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진고독 청각백사> >
'벗어나야 한다!'
당연명의 오른팔에 스며든 존재, '청각(靑角)'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0| 기운.
낯설지 않았다.
이매망량이기 전에 독을 다루는 존재로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기운이다.
까마득한 옛날-
'누군가'에 의해 고독이 되었고 또 다른 고독들을 먹어치운 끝에 진고독이 된 그는 그야말로 엄청난 독기를 지닌 존재가 되었더랬다.
설령 그 용살갈의 독이라 해도 그의 독기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정도였으니, 그는 스스로 이매망량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를 진고독으로 만든 '누군가'는 그야말로 만독(萬毒)이 무용한 존재였다.
그건 바로 독요기(毒要氣)-그가 다루는 독특한 기운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해괴한 일이 있기 마련이라지만 설마하니 독을 먹이 삼는 기운이 있을 줄이야...!
독요기는 독기를 다루는 모든 존재에게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진고독으로 거듭난 그라고 해도 한낱 먹잇감에 불과할 뿐.
'누군가'- 다른 이들에게 무영객으로 불리던 그자는 방사들의 도움을 받아 이매망량인 그를 자신의 몸에 가두었다.
원래라면 미친 짓이다.
하나의 육신에는 하나의 혼백이 자리 잡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인 까닭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영(靈)의 격이 더 높은 이매망량을 버텨낼 수 없다. 육신을 빼앗긴단 의미다.
그러나 독요기에 의해 완전히 제압당한 그는 무영객의 육신을 빼앗기는커녕 필요할 때마다 독기를 착취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놀랍게도 무영객은 그가 뱉어낸 강력한 독기를 자신의 내공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역시 독요기의 공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래, 쉽게 말해 그는 무영객의 예비 단전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무영객은 그를 청각백사(靑角면弼 )줄여서 청각이라 불렀다. 원래도 뱀의 모습을 한 이매망량이었던 그는, 진고독이 된 후 푸른 뿔이 돋아나 있는 하얀 뱀의 형체를 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무영객은 사천당가라는 가문을 하나 세우고, 비밀리에 방사들과 함께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들을 없애고 다녔다. 사람과 이매망량을 가리지 않았다.
몇 번은 '용'이라는 족속들을 죽이기도 했다.
영물도, 이매망량도 아닌 용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재앙이었다. 영원에 가까운 세월을 사는 데다, 단신으로 작은 나라 하나를 멸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오랜 수면을 하는 습성이 아니었다면 세상은 이미 죽음으로 뒤덮였을 지도 몰랐다.
무영객은 늘 용들을 '하늘의 실수로 태어난 존재'라 불렀다.
이매망량이자 진고독인 청각백사는 아무래도 좋았다.
인세가 어찌되건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무영객의 천수가 다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천수가 다하기 전에 그가 살해당하기라도 하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진작 알아차렸다.
독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무영객의 무위가 하늘까지 닿아 있는 까닭이다.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마침내 끝이 왔다.
무영객의 천수가 다하기 직전에 이른 것이다.
드디어 해방되는 건가 싶었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수명이 다하기 전 무영객은 방사들을 불러 다시금 청각백사를 몸에서 떼어내고는 말했다.
-청각. 그간 네 공로가 작지 않으니 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강력한 이매망량인 너를 이대로 인세에 풀어둔다면 그것 역시 재앙에 준하는 일로 이어질 터. 고로 너를 봉(封)할 것인즉.
안에서 수양이나 하면 좋겠구나. 더 이상 살생을 저지르지 않아도 되도록. 그렇게 말하며 무영객은 마지막으로 청각백사의 독기를 거두어갔다.
뒤이어 방사들이 술법을 펼쳐 그를 봉인했다. 원래라면 당할 리 없는 수준의 술법이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독기를 빼앗긴 청각백사는 무력하게 당하고 말았다.
술법진 안에서는 제대로 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짙어져 가는 독기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이 지났다는 것만 짐작할뿐.
그러다 오늘.
청각백사는 갑작스레 봉인 술법진의 위력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궁금하지도, 알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건 이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 뿐.
그간 쌓인 기운이 있기에, 술법진이 절반쯤 해제되었을 때 청각백사는 강제로 술법을 찢고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깨달았다.
'...방사가 없다.'
술법을 다룰 수 있는 방사가 없다는 것은, 행여나 다시 봉인될 여지가 없다는 얘기였다.
보이는 것은 앳된 얼굴을 한 청년 하나- 실수건 뭐건 그가 봉인을 깨뜨린 모양이었다. 아주 기껍다고 생각하면서, 청각백사는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몸을 빼앗아 이것저것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이매망량으로서 사람의 혼백을 내쫓고 육신을 차지하면 그 기억 또한 읽어낼 수 있었다.
무슨 의도로 봉인 술법진을 해제한 것이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따위를 파악하고자 했다.
보아하니 그리 높은 성취를 지닌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청각백사는 스스럼없이 달려들 수 있었다. 청년이 폐맥은취라는 수법을 익히고 있음을 알아보지 못했다. 무영객의 독문무학 말이다.
아니, 사실 청각백사는 상대가 화경의 무인이라 해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오랜 세월 쌓인 독기가 아주 진했던 까닭이다. 그 짙은 독기가 힘의 원천이었으니까.
청년의 회피 몸놀림이 제법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이매망량인 그를 떨쳐낼 순 없었다. 도망치던 청년이 이내 마음을 바꿔먹었는지 손을 휘둘러 공격해왔고, 청각백사는 옳다구나 하며 청년의 장심을 통해 체내로 파고들었다.
직후에는 바로 독기를 뿜어냈다. 중독시켜 죽음에 이르게 할 요량으로. 어차피 기억만 긁어내고 버릴 셈이었으니 혼백이 달아나고 난 뒤 찰나의 시간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청년은 놀랍게도 독기를 버텨냈다. 썩어 문드러졌어야 할 오른팔이 그저 보랏빛으로 물드는 데 그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어깨 쪽 견정혈을 폐해 독기가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까지.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청년이 보여준 대처는 여러모로 기대 이상이었고, 또 괴이한 일이었다. 분명 느껴지는 성취는 그리 깊지 않아보였는데…?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내 그보다 더한 경악이 청각백사를 덮쳤던 것이다.
'이건...!'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 기운을.
그토록 두려워마지않았던 무영객의 독요기- 그것과 꼭 닮은 기운이 스멀스멀 접근해오고 있었다.
청각백사가 뿜어냈던 독기를 집어삼키면서.
****
'어이가 없군.'
당연명은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독기였다. 당가십독 중 삼독인 화룡호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견정혈을 차단하고 독요청광기를 끌어올리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당했을지도 몰랐다.
술법진에서 튀어나온, 이매망량으로 추정되는 녀석은 지금 당연명의 오른팔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들어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도망치려는 것일까.
"어림없다."
놈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면서, 당연명은 독요청광기로 오른팔을 완전히 감쌌다. 도주를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오른팔에 갇힌 녀석은 완전히 발광을 해대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당연명은 침착하게 독요청광기의 밀도를 높여갔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용린을 완성할 수 있겠는데.'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시시각각 불어나는 내공량이 어마어마했다. 대체 얼마만한 독기를 품고 있는 것일까. 당과를 조심스럽게 녹여먹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데, 오른팔을 빠져나가려 던 놈이 포기한 듯 움직임을 멈추고 말을 걸어왔다.
[잠깐!]
[네놈, 무영객과 무슨 관계냐...! 어찌 독요기를....]
"후손이다. 독요기가 아니라 독요청광기고."
[그놈의 명맥이 아직까지도 이어진단 말이냐.... 독요기건 독요청광기건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보단 일단 이걸 좀 멈춰봐라. 말로하자. 이러다 소멸당하겠다…!]
"말로 하자고...?"
당연명은 같잖다는 듯 되물었다. 놈이 정확히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의가 아니라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었다.
체내에 들어오자마자 독기를 뿜어댄 것만 봐도 그렇고.
머릿속으로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고 있는 놈이 어떠한 영적인 존재... 이매망량이라는 것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무영객이 말한 진고독이 놈이겠지. 십독(十毒)의 원천.
[그래...! 네가 독요기, 아니 독요청광기를 다룬다면 내 독기가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잘 알 거다. 네 선조인 무영객 또한 나와 상생을 도모했으니까…!]
"필요 없다."
[뭐...?]
청각백사는 멍청히 반문했다. 지금 이 애송이가 뭐라는 거지?
그가 지닌 독기는 천하에서 다시 찾기 힘들 정도의 극독이나 마찬가지였고, 이건 독요청광기를 다루는 자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약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였다. 심지어 이매망량이자 진고독인 청각백사가 지닌 독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차오르니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물이나 다름없을진대....
당연명 역시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지금 청각백사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이나 다르지 않겠지.
하지만 당연명은 굳이 후환을 남겨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애초에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몸속에 들어온 놈이다. 인심 좋게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유용하다고 해도 말이다. 더군다나 독이 아니라도 강해질 수단은 존재한다. 괜히 위험을 감수해가며 이매망량 따위에게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그리 생각한 당연명이 말했다.
"날 적대했던 놈을 살려주는 취미는 없어서."
[이런 미친...!]
청각백사는 욕지거리를 밸었다. 퇴로를 차단하듯 주변을 장악한 채 점차 강성해지는 독요청광기에서 당연명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수십 년을 넘게 예비 단전 노릇을 하다가 봉인되고, 또 수백 년에 달하는 오랜 세월을 견딘 끝에 간신히 자유를 찾는가했더니 자신을 봉인했던 놈의 후손을 만나 그 손에 소멸당하게 생긴 것이다...!
이매망량 중에 이토록 기구한 삶을 보낸 존재가 또 있을까.
[제발 믿어다오. 네가 독요청광기를 익혔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쭙잖은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 거다. 네게 도움을 줄 터이니, 이번 한번만....]
"혀가 길군. 그냥 영멸해라."
청각백사가 애원했지만 당연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미 마음을 정한 것이다. 놈을 없애기로.
어떤 구속이라도 씌울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당연명은 방사가 아니었다. 술법 따위에는 조예가 없었다. 검술이야 입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지만.
[안 돼.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청각백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순간적으로 강력한 독기를 몇 번이고 쏟아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독요 청광기는 만독을 포식하는 기운이었으므로.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저 먹잇감에 불과했다.
당연명의 오른팔은 미미하게 보랏빛으로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청각백사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기다리는 것이 이런 허무한 소멸이라니...?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날 방도는 오로지 당연명을 설득하는 것뿐이었다. 어떻게든 그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 매망량으로서 스스로 족쇄를 차는 것-
결단을 내린 청각백사가 힘겹게 말했다.
[...내가 네 식신(式神)이 되겠다. 그러니 제발 살려다오.]
< 72화<진고독 청각백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