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당가십독(1)> >
당연명은 통로를 지나 열 개의 작은 방이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공간에 이르렀다.
각각의 방 앞에는 일(_)에서 십什)까지 적힌 천이 발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오히려 이곳이 독기는 더 옅군.'
어떻게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이곳은 당가십독이라 불리는 극독 중의 극독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 않나. 그런데 독기가 통로 바깥보다 짙어지기는커녕 옅어지다니?
'피독주 때문일까.'
당연명은 계속해서 독기를 빨아들이며 추측했다. 독중독고를 드나든 인물들은 대개 이곳 당가십독의 보관처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피독주를 입에 물고서 말이다. 그 때문에 독기가 옅어진 것이 아닐까.
'...아니야.'
금세 추측을 부정했다. 암왕대 무사의 말이 떠오른다.
-피독주라는 것입니다. 웬만한 독은 이걸 입에 물고 있는 것만으로 침범하지 못하지요.
그는 피독주가 독기를 흡수하는 게 아닌,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물건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곳의 독기가 옅어질 이유가 없지 않나.
지금 당연명처럼 독기를 일부러 마셔대는 이가 또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 의아함을 느끼던 당연명은 순간 어떠한 가정을 떠올렸다.
그는 이미 통로 바깥의 독기를 겪고 왔기에, 당가십독이 자리한 이곳의 독기가 옅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독기가 옅어진 게 아니라, 통로 바깥의 독기가 지나치게 짙은 거라면...?
불현듯 조금 전에 봤던 진법이 당연명의 뇌리를 스친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괴황지까지 동원한 방사의 술법- 무언가를 오랜 세월 봉인하거나, 출입을 금한 것처럼 보였더랬다. 그것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됐어. 일단은.'
당가십독부터 확인하자-
당연명은 상념을 접어두고 일(一)이라 적힌 곳부터 차례로 천을 젖히고 들어섰다.
****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장로원.
그중에서도 이장로 당명신의 거처에 몇몇이 모여 앉아 있었다. 모두 당명신의 가까운 혈족이자, 이제는 가문의 요직에서 배제된 이들이었다.
당명신의 조카이자 전 독왕대주인 당지혁이 침중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숙부.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시간을 두고 기회를 노리려 했건만 독봉 그 계집이 가주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계집이라니. 말을 조심해라. 엄연히 본가의 가주이시거늘."
엄한 말투로 당지혁을 꾸짖은 당명신이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을 한 차례 탐색하고는 말을 이었다.
"지혁이 네놈은 항상 그 경솔함이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당연명 그놈이 소가주 경합에 참가하게 된 것 자체가 네놈 탓 아니더냐."
"...그 애기를 왜 지금 하시는 겁 니까."
"네가 섣불리 그놈을 경합에 내보내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쏘아붙인 후 당명신은 한쪽에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년을 일별했다. 당지혁의 아들인 당문찬이다. 한때는 당명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지만 모종의 일로 한쪽 팔이 완전히 망가지면서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소년.
그를 보니 또 열이 뻗치는지 당명신이 힐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문찬이 녀석도 그렇지. 소가주가 될 재목도 알아보지 못하고 척을 져...?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다음에야.... 내가 평생 쌓아 올린 것들을 너희 부자가 이렇게 망치는구나. 그간 혈육이라고 뒤를 봐줬던 것이 어리석었던 게지...!"
"......"
당문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숙조부의 말에 면목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당연명에 대한 원한과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놈만 없었다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그런 생각을 했다. 당연명과 엮이지 않았더라면, 팔만 정상이었다면 어찌면 소가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 물론 당연명이 지닌 재능과 쌓아올린 무위가 엄청나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노력도 못해보고, 이렇게 못다 핀 꽃처럼 스러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팔을 고쳐야 해. 팔을.... 그래야 놈에게 복수를 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이제는 당문찬도 알고 있었다. 당연명에게 당해 완전히 망가진 왼팔, 겉으로 보기에는 말끔히 나은 것 같지만 기맥과 세맥이 완전히 어그러져 그쪽으로는 아예 운기를 할 수 없었다. 평범한 내가기공으로는 고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당지혁이 말했다.
"숙부. 가주의 무위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간 십 년이 넘도록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했는데, 단숨에 고수가 되었다는 게 저로서는 납득이...."
"네놈이 납득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날 독봉이 보인 무위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 무슨 깨달음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화경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나...."
"가주 취임식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느꼈을 거다. 대항할 수 없는 강자라고. 사장로와 오장로의 표정을 보았을 거다. 소가주 라는 잠룡 하나만을 감당하기도 벅찬 판국이었는데, 그 잠룡에게 독봉이라는 날개마저 달린 격이다. 명분과 무력이 모두 저쪽의 우위다. 뒤집기 힘든 형세가 되어버린 게지."
"어렵게 됐군요."
"그래. 가주와 소가주, 적어도 수십 년- 이 대에 걸친 집권이 아주 공고할 테지. 그동안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을 거고. 이미 척을 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괜히 모반을 꾸미거나 했다가는 몰살당할 거다. 오히려 저쪽은 그걸 기다리는 것일 지도 모르고."
"......"
오싹한 얘기였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당연명이 스스로 소가주의 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본 바 있었다. 대장로 당석중과 삼장로 당석형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도했다는 얘기다. 그 과정까지도.
명분을 확보하고서 바로 잔혹한 손속을 보였었다- 당명신의 말대로 괜한 모반을 꾸미는 것은 자멸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뇌리를 스쳤다.
"...하면 숙부께서는 어찌하시려는 심산이십니까. 총관부의 압박 때문에 자금줄도 말라붙지 않았습니까. 다른 장로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희는 지금 건정대를 유지하는 것만도 힘겨운 상황입니다."
당지혁이 물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장로 당명신의 직속 무력대인 건정대 뿐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총관부가 건정대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주지 않기로 함에 따라 완전히 사비로 그들을 감당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 자연스레 건정대를 해산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당명신 일가는 자연스레 몰락하게 될 터였다. 그 전에 무언가 수를 내야 했다.
"안다. 그래서 나 또한 숙고해보았느니라."
당명신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무래도 가문을 떠나야겠다."
****
당연명은 당가십독을 모두 확인했다.
이미 예상했듯, 남아 있는 것은 모두 네 가지였다. 비어 있는 곳에도 그 유래나 기원, 독의 효과 같은 것이 서적으로 남아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제조법 같은 것이 딱히 없는 게 대부분이라는 점이었다.
딱 하나 조제가 가능한 게 무형독이었는데, 정식이름은 무형명산(無形命散)으로 대장로 당석중이 당연명을 암습할 때 쓴 독이 바로 이 완성되지 않은 무형명산이었다.
'봐도 모르겠군.'
당연명은 독의 제조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건 약학과 독학에 두루 박식해야 할뿐더러 약이나 독의 배합에 어떤 감각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었다. 무학에 대한 재능과는 완전히 별개로.
그래서 당연명은 조제법을 적당히 필사해 품에 챙겨 넣었다. 당이전에게 넘겨줄 셈이었다. 보아하니 무형명산은 만드는 데 꽤 많은 세월이 소요되는 것으로 보였다. 아직 약관에 이르지 않은 당이전이었으니 지금부터 무형명산의 조제에 들어간다면 비교적 젊은 나이에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조제법은 가보나 다름없는 당가십독 중 한 가지를 만드는 방도인 만큼, 가주인 모친의 허락을 받고 넘겨야겠지만.
나머지 아홉 가지 독은 조제법 같은 것은 없고, 그저 그 독을 어떠한 경로로 얻게 되었는지, 또 어떠한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제법 허무맹랑한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만년화리가 사는 곳에는 십중팔구 화룡 또한 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화룡은 '용(龍)'이라는 족속들이 으레 그렇듯 무척이나 잠이 많아 평상시에는 조용히 수면을 취하지만, 일단 깨어난 동안에는 폭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고는 한다. 명백히 인세에 해를 끼치는 재앙으로서 정의될 만하다. 놈들은 용암보다도 뜨거운 숨결을 내뱉어 사람을 해하는데, 이 숨결을 술법으로 가두어 액화시킨 것이 바로 화룡호독이 다. 화룡호독은 열독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으로....
이미 겪은 바 있는 화룡호독에 대해 남겨진 서적이었다.
화룡호독을 제외한 다른 독들 역시 이러한 설명이 있었다. 조제법이 없이 그저 전해 내려오기만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저 어떤 상상이나 전설 속의 영물 같은 것들에게서 뽑아낸 것이라는 식이었으니까. 자연 그대로의 독이라는 의미다.
유일하게 무형명산만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여러 독들을 오랜 세월 조합 및 배합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었고.
하지만 무형명산은 당가십독 중에서도 그 독성이 가장 약하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들이는 노력이 무색하게.
어쨌거나 당연명이 확인한 바, 남아 있는 당가십독 네 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화룡호독 (火龍呼毒)
무형명산(無形命散)
용살독 (龍殺毒)
살조화 (殺造化)
용살독과 살조화는 그리 많은 양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특히 살조화는 작은 옥병에 들어 있었는데 몇 방울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용이라는 족속들은 영물과 이매망량의 사이에 있는 어떠한 존재로, 그들에게는 보통의 무학이 통하지 않는다. 강력한 의념이 서린 강기쯤은 되어야 약간의 타격을 입힐 수 있고, 그마저도 금세 회복해버리고 만다. 그러한 용을 쉬이 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용살갈(龍殺繼)의 독을 놈들의 역린을 헤집고 집어넣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데....
용살갈이라는 것은 극독을 지닌 지네 형상의 이매망량을 뜻하는 것 같았다. 이매망량이라는 것은 결국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귀신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독기 또한 생물의 그것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고 했다. 그 독이 얼마나 지독했으면 용을 죽일 수 있을 정도였을까.
그 지독한 독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이름마저 용살갈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한편.
-조화경에 이른 이들은, 예로부터 인세의 절대자로 군림해왔다. 그들 중에는 존중받아 마땅한 인격을 지닌 이들도 있지만, 놀라운 무력을 앞세워 온갖 해악을 일삼는 자들도 즐비했다. 그런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부상이나 목숨을 잃을 것을 감수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놈들에게는 가차 없이 독을 쓰도록 하라. 다만 본가의 비전이나 다름없는 독들을 쓰는 것 역시 아까운 일이니 본좌가 후인들을 위해 방책을 남기고자 한다....
살조화는 이름 그대로 조화경의 무인을 살해하기 위한 독이었다. 선대의 누군가가 남긴 것으로 보였는데, 세상에 등장한 악인이 터무니없는 강자거나 가문을 위협할 때 아끼지 말고 사용하라는 유훈이 함께 전해졌다.
살조화는 독인지경에 이른 누군가가 스스로의 몸에서 직접 뽑아낸 독의 정수였다.
< 70화<당가십독(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