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공동파(7)> >
암독전 가주 집무실.
남색 장포로 몸을 휘감은 여인이 서찰을 한눈에 읽어 내린다. 위엄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의복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지만 여인의 빼어난 미모를 감출 수는 없었다.
사천당가주 독봉 당지혜 그녀의 눈이 어느새 서신의 말미에 이르렀다. 서신에는 그다지 중요한 내용이 없었다. 형식적인 인사와 이 서신을 가져가는 둘의 뜻이 곧 공동의 뜻이나 다름없으니 마땅한 대우를 해주길 바란다는 당부뿐.
심지어 가주에게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가주 대리 친전'이라 적혀 있었으니. 이건 당지혜가 가주의 자리에 오른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전엔 공석이었지 않나. 원래라면 장로원으로 갔어야 할 서신이다.
당지혜의 눈이 영민하게 번득였다. 일파의 장문인, 그것도 공동파쯤 되는 대방파의 수장이 보내는 서신에 아무런 의도가 없을 리가 없다. 구체적인 내용이 담기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터.
'본가를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겠다는 심산이었겠지.'
한때 세가라 불릴 정도로 커다란 가문의 후계자였던 당지혜다.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추론이 가능했다. 게다가 당연명이 말하길, 데려온 두 도사 중 하나는 화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화경에 이른 강자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다. 대방파나 세가에도 겨우 한둘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니 그자 역시 공동파 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일 공산이 컸다.
그런 이를 사도천하나 다름없는 사천- 그 한복판에 위치한 당가에 사절로 보냈다. 서신에 적힌 것은 없지만 분명 중대한 사안을 가지고 왔겠지.
"연명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둘밖에 없는 사석이었기에, 당지혜는 아들을 편히 부르며 의견을 물었다. 현 가주는 그녀였지만, 언젠가는 당연명이 가주의 위에 오를 터였다. 가문 내부의 잡다한 일이야 그녀가 처리한다손 치더라도 이렇듯 타 방파와 엮이는 일은 당연명의 생각을 존중하고자 했다.
소가주 당연명이 입을 열었다.
"본가는 일찍이 소가주 경합을 위해 공동파와 접촉한 일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공동산의 한 귀퉁이를 얻어 쓰고자 함이었죠."
"그랬더구나. 그간 총관부에서 집행한 자금의 흐름 살펴보니 제갈가만큼은 아니라지만 공동파에도 상당한 금전이 흘러들어간 정황이 있었지."
"그때는 별다른 얘기가 없다가 지금 본가에 접촉을 해왔지 않습니까. 그럼 당시에 없던 볼일이 지금 생겼다는 거겠죠. 불과 몇 년 사이에."
"짚이는 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공동산에서 제가 태을묵검파를 비롯한 사파 잡배들의 기습을 받았던 것은 아실 겁니다. 놈들을 몰살한 후에, 괜한 일에 엮일까 싶어 곧장 자리를 떴었지요."
당시 당연명은 화경에 이른 무위를 숨기고자 일찌감치 자리를 피했었다. 행여나 다른 화경 무인을 마주하게 되면 경지가 탄로 날 수 있었으니까. 공동파에 화경의 고수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나름 육파에 속한 대방파이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했었고.
당연명이 계속 말했다.
"아마 이번에 찾아온 두 사람 중 화경에 이른 도사- 태허라는 자가 제가 남긴 흔적을 봤을 겁니다. 그 정도 되는 이라면 시신의 상흔만으로 제 무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을 테고, 직접 본가에 방문해 확인할 요량이었겠지요. 시기상으로도 경합이 끝난 지 며칠되지 않았을 때 공동산을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공동파 나름의 출행 절차를 밟느라 며질 정도 시일이 소요되었지 않을까 싶은데..."
"조금 급하게 움직인 감이 있구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작금의 공동파에 무력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서두를 이유로 충분하겠지요."
"무력이 필요한 일이라.... 설마, 방파 대전을 염두에 두는 거니?"
"예. 어머니. 그게 아니고서는 본가에 이토록 지대한 관심을 보일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량의 인원을 홀로 살상할 수 있는 암기 무학의 흔적을 알아보고 움직였으니. 아마 제 짐작이 맞을 겁니다. 공조를 요청하겠지요."
"공동파는 대방파란다. 구파... 아니, 지금은 육파가 되었다만. 어쨌건 방파 대전을 벌이더라도 다른 곳에 손을 벌릴 일은 극히 드물텐데. 애초에 도문이기도 하고. 그 천마신교와 일전을 벌이는 게 아니고서야...."
"천마신교라면, 마교 말씀입니까?"
당연명은 궁금증이 치솟는 걸 느꼈다. 전생, 산속에서 미친 듯이 검만 휘두르던 시절에도 마교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스승이었던 검귀가 가끔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꽤 자주 등장했었는데, 강함 그 자체를 숭앙하는 집단이라고 했다.
강자존(强者存)이라는 논리가 통용되는 곳이라고.
그리고 그 강함의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마교주라 했다.
그런 존재는 얼마나 강할까.
과연, 자신이 마음먹고 내지르는 검을 받아낼 수 있을까-
당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단다. 단일 세력으로는 무림의 그 어느 방파도 견줄 수 없다는 곳이지. 지금은 그 위세가 예전보다는 쇠락한 것으로 아는데. 상당한 전력이 이탈하여 마광천으로 넘어갔으니 말이다."
"...확실히 그렇겠습니다. 마광천을 구성하는 핵심 인물들은 모두 마교 소교주였던 마광천주를 추종하던 이들이라 들었으니."
당연명은 눈을 스산하게 빛냈다.
마광천주 연중혁.
흑사련주 유길준에 버금가는 희대의 천재이자 당가를 몰락시킨 장본인이다. 괴이한 성벽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명문 무가의 규수들만을 노린다고 했다. 아무렇게나 혼사를 제의하는 망나니짓을 일삼는다고.
제의를 거절하는 가문에는 멸문에 준하는 타격을 입히고, 수락하면 상대와 혼인 후 초야(初夜: 첫날밤)를 치르고는 더 볼일 없다는 듯 방치하곤 다시는 찾지 않는다 했다.
당시 오대세가 중 하나이자 사천제일가였던 당가의 금지옥엽- 독봉 당지혜가 연중혁의 표적이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지혜에게는 혼약자가 있었기에 당연히 당가는 혼사를 거절했고, 그에 마광천주의 권위가 손상됐다 여기는 연중혁의 추종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이 대거 당가에 쳐들어오면서 혈전이 벌어졌는데, 역설적이게도 흑사련의 존재 때문에 마광천주 연중혁 본인은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사천은 흑사련의 영역이니까. 자칫 흑사련과 마광천의 전면전으로 번지게 되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덕분에 당가는 멸문을 피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마광천도 손을 보긴 해야겠지.'
당연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되도록 평범하게 살 생각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친을 오랜 세월 고통 받게 한 놈을 살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당가의 가규를 실천하려면 마광천주 연중혁뿐만 아니라 마광천 자체를 없애버려야 하지 않을까. 아니, 놈의 뿌리인 마교까지도 말살해버려야 제대로 원한을 갚는 격이겠지.
이러한 당연명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지혜가 말했다.
"아무튼, 손님들을 이리로 들라 하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테니까. 듣자하니 내상도 입으셨다면서.봉위대주의 말을 들으니 배분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짐작된다더구나. 총관을 보내는 게 올겠지."
****
암독지왕 사천제일(暗毒之王 四川第一)
현판에 적힌 용사비등한 필체를 흘낏 쳐다보고는 전각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였다.
'...무슨 기운이.'
현소는 갑자기 느껴지는 중압감에 안색을 굳혔다.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피부에 와 닿은 까닭이다. 범접하기 힘든 경지의 고수가 근처에 있다는 의미였다.
"사백."
"...알고 있다."
태허 역시 크게 놀란 눈치였다. 소가주 당연명을 보고서 당가의 저력이 예상을 웃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건 정말 의외 였다.
'화경 이라니.'
다른 이들은 몰라도 태허는 분명하게 상대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같은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있었으니까. 기감에 느껴지는 상대의 성취가 너무도 선명했다.
양파 같군- 태허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당가에 대해서는 까면 깔수록 놀라운 일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설마하니 화경의 고수까지 존재할 줄이야.
태허와 현소는 오는 동안 총관 당규현으로부터 몇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당연명이 공동산에서 펼쳐진 소가주 경합에서 최종 우승하여 얼마 전 정식으로 소가주의 위에 올랐으며, 그 모친이 가주로 주대되었다는 것.
그렇기에 현 당가주를 맡고 있는 여인의 무위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히 소가주 당연명의 나이가 어리기에, 형식상 가주의 자리를 채운 것이라고.
조금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다. 예전의 당가는 분명 장로원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보니 가주의 권위가 마냥 유명무실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사이 당가 장로들이 늙어 죽기라도 한 것일까.
"이 안에 가주께서 계십니다. 드시지요."
"안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 총관님."
"고맙소."
당규현에게 짧게 인사를 한 후. 현소와 태허는 당가주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길수록 강대한 존재감이 점차 짙어졌다.
"오셨습니까."
곧장 당연명이 둘에게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몸이 성치 않은 분을 걸음하게 하여 죄송하다고 덧붙이면서. 태허의 내상을 말함이었다.
"인사하시지요. 제 모친이시자, 본가의 가주되시는 분입니다."
현소와 태허가 당연명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서른 살이나 되었을까. 바닥까지 닿는 남색 장포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두 손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위명도 자자한 공동의 두 분 도사님들을 뵙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당가의 가주를 맡고 있는 당지혜입니다."
현소와 태허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스스로를 당가주라 칭한 여인의 용모가 아름답다거나 소가주 당연명과 남매지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젊어 보인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둘의 경악은, 놀랍도록 막대한 존재감이 바로 그녀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까닭에서였다.
특히 태허의 놀람은 상당했다. 화경에 이른 무위는 그렇다치고, 당지혜로부터 느껴지는 내공 기질이 그보다 훨씬 심후했던 것이다.
무지막지한 내공을 오랜 세월 갈고 닦은 게 분명하다고 기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지혜의 얼굴은 고작해야 서른 남짓으로 보인다. 아무리 반로환동을 염두에 두더라도 반백년이 넘는 세월을 호흡했을 리는 없었다.
매끄러운 손등을 보니 얼굴만 젊어지는 주안술을 익힌 것도 아니었다.
그렇담, 무슨 전설 속 영물의 내단을 섭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현소였다. 다급히 손을 마주 모으며 말한다.
"실례했습니다. 공동의 현소가 당가주를 뵙습니다...!"
"...태허라고 하오. 결례를 용서하시오."
둘의 사과에 당지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결례라니요. 저, 그런데... 태자 배를 쓰신다는 것은...? 제가 잘못 안 게 아니라면 현 공동 장문의 도명이 태청이시라고."
"태청은 내 사제요. 부덕한 사형이 무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장문이라는 귀찮은 자리를 도맡은 게지."
"아. 역시 그랬군요. 그렇다면 귀천하신 제 아버님보다 윗줄의 연배이실 텐데. 말씀을 편하게 하시지요."
태허의 배분이 공동파 장문 태청과 같으리라는 것은 짐작했었지만, 설마하니 사제도 아닌 사형일 줄이야. 만약 태허에게 또 다른 사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사실상 그가 바로 공동파 최고 어른이라는 소리였다. 마냥 반공대를 듣는 것도 조금 불편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지혜의 말에 태허는 고개를 저었다.
"나이는 어리다 하나 일가를 이끄는 주인에게 어찌 하대할까. 하물며 그 주인이 화경에 이르렀음에야. 강자는 존중받아 마땅하오. 지금과 같은 난세에서는 더욱더 그러하지."
이번에는 현소가 기겁했다.
< 80화<공동파(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