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공동파(5)> >
공수입백인(空手A白刀)이라는 기예가 있다.
상대가 전력을 다해 내지르는 병장기의 날을 맨손으로 잡아 채는 수법을 뜻했는데, 뛰어난 안법 성취를 이루어야 함은 물론이고 내력을 통해 강화한 완력이 상대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어야 가능한 기예였다.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단지 두 손가락만으로 공수입백인을 선보이기도 했다. 스스로의 실력을 과시하거나, 상대에게 실력의 격차를 체감케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보통의 병장기일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날붙이에 검기나 도기 따위가 씌워지는 순간,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굳이 예리하게 벼려진 날 부분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의 예기를 띄게 되는 까닭이다.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베여 나간다. 그런 걸 맨손으로 잡는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수기(手氣)로 손가락을 보호한다면 모를까.
그러나 지금 창기로 둘러쳐진 방천화극의 날을 잡아가는 당연명의 손가락에서는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수기를 일으켰다면 필연적으로 어떤 빛무리나 희미한 기운을 동반했을 텐데-
'건방진 놈. 오만이 네 목숨을 앗아가는 꼴이다.'
공수입백인은 한참 하수를 상대로나 펼치는 기예였기에, 사파 무인은 모멸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대로 손가락을 잘라내고 목에 구멍을 뚫어주마...!
그렇게 찰나의 순간이 흐르고.
당연명의 손이 방천화극의 날에 달았을 때였다.
과직!
"!?"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결과에 사파 무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당연명의 손가락은 아무렇지 않게 창날에 서린 기운, 창기를 과지직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창기에는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쇠까지 자를 수 있는 예리한 기운이 피륙으로 된 손가락을 잘라내기는커녕 살갗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날이 잡힌 방천화극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물론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연명의 육신 전체에 둘러처져 있는 호신강기 용린 덕분이었다. 원래 은은하게 새어나오던 진녹색 광채를 당연명이 통제하고 있었기에 그저 맨몸으로 보이는 것일 뿐, 사실은 강기마저 막을 수 있는 절세 갑주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설령 창강(槍至)이라 해도 용린을 두른 당연명의 손을 어찌하기 힘들 텐데, 고작 창기 따위가 상처를 입힐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순식간에 방천화극의 창날을 보호하던 기운이 스러지고, 당연명은 거기에 곧장 파(破)의 묘리를 실은 진기를 흘려 넣었다.
찌저정一!
당연명이 손가락으로 잡은 부분을 기점으로, 창날에 수십 개의 실금이 번져 나가더니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마치 자기(蓋器)가 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광경.
사파 무인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단순히 날붙이를 부러뜨리는 것쯤이야 웬만큼 내가기공을 익힌 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힘을 주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이렇듯 쇠로 된 무기를 잘게 부수는 것은 높은 수준의 내력운용이 뒷받침되었음을 의미했다.
아직 약관도 되어보이지 않는 놈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그러나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고, 공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사파 무인은 방천화극을 놓고 재빨리 주먹을 휘둘러갔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무인들도 각자 병장기를 꼬나쥔 채 쾌속하게 접근해왔다.
그런 와중에도.
당연명은 짓쳐들어오는 이들에게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떨어져 내리는 철 조각들을 향해 손을 뻗을 뿐. 무얼 하려는 것일까.
지켜보는 이들. 특히 공동파 현소는 당연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으로 인식했다.
"소가주...!"
위험하오一 라고 말하며 현소가 다급히 튀어나가려던 순간.
푸화악一!!
난데없이 거센 기류가 생성됐다. 바로 당연명의 손바닥에서였다. 뻗은 팔의 옷자락이 팔꿈치까지 파라락 말려 올라가고 머리칼마저 강풍을 정면으로 대한 듯 휘리릭 넘어간다. 그 정도로 강력한 기파의 회오리였다.
'휘돌아라.'
당연명은 장심을 통해 산(散)과 파(破)의 묘리를 실은 기파를 온갖 방향으로 발산하는 중이었다. 다만 적당한 영역을 한정해서 그 안에서만 휘돌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파의 회오리는 커다랗진 않았지만 몹시 강맹했다. 떨어지던 쇳조각들의 하강을 순식간에 멈출정도로.
잘게 부서져 더없이 날카롭고 가벼워진 철편들은 이내 새로운 기류에 편승했다. 제각각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휘돌며 가속한다.
소가주 당연명이 창안한 또 다른 암기무학一 철편표가 드디어 세상에 현현한 것이다. 물론 철편표를 시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전에 철편표를 본 이들은 모조리 공동산의 고혼이 된 후였다.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뭐냐. 이 풍압은...!"
"기파로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내력운용이 몹시 고절해!"
"그보다 저 암기무학, 왠지 익숙하지 않나? 암기의 회오리라니...."
"설마 만천화우를 말하고 싶은 건가?"
다가서던 이들은 놀라 헛숨을 들이켜고, 지켜보던 이들은 온갖 추측을 단숨에 쏟아내며 평한다.
당연명은 그저 손을 들어올릴 뿐이었다. 철편의 회오리 역시 당연명의 장심을 따라 이동한다.
그렇게 철편표와 방천화극을 휘둘렀던 사파 무인이 겹쳐지는 순간.
프스스슷ㅡ
순식간에 옷자락이 찢어지고, 살갗에서 핏물이 튀어 오른다. 철편표 안에 갇힌 사파 무인의 신형이 시뻘건 넝마 조각으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한 호흡一 게다가 마침 그와 일직선상에 있던 또 다른 무인 역시 금방 비슷한 몰골이 되었다.
둘은 제대로 된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몸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피분수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과다한 출혈이 원인이 아닐까.
당연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접근해오던 이들에게 붉어진 철편표를 휘둘렀다. 기껏해야 병장기에 검기 따위나 씌을 줄 알던 이들은 철편표를 막아내지 못했다. 전방위에서 파고드는 날카로운 쇳조각들을 모조리 막아내기에는 그들의 수준이 일천한 까닭에. 몇 번 검격을 쏟아내며 저항하던 이들도 금세 핏물과 비명을 함께 토해내며 죽어갈 뿐이었다.
약간 거리가 있는 이들 중에는 몸을 돌리고 경공을 펼쳐 도주하려는 자들도 있었지만, 어느새 그들의 뒷목에는 우모침이 꽂혀 달랑거리고 있었다. 안법 시류안으로 볼 수 있는 투로로 던져냈기에 당연히 필중(必中)이다.
삽시간이었다. 당연명의 근거리에 있던 이들이 모조리 죽어나간 것은.
"...한 마리 늑대같군. 마치 양떼를 휘젓는 모습을 본 듯해."
"당가에 저런 인재가 있었다니...."
"아까 저 도사가 말하는 걸 들었네. 분명 소가주라고 칭했지. 그렇담 저 미청년이 근래 소문이 자자한 당가의 새 작은 주인인가...?"
"당가 암기무학의 진면목을 목도한 듯하군. 대량살상에 특화된 기예 말일세...!"
"잔혹한 무학이야. 도륙(層鐵)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더군."
구경하던 성도 양민들이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주르륵 감상들을 읊는다. 양민들이라 해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싯적에 무관을 전전하며 대방파에 입문하기 위해 애썼던 이도 있었고, 이러한 구경거리를 대비해서 간단한 안법을 익힌 이도 있었다.
제법 준수한 안목과 맛깔나는 입담을 가진 이들은 특히 호사가(好事家)라 하여, 자신이 본 것들을 적당히 각색하여 민간에 퍼뜨리곤 했다. 그렇게 무림의 소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명한 강호인들의 별호는 이 과정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현듯 누군가 말했다.
"0| 정도면, 암독룡(暗毒龍)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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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납니다. 사백. 저는 암기와 독이 이토록 무서운지 몰랐습니다."
현소가 말했다.
이백에 가까운 사파 무인들이 몰살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당가의 소가주 당연명은, 붉은 회오리를 손에 달고 귀신 같은 신법으로 적들에게 접근한 후 이리저리 손을 휘둘러댔다. 파리를 잡듯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한 번 손을 내저을 때마다 피투성이가 되는 시신이 몇 구씩 생겨났다. 간혹 우모침을 던져가면서, 몇 번 반복하자 더 이상 서 있는 자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상대로 백수십에 달하는 인원이 전멸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수법으로 우모침을 회수한 뒤 저벅저벅 걸어 돌아오는 당연명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태허가 중얼거렸다.
"저자다."
"예?"
"공동산에 있던 시신들. 그게 단 한 사람의 소행이라고 했지 않느냐."
"아...!"
현소는 태허의 말을 듣고서야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우모침에 당한 시신들의 모습이 공동산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엔 아무리 암기와 독을 썼다 하더라도 삼백의 인원을 홀로 상대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이렇게 직접 보고나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백 가까운 인원을 몰살하고도 여유 있어 보이는 당연명의 표정을 보니 더욱 그랬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암기 무학은 내공 소모도 적은 것일까.
'어쨌건 사백께서 올았다. 당가는 포섭할 만한 가치가 있어.'
흑사련주 유길준을 만나 태허가 내상을 입는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직접 본 당가의 독과 암기 무학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물론 소가주 당연명 정도 되는 무인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으리라. 설마하니 이제 약관에 가까워보이는 청년이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는 아닐 테니까.
그렇게 짐작하며 현소가 말을 건넸다. 어느새 당연명이 코 앞까지 다가왔던 것이다.
"정말 대단합니다. 소가주. 그 연배에 그런 무위라니...."
"별 것 아닙니다. 대부분이 무명소졸에 불과한 잡배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겸양이 지나치시군요. 저희 사백께서도 감탄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 음 "
태허는 낮게 침음을 흘렸다. 현소는 그런 사백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원래 뭐든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사백, 태허다. 그런데 지금 태허의 모습을 보니 왠지 당가의 소가주를 대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태허가 직접적으로 당연명에게 말을 건넨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저 정도 연배의 청년들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이놈, 저놈 하며 반말을 내뱉었을 텐데 말이다.
한편.
현소의 짐작대로, 태허는 당연명을 보며 왠지 모를 껄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이상하군.'
화경에 이른 그의 기감은 말하고 있었다. 당연명의 경지가 그보다 한참 아래라고. 나이에 비하면 제법 뛰어난 성취를 이룬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놀라운 암기 무학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건 기예의 영역에 불과했다. 성취 자체는 깊지 않은 것이겠지.
한데 왜일까.
당연명의 눈一 익힌 내가기공의 특징인지 녹색이 옅게 감도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어떤 오싹함이 느껴졌다. 마치 훨씬 윗줄의 강자를대하는, 신경이 곤두서는 감각.
그래서 섣불리 반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감각을 또 언제 느꼈던가 되짚어보던 태허는 이내 한 사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마주했던 이다.
흑사련주 유길준.
떠올리자마자 태허는 내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말도 안 된다.
고작 약관도 되어 보이지 않는 청년과, 사천의 절대자를 동일선상에 놓다니.
어불성설이다.
'...내상 때문에 좀 과민해진 모양이군.'
그렇게 태허는 한줄기 의구심을 부인하며 가슴 한편에 묻었다.
< 78화<공동파(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