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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81화 (81/134)

< 81화 <공동파(8)> >

'지금. 화경이라고 하신 건가...?'

사백 태허를 바라보며 현소가 눈을 크게 치떴다. 당가주의 존재감이 장난이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화경이라니...?

당지혜라는 이름은 그도 안다. 정확히는 '기억하고' 있었다. 현소가 아직 파릇파릇한 청년이던 때. 사천과 그 인근의 후기지수들은 모이기만 하면 독봉 혹은 사천제일미를 화제로 삼았었다. 당가의 금지옥엽이자 제일가는 후기지수였던 독봉 당지혜는 그 시절 청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유명세가 도리어 독이 되었다. 망나니 짓을 일삼던 마광천주 연중혁의 표적이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가는 몰락하고 말았다. 가문의 최정예라 할 수 있는 고수들이 모조리 사망하고, 가주 역시 귀천하고 말았다.

현소가 마지막으로 들은 독봉의 소식은 그녀가 소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광천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에 책임을 지고서. 물론 알 만한 이들은 그게 당가의 권세를 잡기 위한 장로원의 수작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현소 역시 어떤 강압에 의한 것임을 짐작했었다.

'자식이 있었구나.'

왠지 현소는 당시에 당지혜가 무슨 이유로 소가주의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났는지 알 것 같았다. 지킬 것이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전혀 생각지 못했던 존재인 당지혜가 난데없이 가주로 등장한 것도 놀라웠는데, 사백인 태허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무려 화경에 이르렀음을 언급하고 있었으니까.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지혜의 나이는 현소 자신보다 몇 살은 더 어렸다. 그런데 벌써 그런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다니...!

화경의 고수는 천하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다. 정확히 그 수가 밝혀진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육파의 한 축을 맡고 있는 공동만 봐도 고작 한 명一 태허만이 화경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것도 칠십 평생 고련을 거쳐 겨우 도달한 경지였다.

쉽사리 믿기지 않지만, 다른 이도 아닌 태허가 잘못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 역시 화경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또한 여전히 당지혜에게서 풍기는 막대한 존재감이 인정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런 모친을 두고 있었으니....'

현소는 비로소 당연명의 비범한 성취를 납득할 수 있었다. 어떻게 경합에서 우승할 수 있었는 지도.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닐 터였다. 필시 모친에게서 적잖은 가르침을 받았겠지. 이 경우엔 호모(虎母)라고 해야 할까.

'...당장 세가로 불려도 모자람이 없겠어.'

아닌 게 아니라, 오면서 외원 호위 무사들의 수준 등으로 짐작할 수 있었던 당가의 무력 수준과, 또 가주인 당지혜의 화경에 이른 무위, 그리고 소가주인 당연명이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암기 무학 등을 고려하면 세가라 불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마광천과의 일전이 있기 전보다 가세가 나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당금 무림에서 오대세가라 불리는 무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화경에 이른 고수를 각자 하나씩은 보유하고 있다는 것.

사실 다른 무력보다 화경에 이른 절세 고수 하나의 존재가 그들이 세가로 불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지금 현소가 보니 당가가 그들보다 못한 게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방파 대전의 경우를 가정하면 당가가 훨씬 낫지 않을까.

'무슨 일이 있어도 포섭해야 한다...!'

현소는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가는 압도적인 무력을 숨기고 있었다. 보아하니 당가주 당지혜가 화경에 오른 것을 당가의 다른 가솔들도 모르는 눈지였다. 소가주 당연명만 빼고 사람을 모두 물린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분명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예리한 날을 숨기고 있는 비수처럼, 적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흑사련의 움직임을 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백인 태허가 이렇듯 당가주의 경지를 언급한 것은 분명 어떻게든 아군으로 끌어들이라는 뜻일 터였다.

현소가 빠르게 판단을 마친 그때.

당지혜가 웃음을 잃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난세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당장 여기 사천만 봐도 그렇지. 느닷없이 등장한 '괴물' 하나가 구파 중 셋을 무너뜨리고 사도천하를 완성했지 않소. 물론 당가가 이렇듯 건재하니 아직 완벽한 사도천하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말이오. 그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마광천이, 서쪽으로는 마교가 날뛰고 있는 실정이니, 이 어찌 난세가 아니겠소."

"본가를 치켜세우시는군요. 그나저나 '괴물'이라.... 흑사련주가 그 정도의 강자이던가요? 우연찮게 조우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경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당지혜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을 하며 말했다. 보통의 무인들에게는 태허와 같은 화경의 고수가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태허가 '괴물'이라 표현할 정도라면, 흑사련주 유길준은 대체 어느 정도의 강자인 걸까.

태허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당시를 상기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대종사의 재능을 타고났다더니. 그 말이 허언이 아니었소. 몇 번 겪어보지도 않고 본파 무학의 정수를 빼가더군. 그러고는 곧장 자신의 무학에 접목해 새로운 무공을 창안해내는 광경은 실로 경악스러웠지."

"사실이라면... 엄청나군요. 얕은 무학도 아니고, 그 공동의 무학을...."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오. 그리고 패했음에도 내가 살아있는 것은, 온전히 흑사련주가 아량을 베푼 덕이오. 앗아간 공동 무학의 정수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고, 날 살려주겠다더군. 내상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였소."

태허는 놀랄 만한 사실을 덤덤하게 쏟아냈다. 이건 평소 자존심을 세우던 그의 모습과는 괴리가 있었는데, 당지혜를 그와 동등한 수준의 강자로 인정하기도 했거니와, 당가의 협조가 절실했던 까닭이었다. 이번에 흑사련주 유길준과 부딪쳐보고 태허는 깨달았다. 까딱하면 사문인 공동파 역시 멸문한 청성파, 아미파, 점창파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음을.

위기감을 조성해서 당가와의 공조를 쉽게 도출해내려는 의도도 있었다.

잠시 방안에 침중한 분위기가 흘렀다. 담담하게 얘기하긴 했으나 태허쯤 되는 정파의 고위 인사가 흑사련주에게 패한 일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든 육파가 오파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으니까.

침묵을 깬 것은 당연명이었다. 이제 슬슬 본론을 얘기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본가를 방문하시는 길에 그러한 불상사가 일어나 참으로 유감입니다. 해서 말인데, 두 분 도사님들께서 이토록 먼길을 오신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소가주께서 먼저 말씀해주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동 쪽에서는 현소가 나섰다. 태허는 더 이상 할말이 없는 것처럼 살짝 눈을 감고는 뒤로 물러났다. 내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현소에게 모두 위임하겠다는 태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찌면 둘 다 일지도 몰랐다.

현소가 이어서 말했다.

"본파는 곤륜과 공조하여 마교를 칠 생각입니다. 연중혁이 마교를 제 발로 나와 마광천을 만든 뒤로 마교의 성세가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하나, 여전히 단일로는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방파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어쭙잖은 전력을 보냈다가는 도리어 이쪽이 당할 겁니다. 하지만 태허 사백을 비롯한 본파 정예 전력을 무작정 보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흑사련이 북상할까 신경 쓰이시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만약 정예 전력이 곤륜에 지원을 나간 사이 흑사련의 공격을 받게 된다면, 본파로서는 제대로 방비하기 힘들 테니까요.

그리고 이번은 방파 대전인만큼 귀가의 무학이 빛을 발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당가의 무학은 소가주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많은 인원을 살상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여, 귀가에 협조를 요청하고자 합니다一 현소는 그렇게 말을 맺었다.

당연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현소는 당황했다. 설마 당연명이 바로 거절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간의 태도로 보아 나름 우호적인 것으로 보였는데...?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는 있었지만 태허 역시 눈썹을 꿈틀거리는 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평소 같았다면 버럭 노성을 터뜨리거나 했겠지만, 의외로 잘 인내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은 데다, 화경에 이른 당지혜를 의식한 때문이었다. 괜히 감정이 격해져봐야 이로울 게 없었다.

"소가주. 다름 아닌 사마의 무리를 척결하는 일입니다. 부디 재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발호하는 마교를 저지하지 못하면, 서쪽의 마광천과 호응하여 이번엔 마도천하가 펼쳐질 지도 모릅니다...!"

현소가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당가의 무력을 몰랐으면 모르되, 확인한 이상 어떻게든 포섭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가와 공조할 수 있다면 애꿎은 목숨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을 살릴 수도 있을 테니까.

흐음

당연명은 살짝 고민하는 척 침음을 흘리고는 입을 열었다.

"도사님도 아시다시피 사천은 흑사련과 그 휘하 방파들이 득세하는 땅입 니다. 사도천하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말입 니다. 그게 꼭 문제가 되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무슨 말씀입니까. 소가주."

"흑사련이 치세하는 사천은 꽤 평화롭습니다. 오시는 길에 양민들을 적잖게 보셨을 겁니다. 그들의 표정이 어떻던가요? 마냥 수탈당하는 이들로 보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사도 방파들은 영역에서 보호비 등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긴 하지만 결코 선을 넘지는 않습니다. 선을 넘게 되면 다른 방파들로부터 공격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죠. 그들은 영역 내에서는 확실하게 치안을 지키고, 또 흉년에는 나름대로 구휼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더군요. 재물을 축적한 이들을 겁박하는 둥 그 수단은 그리 정상적이진 않지만 말입 니다."

"양민들 중에는 육파가 구파이던 시절보다 지금이 더 살기 좋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당연한 얘기지요. 당시에는 보름에도 몇번씩 영역을 담당하는 이들이 뒤바뀌곤 했다고 하니까요. 그때마다 은전을 걷어댔을 테니 민초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정도건 사도건 어느 한쪽이 주도권을 잡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겠지요. 실제로 지금 민초들의 생활은 예전보다 훨씬 윤택해졌고, 흑사련주를 받들어 모시는 양민들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저는 소가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도통...."

"솔직해지자는 겁니다."

"…예?"

"흑사련의 세가 지금껏 강성해질 때까지 공동은 나서지 않았지요. 사천은 공동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혹은 구파 중 셋을 멸한 흑사련주에 대한 경계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파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하지만一 이라고 말을 길게 늘인 뒤 당연명이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사마의 무리들을 척결하자는 명분으로 본가에 협조를 구하시다니요. 곤륜을 돕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순망치한(腸t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을 염두에 두신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마교에 의해 곤륜이 망하면 다음 순서는 공동이라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이번 일에 적극적이신 것이겠지요. 또한 본가는 정도를 표방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흑사련과 같은 사도 방파를 없애야 한다고까지는 생각지 않습니다. 익힌 무학의 추구하는 바가 다를 뿐,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니까요. 마도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81화 < 공동파(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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