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75화 (75/134)

< 75화<공동파(2)> >

흑사련주는 이미 구파 중 셋을 무너뜨린 강자 중의 강자였다.

청성과 아미, 점창.

지금은 퇴색된 이름들이지만, 그들은 공동과 함께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왔던 무맥이다. 결코 그 저력이 얕지 않았다. 그럼에도 같은 해에 모조리 멸문당하고 말았으니, 흑사련주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만했다. 심지어 그때 흑사련은 지금처럼 휘하에 많은 세력을 거느린 것도 아니었다. 머릿수로는 오히려 세 개 문파에 비해 열세였다는 뜻이다. 온전히 유길준과, 그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흑사파 초기 인물들 몇몇만으로 이룬 일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십오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흑사련주 유길준이 더더욱 강해져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럼에도 태허가 자신 있게 나선 것은, 바로 공동 무학의 특징 때문이었다.

구파라 일컬어지던 산속 대방파들은 도문, 혹은 불문의 내가진기를 바탕으로 무공을 연성한 까닭에 어느 정도 파사(破邪)의 공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개중 세인들이 단연코 으뜸으로 치는 것은 태산북두 소림이었지만, 사실 소림보다 더욱 파사의 공능을 구현하는데 집착해온 방파가 둘 있었으니, 바로 곤륜과 공동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교가 중원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두 방파가 위치한 까닭이다. 다른 방파들은 평생 한 번 접하기도 힘든 마도 무인들을, 곤륜과 공동은 일상적으로 상대해야 했다. 자연히 무학에 깃든 파사의 공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파사의 공능은 마도 무학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었기에.

다만 곤륜은 어느 순간부터 파사의 공능보다는 실전적인 무학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교도들을 상대로 파사의 공능을 제대로 휘두르려면 정도 이상의 성취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나 지난한 일이었던 것이다. 성취가 깊어지기도 전에 제자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니, 곤륜의 입장에서는 일단 제자들의 생존을 도모하는 게 우선이었으리라.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실전적인 무학을 중시하게 된 곤륜은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일상적으로 싸워 온 마교를 닮게 되었다. 도사임에도 살초를 펼치길 서슴지 않았으며, 기질 또한 거칠고 패도적이게 변한 것이다. 삼청신공(드淸神功)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정순한 내력과 입고 있는 도복만이, 그들이 도문 제자라는 것을 방증할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당대 곤륜파 장문의 별호가 마선(魔仙)일까一

한편.

곤륜보다는 거리상으로 한결 여유가 있는 편이었던 공동은 오랜 세월 자파 무학에 있어 파사의 공능을 강화하는 데 매달려왔다. 진정한 멸마(減魔)의 길은 거기에 있다고 굳게 믿은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공동파 최강의 검 법인 복마검법(伏魔劍法)이었으니…!

이름부터가 복마(伏魔)一 마를 굴복케 한다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상승의 무학. 단순히 검초니 검식이니 하는 한계를 넘어선 검법이다. 원래도 상서로운 도가 진기를 극한으로 증폭시켜 일검에 담아낸다. 그야말로 사마의 무리에 대해서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무공이었다.

다만 복마검법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하기 위해서는 익힌 자가 화경에 이르러야 했다. 진기 증폭의 공능이 결국 의념에 달린 까닭이다. 넓게 보면 복마검법 또한 강기 무학이나 다름없었다.

공동은 자파의 모든 제자들에게 복마검법을 숙지하도록 만들었다. 미약한 성취를 지닌 이라도 복마검법을 펼지게 되면 제법 효과가 있을 정도로 파사의 공능을 구현할 수 있었기에. 이 정도면 신공절학이라 칭할 만하지 않을까.

아무튼 현소가 승산이 있다고 여긴 것은 바로 이 복마검법때문이었다.

사백인 태허는 화경에 이르러, 복마검법에 깃든 진기 증폭의 공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원래도 강력한 파사의 힘을 지닌 공동의 혼원일기공(混元一氣功)을 극한으로 증폭시켜 일검에 담아 내지르면一 제아무리 흑사련주라 해도 방도가 없지 않을까.

그의 무학은 사(邪)一 그릇됨에 기반하고 있지 않나.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의 무학은 분명 정순하지 않았다. 제대로 한 층 한 층 쌓아올린 게 아니라, 제멋대로 여러 무학의 이점만을 취해 난잡하게 이어붙인 까닭이다. 물론 이것도 그가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났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사도(邪道)가 정(正)이 아닌 이유가 무엇일까.

제대로 과정을 밟지 않고 과실만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마땅한 노력 없이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유혹적이다. 그렇기에 사도를 걷는 이들이 많은 거겠지. 그러나 그렇게 이룰 수 있는 성취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느린 것 같지만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씩 정진해 나아가는 것만이 결국 극(極)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니一

하지만 흑사련주 유길준은 달랐다.

과실만을 취하면서도 극에 이르렀다. 지극히 효율적으로.

본래 쉽사리 쌓아올린 무학은 그만큼 쉽사리 무너지기 마련이었는데, 유길준은 사천 무림의 온갖 무학을 뜯어보고 궁구하면서 스스로의 무학을 더없이 튼튼하게 보강했다. 그가 지닌 대종사의 자질은 상대의 무학을 순식간에 간파하고, 그중에 쓸만한 이치만을 추려 터득할 수 있게 했다.

태허의 복마검법을 대하면서, 유길준은 웃었다.

****

'생각보다 더 괴물 같은 자였다. 흑사련주는....'

현소는 당시의 일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태허의 복마검법은 실로 대단했다. 공동파 심법 혼원일기공으로부터 비롯된 상서로운 진기가 증폭에 증폭을 거듭했다. 어지간한 사마의 기운은 부딪치자마자 곧장 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처음 몇 수에서는 유길준이 열세였다.

아니, 열세인 것처럼 보였다. 그의 피처럼 붉은 선홍빛 진기가 태허의 검법이 펼쳐질 때마다 속절없이 밀려났던 것이다.

그러나 유길준에게서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 렸다.

'호오. 그런 식인가? 이건 또 새롭군.'

이를 악문 태허의 검은 닿을 듯 말 듯 흑사련주에게 닿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태허가 펼쳐내는 복마검법을 한동안 관찰하던 유길준은 순간 신법을 펼쳐 뒤로 흘쩍 물러나더니 검지를 들어보였다.

그의 검지 끝에 선홍빛 기운이 점처럼 응축된다. 지공(指功)이라 불리는 무공의 한 갈래였다. 오만한 성정의 내가기공 고수들이나 쓰는 수법이었는데, 놀라운 것은 붉은 점으로 압축된 선홍빛 진기에서 갑자기 공기를 떨어 울릴 정도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단순히 공명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거력을 담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태허와 현소는 경악했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끝도 없이 증폭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경악하는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힘이 증폭되는 방식이 너무나도 익숙한 까닭이었다.

공동파 최강검법인 복마검법의 그것과 완전히 같다...!

'고맙군.'

그렇게 말하면서, 유길준은 지공을 쏘아냈다. 거력을 담은 핏빛 구슬이 찰나지간에 태허에게 이르렀다. 회피 따위는 불가능했기에, 태허는 온전히 그 공격을 감당해야 했다.

복마검법으로 증폭된 혼원일기공의 상서로운 진기가 태허의 검에서 쏟아져 나왔지만, 사이한 느낌을 풍겨대는 핏빛 구슬의 진행을 겨우 막는 정도가 다였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이토록 강력한 사공 진기라니...!

결국 태허는 내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진기를 증폭시키고서야 핏빛 구슬을 동강낼 수 있었고, 그 광경을 기꺼운 기색으로 지켜보던 흑사련주가 입을 열었다.

'공동에게 커다란 선물을 받았군. 복마검법이라 했지. 원류를 존중하는 뜻에서, 본좌는 이걸 복정신공(伏正神功)이라 부르겠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사문의 무학을 간파당하고, 그 이치마저 빼앗겨 적의 새로운 무학 창안에 도움이 됐다一 태허가 느낀 모멸감과 좌절감은 엄청났다.

순간적으로 도진 내상으로 컥, 하고 피를 뿜어낼 정도였다.

'이만하면 너희 둘의 목숨 값으로는 차고 넘치겠다?

가라. 살려주마一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서 유길준은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현소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지독한 절망감을 동시에 느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다란 절벽이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멀어지고 있음에도 그 높이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그렇게 흑사련주 유길준과 태허의 일전은 짧게 끝났지만, 그 여파는 멀리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사도 방파의 무인들이 적지 않았다.

'저쪽에서 온 녀석들이 련주의 용안을 뵈었다는군. 용케 알아본 놈이 있었던 모양이야.'

'하면, 그 기파는 역시 련주께서 일으키신 거로군. 하기야 그만한 무위를 보일 수 있는 존재가 달리 있을 리 없지.'

'그렇담, 저 도사 놈들이 감히 련주께 무례를 범했다는 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지. 사천 땅에서 도복을 입고 돌아다니다니. 청성의 일을 모르는 건지.'

'그런데 육파 중 어느 방파가 황색 도복을 입지 않았던가? 분명 들은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군.'

'육파건 뭐건 련주의 한 수를 받아낸 것으로 보여. 분명 제 놈들 방파에서도 제법 요직에 있는 놈이겠지. 생포하면 금자를 궤짝으로 뜯어낼 수 있을 거야.'

'어찌면 품속에 무공비급이라도 숨겨놓지 않았을까.'

'한 놈의 패색이 몹시도 짙어. 합공하면 승산은 충분해.'

탐욕스러운 사파 무인들은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

현소는 내상을 입은 사백을 대신해 검을 휘둘러야 했다. 자짓 여기서 태허의 내상이 더 깊어지기라도 한다면 요양에 상당한 세월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원래의 무위를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을 향해서 펼쳐진 복마검법은, 제 위력을 더없이 발휘했다. 현소와 검을 맞댄 이들은 자신들의 공력이 허망하게 스러지는 것에 경악하며 허무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사파 무인들의 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죽어가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그들의 탐욕은 더욱 짙어졌다. 곧 두 도사들의 기력이 다할 것을 짐작한 것이다.

'지친 게 분명해! 방금 비틀거리는 것을 내가 봤어!'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돼! 황금과 비급을 생각해봐라.'

'팔 하나쯤은 떨어뜨리더라도 죽이지는 마. 생포해야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으니.'

흥이 나서 압박해오는 놈들에 현소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사파 잡배 놈들이 감히 대 공동파를 다 잡은 물고기 취급하며 우롱하고 있었다.

'이런 건방진 놈들이...!'

현소는 욕지거리를 뱉었지만 결국 도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수가 많다지만 이름도 없는 사파 놈들에게 쫒기는 상황이다. 치욕스럽기 짝이 없다. 하나, 이런 곳에서 사파 잡배들에게 객사하는 것이야말로 비할 바 없는 치욕이 될 터였다. 자존심은 접어두고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다시 공동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사천 깊숙이 들어와 버린 까닭이다.

선택지는 하나였다. 사천 땅에서 유일하게 정도를 걷는 무문, 사천당가에 도움을 청하는 것一 그래서 태허와 현소는 성도로 향한 참이었다. 애초에 이번 사천행의 목적지가 거기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들을 추적하는 사파 무인들도 곧 행선지를 알아차렸다.

'도사 놈들. 성도로 갈 셈이군.'

'성도? 당가에 숨어들려는 것이렷다.'

'제 무덤을 파는군. 당가 역시 성도에 고립되어 있을진대.'

'시간이라도 벌어보자는 것이겄I지. 일단 쫒아라...!'

쫒고 쫒기는 추격전 끝에, 태허와 현소는 겨우 성도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웬 절세미청년을 마주했다. 한눈에 봐도 명가의 자제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헌앙한 사내였는데, 그가 태허와 현소를 보고는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사천에 도문이 있었나...?"

< 75화<공동파(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