가며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군데군데에는 '봉(封)'이라 적힌 것도 몇 장 보였다.
'부적?'
당연명은 눈앞에 있는 것이 제대로 된 방사가 펼친 어떤 술법임을 알아차렸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다.
당연명은 만난 적 없지만 스승이었던 검귀는 방사(方士)라 불리는 이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들은 검에 미친 스승처럼 술법에 미쳐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술법으로 인간의 한계를 탈피하여 등선을 하고자 한다고.
당연명의 수련을 도울 진법을 몇 개 만들어준 것도 그들 방사라 했다. 그들의 진법은 제갈가가 만든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신묘했다. 분명 밖에서는 삼 장 남짓의 크기였는데, 안에 들어서자 산맥이 몇 개는 있었으니까. 이름을 알 수 없는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그들이 술법이나 진법을 펼칠 때 항상 쓰였던 것이 저렇게 생긴 부적이었다. 누렇게 물든 종이는 괴황지라는 것으로, 회화나무의 꽃과 열매를 달이거나 하여 그 물로 염색한 것이었다. 괴황지가 아니면 부적을 동원한 술법은 금세 효력을 잃기 마련이라 했다.
명맥이 거의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그들 방사의 흔적을 이곳 사천당가에서 발견할 줄이야.
'방사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오직 술법과 등선, 그리고 이매망량이라 했는데.'
이매망량(題®趙懸)이라는 것은 어떤 귀신이나 괴물 같은 것들을 총칭하는 말이었다. 다만, 예전에 아주 고명한 방사가 세상의 이매망량들을 모조리 없애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방사들은 대체로 같은 방사나 이매망량들을 상대하면서 술법 경지를 높여가는데, 세상에 이매망량들이 희소해지자 마찬가지로 방사역시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고.
'일단 놔두자.'
궁금증이 치솟았지만, 당연명은 물러났다. 괜한 위험을 자초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강기를 쓰는 바람에 소모된 내공이 상당했던 까닭이다. 우선은 독기를 흡수해 내공을 보충하고 당가십독을 확인하는 게 올다는 판단이었다.
당연명은 한쪽에 '십독(十毒)'이라 새겨진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곧 그의 신형이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고,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 입구는 스스스스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다시 모습을 감췄다.
< 69화<금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