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공동파(4)> >
암기 회수 무학 연기륜으로 우모침을 거두어들인 당연명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정도로도 사람이 죽는군.'
솔직히 예상 외였다. 상대는 제법 강대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자였으니까. 원래 우모침에 발린 독은 그런 이에게 통할 정도로 치명적이지 않았다. 창복독- 음식 따위에나 섞어 쓰는, 그저 복통을 유발하는 정도의 독이었으니까. 우모침에 묻은 양으로는 범인에게도 해를 끼치기 어렵다.
하지만, 청각의 독기를 거기에 싣자 완전히 얘기가 달라졌다. 미량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극독이 된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 몸의 독기를 버틸 수 있는 자는 천하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청각이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지금이야 당연명의 식신 신세였지만, 원래 그가 어떤 존재인가. 독을 지닌 이매망량 수백을 잡아먹고 진고독으로 거듭난 존재다. 세상 그 무엇보다 지독한 독기를 품고 있다는 얘기다. 오죽했으면 당가십독 중에서도 제일이라 하여 일독(一毒)으로 칭했을까.
그러한 청각의 독기가 스몄으니, 한 방울도 되지 않는다 한들 죽음에 이를 밖에.
한편.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사파 무인들이 떠듬떠듬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목영궁의 궁주께서, 죽었다...? 그것도 단 한 수에."
"...어이가 없군. 이리 허망하게 가실 분이 아닌데."
"쓰러지고 불과 한두 호흡 만에 숨이 끊어졌어. 필시 엄청난 극독을 쓴 거다...!"
"혹시 출수를 본 사람...?"
"궁주께서도 당하셨는데, 우리 중에 본 자가 있을 리가. 기감에도 잡히지 않았는데."
"그보다 저절로 침이 뽑혀 나간 거, 설마 허공섭물은 아니겠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연배를 봐. 많아봐야 약관일 터."
"연배를 떠나서 당가에 저런 실력자가 있었나. 용모 때문에라도 소문이 안 날 수가 없겠는데."
"닥쳐라. 멍청이들아. 본궁 궁주께서 운명하셨거늘...!"
목영궁의 궁도들로 보이는 이들이 분통을 터뜨린다.
그들을 포함해 엉거주춤 서 있는 사파 무인들은 하나같이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영궁이라면 흑사련 휘하 사파들 중에서도 제법 강성한 곳이었던 데다가 특히나 궁주인 장태천은 온갖 영약을 마구잡이로 복용하여 깊은 내공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인물인 까닭이었다. 그는 목소리도 크고 오지랖도 넓어 남의 일에 사사건건 끼어들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이번에도 도주하는 태허와 현소를 발견하고는 제자들을 이끌고 합세한 마당이었다. 행여나 비급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면서. 설마하니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은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터다.
"허... 저자를 이리도 간단하게."
현소 또한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당가가 한때 독과 암기의 종주이자, 사천제일가로 불렸던 것은 알고 있었다. 쇠락했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 저력은 있다고 보는 것이 올겠지. 하지만 장태천 정도 되는 강자를 한 수에 절명시킬 줄이야...!
애초에 현소가 도주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장태천의 존재였다. 사파 무인들의 머릿수도 부담이 됐지만, 그보다는 장태천과 같은 이를 손해 없이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소가 살아온 세월의 절반이나 살았을까 싶은 젊은 청년이 간단하게 처리했다. 새삼 현소는 독과 암기가 지닌 가능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어쪄면 사백의 의중처럼 당가가 공동이 처한 현 상황에 대한 타개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
목영궁 궁도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노성을 터뜨렸다.
"너! 이 분이 누구신지 알고 감히 손을 쓴 것이냐...!"
그간 사천에서 당가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흑사련주의 명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가가 '선'을 넘지 않았던 까닭이 컸다. 외부 활동 대부분을 중단한 채, 그저 성도에 틀어박혀 지내왔으니까. 다른 사도 방파를 먼저 공격하는 일이 없었다. 숨죽여 지내야만 하는 처지를 자각하고 있는 듯이.
그런데 조금 전 벌어진 사태는 저쪽- 당가의 후기지수로 보이는 청년의 선공으로 인한 것이었다. 명백히 '선'을 넘은 것이다. 이 일을 빌미로 목영궁이 다른 방파들을 모아 당가를 칠 수도 있었다. 아직 어려서 천지분간을 못하는 것일까. 스스로 가문을 위기에 몰아넣었음이 분명한데도 미청년의 안색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아느냔 말이다. 이건 우리 목영궁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선전포고라-"
미청년, 당연명이 목영궁 궁도의 말을 잘랐다.
"이 도사 분들은 본가의 객들이시다. 그리고 여긴 본가의 영역인 성도고. 너희들은 수백에 달하는 인원으로 객들을 위협하며 이곳까지 쫒아온 무뢰한 아닌가. 더군다나 먼저 영역을 침범하기까지 했으니 선전포고를 한 것은 네놈들 쪽이라 봐야겠지."
"무슨 궤변을...."
"본보기 삼아 제일 시끄러운 한 놈을 죽인 것인데 계속 떠드는군. 그리고 고작해야 일초지적도 되지 않는 놈이 누군지 내가 알아야하나?"
목영궁 궁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할 줄이야. 궁주인 장태천의 목숨의 무게를 따지고 들기도 애매했다.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가벼운 한 수에 당해 죽은 게 사실이 니까.
물론 그의 생각처럼 가벼운 한 수는 아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당연명이 쏘아내는 우모침을 피할 수 있는 것은 태허뿐이었으니까.
당연명이 전면을 가득 채운 사파 무인들 백수십 명을 주욱 훑어보며 말했다.
"선택해라. 이대로 물러날 건지. 아니면 덤빌 건지. 객들께서 무사하시니 한 번은 아량을 베풀어 주마. 물러난다면 더 문제 삼지 않겠다."
"...허장성세도 그쯤 해라. 다른 지원 병력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설마하니 네놈 혼자 이만한 인원을 상대하기라도 할 셈이냐?"
"못할 건 없지."
"하...! 네가 무슨 장판파의 익덕(장비)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네놈의 암기술이 신묘하다 한들 한계는 있을 것이다. 수적 열세를 어찌 극복할 셈인지 모르겠군."
"네놈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나? 그나저나 혀가 참 길군."
당연명의 말에 사파 무인들은 모두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무얼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상대의 지나친 자신감이 썩 보기 좋지 않았다.
"허. 어린놈의 입담이...."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연장자로서 마땅히 훈육을 해야 도리가 아닐까."
"느껴지는 기세는 별 것 없어. 오히려 뒤의 도사들이 더 성취가 깊어 보이는군."
"요컨대, 암기만 조심하면 된다는 거지. 극독이 발려 있을 테니까. 다들 안법을 한껏 끌어 올려라. 눈먼 암기에 목숨을 잃으면 그만한 개죽음이 또 없을 거다."
"잘생긴 얼굴 가죽을 벗겨내자. 면구로 만들면 가격이 꽤 나갈 듯한데."
"일시에 덤벼들면 된다. 제깟 놈이 아무리 손이 빨라도 일백이 넘는 인원을 한 번에 당할 수는 없을 터."
낮게 수군거리던 사파 무사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말에서 용기를 얻은 듯 슬금슬금 간격을 좁혀왔다.
사실 이대로 물러나는 일은 어차피 있을 수 없었다.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성도의 양민들이 도처에 널린 까닭이었다.
고작 서너 명의 인원을 당하지 못해 이백 가까운 인원이 물러났다는 얘기가 사천 전역에 돌면 그야말로 개망신이었다.
"마음을 정했나 보군."
"쳐라!!"
누군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사파 무사들이 각자 경공을 펼치며 짓쳐들어오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지축이 뒤흔들린다. 일부러 진각을 거세게 밟는 이들이 많았다. 위압감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무림 세력 간의 집단 전투에서 종종 쓰이곤 하는 방법이었다. 작은 변수 하나가 커다란 틈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
또한 마냥 일직선으로 쏘아져 오는 게 아니라 부채꼴로 산개하는 것이 암기술을 염두에 둔 움직임으로 보였다.
당연명은 그 광경을 한눈에 담으면서 중얼거렸다. 가끔은 검을 쓰고 싶어지는군.
살기의 권역으로 움직임을 제한한 후에, 엿가락처럼 길게 뽑아낸 검기를 좌에서 우로 휘두르면 끝나겠지-
[뭐?]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청각이 되물었지만.
당연명은 대답하지 않고 품속 창복독이 든 독병에 청각의 독기를 흘려 넣은 뒤, 우모침을 한 다발 챙겨 끄트머리만 푸욱 찍어 바른 다음 허공으로 내던졌다.
후욱- 하늘로 치솟는 수백 개의 세침류 암기들.
경공을 펼쳐 접근해오면서, 사파 무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 암기를 어디다 던지는 거지?
그러면서도 혹시나 몰라 위쪽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워낙에 가는 세침들이라 쉽사리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안법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였음에도.
오직 당연명만이 하늘 높이 치솟은 우모침들을 낱낱이 인식하고 있었다. 감각도 주사망역 덕분이다. 폐맥은취로 인해 주사망역의 범위에 한계가 있긴 했지만, 우모침들을 감지하는 데는 큰 어려음이 없었다.
"별 것 아니다. 상식적으로 저리 던진 암기를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말이 옳아.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어보려는 수작일 터...!"
잠시 경계하며 느려졌던 사파 무인들이 다시금 경공 속도를 올릴 때였다.
당연명이 우모침 다발을 던졌던 오른손을 가볍게 감아쥐며 중얼거렸다.
'낙(落 ).'
무언가 불길함을 감지한 이들이 먼저 하늘을 쳐다본다.
"어?"
*****
"저, 저거...."
"왜...?"
다른 이들도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는 이미 수백 개의 우모침들이 그 끝을 바로 세운 채 낙하하고 있었다. 빗방울마냥 쾌속하게 떨어지는 세침류 암기의 향연...!
"...모두 피해."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우모침우가 지상에 강하했다.
피비비비비비비 빅一!
순식간이었다. 수십의 목숨이 사라지는 것은.
우모침이 하나라도 꽂힌 이들은 목영궁주 장태천이 그랬던 것처럼 힘없이 쓰러지더니 눈깔을 뒤집고 끅끅대다가 이내 숨이 끊어졌다. 길어야 세 호흡 안에 명을 다한다. 간발의 차이로 우모침을 피해낸, 아니 우모침이 비껴간 이들은 경악과 안도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죽음이 목덜미를 쓸고 간 기분이 이럴까.
"이런 미친."
"지금, 이게 현실인가...?"
"...한 수에 몇 명이 당한 거지."
"저기, 놈이 또 뭔가를 던진다. 조심해!"
당연명은 우모침을 한 다발만 들고 다니지 않았다. 몹시 유용한데다가, 부피나 무게마저 작고 적은 우모침이니 항시 서너 다발은 품에 챙기고 있었다.
'낙(落)'
그렇게 또 한 번 우모침의 비가 지상에 떨어졌고, 역시나 수십의 사파 무인들이 허망하게 죽어나갔다. 살아남은 이들의 눈에 서서히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단 두 수만에 전력의 절반 이상이 깎여 나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공할 암기 무학이었고, 또 끔찍한 극독이었다. 그냥 살짝 찔리기만 해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형국 아닌가.
비교적 후열에 있던 이들은 더 다가오기를 망설였고, 선두에 있던 이들은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병장기를 휘두르며 당연명에게 접근했다. 가까이 접근하면 투척 암기술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었으니까.
당연명은 그들이 접근해오거나 말거나 연기륜을 이용해 흩뿌려진 우모침들을 회수했다. 돌아오는 우모침에 재수 없게 스쳐서 쓰러지는 몇몇이 또 있었다.
"죽어라. 놈!"
가장 먼저 당연명에게 달은 이는 방천화극을 닮은 병장기를 내질렀는데, 거기엔 푸르스름한 창기(槍氣)가 어려 있었다.
사파 잡배 치고는 꽤나 순정한 기운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당연명이 창날을 잡아갔다.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사파 무인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이걸 맨손으로 잡겠다고...?
< 77화<공동파(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