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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82화 (82/134)

< 82화<공동파(9)> >

'...소가주의 언변이 보통이 아니군.'

현소는 부끄러움과 난감함을 동시에 느꼈다.

당연명은 사천 흑사련의 일에 나서지 않았던 공동의 행적을 언급하면서, 탓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자파의 안위를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一 언뜻 이해심 넓은 발언으로 비춰질 수 있었지만, 결코 아니었다. 이건 현소가, 그리고 공동이 더 이상 정파로서의 기치를 내세우지 못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사정에 따라 흔들리는 기치 따위를 남에게 주장할 순 없으니까.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그래서였다. 또한 곤륜의 위기와 공동의 입장을 두고서 순망치한이라 표현한 것도 마치 뼈를 얻어맞은 느낌이라 제대로 반박하기 힘들었다.

'어쩐지 당가주가 가만히 지켜보더라니.'

현소는 이제 완전히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당가주 당지혜를 일별하며 생각했다. 아무리 소가주라 한들 당연명은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않은 듯해 보이는 어린 청년이었다. 그런 당연명에게 가문의 중대사를 위임하는 듯해 조금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그만한 역량이 있어서 믿고 맡긴 듯했다. 아니, 단순히 역량이 있는 정도를 넘어 노회하기가 무슨 팔십 먹은 늙은이보다 더한 것 같았다.

정과 마가 영역을 다투는 일一 그 거대한 이념의 대립을 단숨에 실리의 영역으로 끌어내렸으니까. 이건 단순히 수완이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흑사련과 그 휘하의 사도 방파들로 득시글거리는 사천에서 홀로 정도를 걷는 무가이니만큼 당가를 포섭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여겼건만,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난감하기 짝이 없다.

어쨌거나 더 이상 정(IE), 사(邪), 마(魔) 따위의 논리를 펼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소가주 당연명은 흑사련의 지세마저도 나쁘지 않게 평하는 인물이었으니.

현소는 당가를 포섭하기 위해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음을 인지했다.

'솔직해지자고 했지.'

조금 전 당연명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면 짧은 시간이나마 그가 현소와 태허에게 보인 태도는 분명 호의적이었다. 일백이 홀쩍 넘는 사파 무사들을 '굳이' 살해해 가면서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었고, 태허의 내상이 어느 정도 나을 때까지 객으로서 가문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해주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우호적이라 판단할 만했다.

현소는 추측했다. 아마 당연명은 자신들이 도움을 청하러 온 것쯤은 쉽게 간파했을 것이다. 마교와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하더라도 무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아차렸을 공산이 컸다.

지금 말하는 것만 봐도 소가주인 당연명이 상당한 통찰력을 지닌 자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알량한 공명심에 사로잡혀 움직이기 일쑤인 다른 무가나 방파의 후기지수들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얘기다.

그런 이가, 나서서 무력을 과시하고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가문으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정확히는 협조 요청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겠다고' 말했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현소는 왠지 그저 당연명이, 당가가 원하는 것을 공동이 제시하지 못해 그리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 사, 마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으며 실리를 추구한다一 현소가 짧은 시간 겪은 당연명은 그러한 인물이었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성향을 봐서는 언제 흑사련에 투신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데,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쭉 정도의 편에 설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어쨌건 실리를 추구하는 성향도 이해가 됐다. 지금 당가는 흑사련에 둘러싸여 고립무원이나 다름없는 처지였으니까. 생산과 소비가 모두 영역인 성도에 국한된 채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일이다. 물론 성도는 커다란 도시였지만, 한때 천하를 주름잡는 다섯 세가 중 하나였던 당가가 그 규모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랄 터였다.

'바라는 게 무엇일까. 역시 금전이겠지.'

금전이건 다른 무엇이건, 아무래도 좋았다. 현소는 장문인으로부터 이번 일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차였다. 정확히는 사백인 태허에게 주어진 권한이었지만, 별 차이 없었다. 태허는 공동 내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밝지 못하기도 했고. 당가에 내어줄 수 있는 게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산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물론 현소는 그깟 재물 따위보다 사문 사형제들의 목숨이 훨씬 중하다 여겼다. 단신으로 이백에 가까운 사파 무인들을 몰살하던 당연명의 암기 무학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당가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천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현소가 입을 열었다.

"소가주. 빈도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응당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 텐데요. 귀가의 사정도 있을테니 무작정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희 공동은 귀가의 도움에 상응하는 대가를 얼마든지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일단 그 부분부터 논의를 해보심이 어떨는지."

"좋습니다. 이제 좀 솔직해지셨군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당연명이 대답했다. 기꺼운 기색이 역력하다. 현소는 비로소 자신이 제대로 짚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당가의 소가주는, 공동에 도움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합당한 대가를 얻어내고자 했을 뿐.

"귀파에서 본가와 공조를 원하시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그럼, 본가가 어느 정도의 전력을 편성할 지 결정하겠습니다. 대가는 그 후에 논의하도록 하죠."

도사 치고는 제법 눈치가 있군. 덕분에 수월하겠어一그렇게 생각하는 미청년의 입매에는 어느새 호선이 보기 좋게 맺혀 있었다.

****

공동파 현소와 당가 소가주 당연명의 대화는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좀처럼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현소가 예상한 대로 당연명은 무력을 지원하는 대가로 금전과 재물을 요구했다. 하지만 웬만한 조건은 모두 수용하고자 한 현소로서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당연명이 요구하는 액수가 컸다.

무려 공동파를 몇 해나 운영하고도 남을 정도의 거액을 불렀으니까.

'소가주. 귀가가 지닌 무력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이 정도 금액이면 본파로서도 큰 부담입니다. 아무리 제가 장문인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 한들....'

'본가와 제 무력은 제가 잘 압니다. 저는 적정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금액을 낮추면 제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솔직히 그 정도 금전이면 화경의 고수도 초빙할 수 있을 겁니다. 당가주께서 직접 출전하시는 것도 아니고, 소가주께서 참전하시는 것만으로 금액이 그렇게 산정되다니요.'

웃음과 함께 부드럽게 시작된 논의가 논쟁에 가깝게 격화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소가주 당연명의 참전 유무였다. 당연명의 놀랄만한 암기 무학一 우모침우를 코앞에서 목도한 현소와 태허는 어떻게든 그를 마교와의 일전에 지원받고 싶어 했다. 당가의 다른 무인들 역시 암기무학과 용독술을 웬만큼 익히고 있지만 당연명 정도로 대량의 인원을 손쉽게 살상할 수 있는 이는 극히 드물다는 얘기를 듣고는 더욱 그랬다.

마교의 인물들은 대체로 잔혹하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하지만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적대하는 이들을 살려두는 법이 없었고,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단번에 죽이지 못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까닭에, 마교도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예상보다 더한 피해를 낳곤 했다.

당연명 정도 되는 암기무학의 고수가 합류한다면 분명 아군의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으리라. 접근조차 불허한 채로, 스치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는 독침을 소나기마냥 흩뿌리는데 그걸 뚫고 나오는 이는 필시 극소수일 테니까.

하지만 당연명이 본인의 참전을 대가로 요구하는 액수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컸다.

마교와의 싸움을 피하고 싶어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명은 공동과 곤륜을 적극적으로 도와 마교를 완전히 소탕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마교는, 그 마광천주 연중혁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니까. 연중혁에게는 모친의 일로 인한 빚이 있지 않나. 그리고 현 마교주는 연중혁의 아비였고, 연중혁이 제 아비를 끔찍이 여긴다는 것은 제법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연명은 마교주를 죽일 심산이었다. 강자를 숭앙하는 마교에서 정점에 이른 인물一 마교주 역시 당연히 화경에 이른 강자였다. 그러니 그만한 금액을 요구한 것이었다.

게다가 드러내지 않았을 뿐 당연명 본인도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니. 현소가 말했듯 화경의 고수라도 초빙할 만한 금액이면 적정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당연명은 결코 스스로 매긴 금액보다 싼값에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모친인 당지혜가 화경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만년화리의 내단으로 인한 기연에 불과했다. 내력이 어마어마해졌으니 강기의 구현과 유지에 있어서는 유리한 점이 있겠지만, 무학의 숙련에 있어서는 분명 다른 화경 고수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터였다. 쉽게 당하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 다른 화경 고수와 맞닥뜨렸을 때 무사하리라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런 모친을 두고 자리를 비워야 한다. 물론 아무런 조치 없이 그냥 떠나지는 않겠지만,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여겼기에 당연명은 제값을 받지 못한다면 굳이 참전하고 싶지 않았다. 마교를 손보는 일은 차후로 미뤄두어도 되는 일이니까.

하나 당연명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건, 현소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액수였다. 당연명의 진실한 무위를 알았다면 모를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 공동이고, 또 을의 입장임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현소였다.

이렇듯 어느 한쪽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니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결론이 나긴 했다.

'...좋습니다. 이 정도라면.'

'귀파로 돌아가실 때 호위 겸 지원 병력을 딸려 보내겠습니다.'

'약속된 금액은 바로 보내드리지요. 그럼, 흑사련에 대한 조치는....'

공동이 원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였다.

마교와의 싸움에 당가가 무력一 암기 무학과 용독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이들로 구성된 정예 무력대를 지원해 줄 것과, 사천의 흑사련이나 그 직속 세력들이 행여나 북상하지 않도록 억제해달라는 것.

'그건 제가 직접 나설 생각입니다.'

당연명은 자신 있게 말했다. 지원 무력에서 그가 빠지는 대신, 흑사련과 그 휘하 세력의 움직임을 사천에서 확실히 봉쇄하겠다고. 그들의 주의를 당가로 끌어들이겠다는 게 요지였다.

'그런데, 방도가 있습니까? 소가주께서 출중한 무위를 지니신 것은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흑사련과 그 휘하 세력 모두의 주의를 끄는 것은....'

다소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현소가 물었다. 당연명이 실패한다면 공동은 그야말로 멸문의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무슨 계획인지 정도는 알 필요가 있었다.

'곧 사천지회가 있습니다. 사천의 모든 방파들이 모여 친분을 다지는 자리인데, 보통 각 방파의 후계들이 참석한다고 하더군요. 올해는 본가에도 초대장이 왔습니다.'

당연명이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눈은 몹시도 매섭게 빛났다.

'거기에 온 사도 방파의 후계자들을 모조리 죽일 참입니다.'

< 82화<공동파(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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