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공동파(1)> >
드넓은 관도.
오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불현듯 그들 사이로 훅 끼치는 바람과 함께 두 인영이 스쳐 지나갔다.
"저길 좀 봐...! 방금 지나간 저 둘...."
"왜 그러나. 무인들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어서 걷기나 해. 갈 길이 멀어."
"아니, 도복을 입고 있는데."
"뭐? 정말이군...!"
걸음을 재촉하던 양민들이 놀란 시선을 던지며 수군댄다. 바람과 함께 지나간 두 사람은 황색 도복을 입은 채 신묘한 발재간을 내보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것이, 한눈에 봐도 고절한 경신법을 익힌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양민들이 놀란 것은 단순히 그런 발재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변 도처에 산적해 있는 사도 방파의 무인들은 으레 자랑하듯 무공을 내보이며 다닌다. 성취의 깊고 얕음을 구분할 만한 안목이 없을 뿐, 무인들이 경공을 펼치는 모습 자체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란 얘기다.
눈길을 끈 것은 그들의 행색이다. 도복을 걸치고, 기다란 검까지 패용하고 있다. 이 땅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차림새다.
이곳 사천은 명실상부 흑사련과 그 휘하 사도 방파들이 지배하는 땅이다. 당연히 흑사련주 유길준에 대한 민간의 관심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연유로 흑사련을 세우게 됐는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청성파一 한때 구파의 한 축이자, 사천의 대표적인 도가 방파였던 곳. 그 청성의 제자 하나가 벌인 일 때문에 청성은 물론이고 아미와 점창까지 엮여서 멸문당하지 않았던가. 당시 이십대에 불과했던 유길준이 유서 깊은 아홉 대방파 중 셋을 무너뜨린,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그렇게 청성이 있던 자리에 흑사련이 세워진 이후, 사천의 크고 작은 도문은 모조리 멸문지화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개중엔 청성의 속가 문파들도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는 도문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흑사련 휘하의 사도 방파들은 도복만 입고 있으면 어떻게든 청성과 연결 지어 죄를 물었다.
속셈이야 뻔했다. 사도 대종사나 다름없는 흑사련주의 눈에 들어 신공절학을 하사받겠다는 의도였겠지.
실제로 흑사련 창립 초기에 청성의 속가 문파를 참살한 것으로 확인된 몇몇에게는 유길준이 친히 상승무학을 그 자리에서 창안해 전수해주었다고 하니까.
어쨌건.
양민들의 수군거림을 뒤로 한 채 쏘아져 나가던 황색 도복 차림의 사내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사백. 조금만 더 가면 당가가 있는 성도입니다."
"..."
다른 중년 도사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은 표정이 심사가 복잡함을 말해주는 듯했다.
조금 기묘한 광경이다. 둘의 나이는 그리 차이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사백이라 부르고 있다. 어지간히 배분이 꼬이지 않고서야 있기 힘든 일이었다. 혹은 사백이라 불리는 이가 반로환동에라도 이르렀던가.
'낭패로군.'
침묵하는 사백一 태허를 일별하며 공동파 제자 현소가 그간의 여정을 되짚었다.
****
시작은 당가가 머무르던 공동산에 와서 죽음을 맞이한 삼백 무인의 시신을 태허가 살피면서부터였다. 그게 단 한 사람의 솜씨라고 말하면서, 태허는 대뜸 당가를 방문해봐야겠다고 했었다. 고절한 암기술에 드물게 감탄을 아끼지 않으면서.
그렇게 본파로 돌아가 장문인에게 사천으로의 출행을 청했고, 곧장 장문인 태청의 허락이 떨어졌다. 태청은 원래부터 사형인 태허가 하는 일이라면 두말 않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왔다. 태허가 화경에 이를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온 것이다.
현소에게는 태허를 수행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현소는 어릴 때부터 태허의 수발을 들어왔기에 일이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있었고.
현소는 사천행을 결심한 태허의 의중을 짐작했다. 발호하기 시작한 마교를 막는 것은 곤륜만으로는 불가한 일이다. 공동이 도와야 했다. 하지만 남쪽, 사천의 흑사련 때문에 공동 역시 본파의 전력을 다른 곳으로 빼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괜히 남의 집에 난 불을 끄러 갔다가 자신의 집을 홀라당 태워먹는 우를 범할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곤륜이 무너지게 그냥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곤륜을 무너뜨린 다음, 마교가 어디로 향할 지는 불을 보듯 뻔했기에.
이런 때에 당가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태허의 평소 지론에 따르면, 사파 놈들은 대저 머릿수만을 믿고 까부는 것들이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이 아니었다면 오합지졸에 불과했을 놈들이라고. 그러니 대량 살상에 적합한 암기술을 지닌 당가라면, 어쪄면 흑사련을 위시한 사천의 사도 세력들을 어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겠지.
아무튼 이번 사천행의 목적은 당가에 협조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완전히 사도 천하가 되어버린 사천에서 홀로 정도를 자처하는 무가- 그들에게 진정으로 가능성이 있다면, 마교의 일을 해결하고 부흥을 도울 참이었다.
그러나 현소는 회의적이었다. 사백인 태허가 공동산 참상의 현장에서 무얼 보았는진 모르겠지만, 당가에 힘이 있었다면 진작에 떨치고 일어서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회의와는 별개로, 현소는 출발 전부터 이번 사천행의 조짐이 영 좋지 않다 느꼈다. 왠지 꼭 복마검법을 펼질 일이 생길것만 같았던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도복이라도 벗고 다니자 태허에게 얘기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화경에 이른 그의 사백은 사문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었다. 사천의 사파 잡배들이 두려워서 공동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황색 도복을 벗자는 것이냐며,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말했다. 현소는 빠르게 단념했다. 태허가 고집을 꺾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래도 유람을 나온 것이 아니니, 서둘러 움직이자는 말에는 태허도 수긍을 했다. 둘은 경공을 펼쳐가며 남하했다. 도복 차림에 꽂히는 눈길들이 많았지만, 그들에 대한 소문이 여러 사도 방파들의 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빠르게 이동하면 되는 일인지라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그러다 터졌다.
간단히 요기나 하려고 들른 객점에서, 태허가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화경에 오른 이후 늘 태평한 모습을 보여 왔던 태허였음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사백. 왜 그러시는...."
"조용히."
태허가 바라보는 것은 한쪽에 앉아 있는 사내였다. 그는 고명이 푸짐하게 얹어져 있는 소면을 이리저리 젓가락질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싸구려 청주도 이미 몇 차례 기울인 듯했다. 현소는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심각한 얼굴로 태허가 말했다.
"...유가 놈인 것 같다."
"예? 설마 흑사련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기세를 갈무리하고 범인인 척 행세하고 있다만. 내 기감을 속일 순 없다."
화경에 이른 무인의 기감은 더없이 예리하다. 설사 같은 화경의 무인이 경지를 숨기더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이곳 사천에서 활보하는 화경의 무인이 흑사련주 말고 또 있기는 힘들 테니, 태허는 사내가 유길준일 거라 짐작했다.
"...그럼 일단 몸을 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백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는 흑사련주입니다. 괜한 마찰을 일으켜 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이미 저쪽도 내 존재를 눈치 챘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태허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내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는 현소 쪽으로 걸어왔다.
"호오. 그 도복. 공동인가? 들은 바 있다. 그나저나 조용히 지내는 것 같더니. 사천에는 무슨 일이지? 화경에 이른 무인까지 보내고.
귀중한 전력일 텐데... 혹시 본련에 볼일이 있나?"
"흑사련주...?"
"알면서 묻는군. 그래, 내가 유길준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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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소가 경악했다. 설마하며 물었는데, 눈앞의 사내가 긍정한 것이다. 그가 바로 사천무림의 지존이자, 사도 세력의 정점에 있는 흑사련주 유길준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소탈한 취미를 지니고 있다는 풍문은 들었지만....'
현소는 지나가듯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원래 흑도 뒷골목 출신이던 유길준은 흑사련주가 되어 온갖 산해진미를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올랐음에도 검소한 생활을 즐긴다고 했다. 그저 풍문에 불과하다 여겼거늘 오늘 이렇게 초라한 객점에서 싸구려 음식들을 먹는 모습을 보니 허언이 아닌 듯했다.
동시에 얄궂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드넓은 사천에서, 절대 마주쳐선 안 될 자를 마주하게 되다니....
그때 태허가 나섰다.
"흑사련에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데... 혼자인 건가? 수행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군."
"왜, 혼자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어디 한 수 섞어볼까?"
유길준이 실소하며 말했다. 태허를 만난 것은 그로서도 의외의 일이었다. 가끔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땐 이렇게 혼자 빠져나와 일탈을 즐기곤 했는데, 난데없이 화경에 이른 무인의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유길준은 마침 잘 되었다고 여겼다. 강자와 손속을 겨루는 것은 언제나 그에게 많은 영감을 가져다주는 까닭이다. 특히 구파라 불리는 정도 대방파의 무학에는 오랜 세월 이어진 만큼 깊이가 있어서, 그만의 사도 무학을 보강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도발적인 유길준의 말에 태허는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이래봬도 네 녀석의 곱절은 산 몸이다."
"맥락을 따라가기 힘들군. 내게 공대를 바라는 건가?"
"살아온 세월이 다르다는 얘기다. 화경 고수끼리의 결전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가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내공량이 끼지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게다가 본파의 심법으로 쌓아올린 내력은 너희 사마의 무학을 상대로 압도적인 위력을 발할 터."
"공동은 오만하군."
"뭐라...?"
"본좌가 사도 무학을 익혔다 하여, 정도- 불문이나 도가 무학을 익힌 네놈들의 내력에 속절없이 밀릴 것이라 여기는 건가? 이미 구파중 셋이 내 손에 무너졌던 게 벌써 십 년도 전의 일이다. 과연 공동이라고 다를까?"
"겨루어 보면 알 일이다. 나가지. 피차 민초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달갑지 않을 테니."
유길준은 스윽 현소와 태허의 사이를 지나갔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쏟아져도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지 않고서야 보이기 힘든 행동.
"따라오라. 적당히 손속을 겨룰 만한 장소가 있으니."
두렵다면 도주해도 쫓진 않겠다- 그렇게 말하며 유길준이 획 몸을 날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경신법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현소는 곧장 입을 열었다. 태허가 땅을 박차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사백. 안됩 니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말리지 마라. 저런 말을 듣고 어찌 참으란 말이냐? 유길준, 저놈에게 공동의 무학이 천하제일임을 알려주어야겠다. 그리고 이건 기회다. 여기서 놈을 격살한다면 사천의 사파들은 금세 지리멸렬하게 될 것인즉."
"..."
태허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호위 하나 없이 나선 것으로 보이는 흑사련주다. 지금이 아니면 제거할 기회를 찾기 힘들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정말로 태허가 유길준을 꺾기라도 한다면 공동파의 위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치솟을 터...!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백. 다른 함정이 있을 지도 모르니."
"아무렴. 이 사백을 믿어라."
결국 현소와 태허도 경공을 펼쳐 유길준의 뒤를 따랐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 풍경이 저 뒤로 밀려났지만, 한 번 벌어진 거리는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유길준의 신법 성취가 대단하다는 방증이다.
그렇게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고서, 유길준이 내려선 곳은 인적이 드문 공터였다.
주변에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일까.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유길준은 정말로 수하 없이 홀몸으로 온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대단한 자신감.
"그럼, 시작하지."
후욱!
순식간에 취기를 몸 밖으로 배출하면서, 유길준이 말했고.
말없이 태허가 스르릉 검을 뽑아들었다.
그렇게 화경 고수끼리의 일전이 성사됐다.
< 74화<공동파(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