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사천지회(1)> >
사실 사천지회(四川之會)는 꽤나 전통 있는 행사다.
예로부터 사천은 온갖 성향의 방파와 가문들이 난립하고, 그보다 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활보하는 대지였다. 청성과 아미 같은 굵직한 정파의 기둥들이 자리하고 있긴 했지만, 그들의 세가 사천 전역에 미치지는 못했기에 변두리에는 크고 작은 사도 방파들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사도 방파들은 대개 스스로를 정사지간의 중립 방파라 칭하고는 했지만, 그들이 사도(邪道)로 분류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의(義)나 협(快)이라 불리는 기치를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이익만을 챙기는 데 급급한 까닭이었다. 당연히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명분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타 문파의 영역을 침범하고, 세를 불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또한 사천의 날씨는 무덥고 습했다. 그러한 기후 아래 살아가는 이들의 기질은 대체로 호전적이었는데, 무공까지 익힌 이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작은 일로 마찰이 발생하고, 그걸 빌미 삼아 방파 대전이 벌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잦은 영역 다툼에 죽어나는 것은 민초들이었다. 생업에 종사하기도 바쁜 와중에 허구한 날 싸움이 벌어지니까. 무인들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눈먼 칼에 맞아 죽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가뭄이나 장마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한 흉년이 시시때때로 찾아왔다.
처음엔 청성과 아미, 그리고 그 속가 방파나 가문들이 나서서 사도 세력들을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도 세력들은 그야말로 잡초와 같아서, 뿌리를 뽑으면 또 어디선가 다른 세력이 기어들어와 영역의 주인으로 행세하며 양민들을 수탈하곤 했다.
그리고 사도 방파 중에도 제법 무위가 높은 이들이나 까다로운 무학을 익힌 이들이 존재해서, 정파 쪽이 역으로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출혈이 누적되면 도리어 정도 세력이 수세에 몰릴 수도 있었다.
무언가 효율적으로 사도 방파들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정도 세력이 지닌 무력을 실감케 하고, 더하여 사도 세력끼리의 싸움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터였다.
그러한 배경에서 열리게 된 행사가 바로 사천지회였다.
사천의 유력한 가문이나 방파에서 도맡아 사천지회를 주관하는데, 이때 초대를 받아 참석하는 이들은 각 가문 및 방파의 후계자들이었다. 처음에는 정도 세력 쪽에서 귀한 영약이나 영물의 내단 등을 상품으로 내걸고 친선 비무대회 따위를 개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비무대회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 간단한 이유였다一 비무대회의 형식을 빌리지 않아도 제멋대로들싸워댔으니까.
정과 사.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한데 모였다. 그것도 각자 속해 있는 방파나 가문에서 후계로서 떠받들어지는 게 일상이던 이들이 대다수다. 겉으로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그럴 듯하게 내걸었지만, 친분을 다지기는커녕 살의를 동반한 마찰만 빈번하게 일어나는 게 당연하겠지.
그러나 그러한 다툼을 사천지회에 참가한 모든 방파와 가문들이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청성과 아미의 다음 대 장문으로 내정된 이들은 사천지회에서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였다. 다른 방파나 가문의 후계자를 살해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반신불수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종종 발생했다. 그걸 직접 목도한 다른 사도 방파의 후계자들은 청성과 아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자 노력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던 망둥이들이 크게 줄었다는 얘기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방파끼리의 직접적인 대전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사천지회에서 서로 무위를 견주어보고, 진 쪽이 이긴 쪽에 어느정도 이권을 양보하는 것이 당연한 관례처럼 된 것이다. 각 후계자들은 그 자체로 속한 방파나 가문의 현재이자 미래였다. 그들끼리 제멋대로 이루어진 승부였지만, 각 방파와 가문의 주인들은 그 결과에 승복하기로 했다.
영역 갈등이나 방파 대전이 크게 줄어들자, 민초들은 물론이고 관에서도 크게 반겼다. 사천지회를 후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고, 행사를 주관하게 된 방파나 가문은 그 사실을 크나큰 영예로 여기게 되었다.
사천지회가 조용히 끝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높은 확률로 칼부림이 일어나곤 했는데, 이때 압도적인 실력을 보인 이들은 신예로서 커다란 명성이나 별호를 얻기도 했다. 워낙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행사인 까닭이었다.
그간 사천지회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는 다양했다. 사도 세력에 제법 출중한 인재가 등장하여 양손으로 세기 힘들 숫자를 살해하는 일도 있었고, 자질이 미천한 이가 과한 호위 병력을 대동해 다른 참가자들을 겁박하다 암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사천지회에는 나름의 규칙들이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참가자와 그 호위, 시종에 대한 부분이었다.
일단 참가자는 각 방파나 가문의 후계자로, 나이는 스물다섯 이하여야 했다. 그리고 호위와 시종은 각각 한 명씩, 약관이 되지 않은이로 제한했다. 사천지회가 열리는 장소까지야 얼마의 호위를 대동하건 상관없었지만, 결국 사천지회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참가자 본인을 포함해 단 셋뿐이라는 얘기였다.
어쨌건.
금년에는 당가 역시 사천지회의 초대를 받은 입장이었다. 당연명이 가문의 후계자, 즉 소가주의 위에 올라섰으므로.
그동안은 가주와 소가주의 자리가 공석이었기에 사천지회의 참석을 거절해왔던 당가였다.
보낼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흑사련에 의해 사도 천하가 되어버린 땅에서 열리는 사천지회란, 그저 사도 방파들만의 교류회나 다름없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당가로서는 실익이 없었다. 압도적인 수준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정도 세력이 모조리 멸문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머릿수에서부터 크게 밀린다. 애꿎은 괴롭힘이나 조롱을 당하고 돌아올 것이 뻔했다.
원래는 당연명도 사천지회에 굳이 참석할 생각은 없었다. 압도적인 무위로 거기 참가한 이들을 짓누를 수야 있겠지만 그저 시간낭비로 다가왔던 까닭이다. 그깟 사파 잡배들이야 언제든 처리할 수 있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 공동파의 제안에는 적지 않은 금전이 걸려 있었다. 일 년 정도는 당가 전체가 놀고먹어도 될 정도로 막대한 액수다.
어차피 가문이 성도 외부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 사파들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기에, 당연명은 사천지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흑사련 휘하 세력들 중 난다 긴다 하는 곳의 후계자들은 모조리 사천지회에 참가한다고 들었다. 그들을 모두 죽인다면...?
일거에 사천 사파 세력들의 싹을 자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 뒷일은 당가가 감당해야겠지만, 당연명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흑사련 휘하 사파 세력들의 신경이 온통 가문으로 쓸린 사이에, 당가의 지원을 업은 공동은 곤륜과 함께 마교를 치면 된다.
이게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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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님."
독왕대주, 아니 한때 독왕대주였던一 당지혁이 암독전에서 돌아오는 이장로 당명신을 맞으며 말했다.
"가주...께서 무슨 일로 부른 겁니까? 듣자하니 사장로와 오장로도 호출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기회가 왔다."
"기회라니 요...?"
"쉿. 말소리를 낮춰라. 혹여 듣는 이가 있을 지도 모르니. 들어가서 얘기하도록 하자."
"...예"
당지혁은 순순히 대답하고는 당명신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갔다. 기감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숙부인 당명신의 말대로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특히나 가문을 등질 생각을 품고 있는 그들 일가는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탁
"이제 말씀하시지요."
방음이 잘 되도록 밀폐된 공간에서, 기감을 한껏 끌어올리고도 모자라 목소리까지 낮추며 조심해야 하는 것이 조금 처량하다고 느끼면서 당지혁이 말했다.
"본가에 손님들이 왔다. 공동파의 인물이라더구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익숙한 도명을 하나 들었지. 태허... 내 기억이 맞다면 그는 현 공동파 장문의 사형일 것이다."
당명신은 공동파 태자 배 제자들과 동년배였다. 그렇기에 젊은 시절 태허에 대해서 들은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공동파의 최고 기재라며 이름을 날리곤 했었는데, 어느 순간 폐관 수련에라도 든 것인지 완전히 활동을 멈췄었다.
"그만한 인물이 어찌 본가까지 왔답니까."
"무력 지원을 요청하러 온 게지. 방파 대전을 앞두고서. 본가는 세 개 무력대를 지원하기로 했다."
"방파 대전이라니요? 육파 중 일좌인 공동이 누구와 싸움을 치른단 말입니까? 그리고 저희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라니...."
"마교다."
"예…?"
당지혁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마교라니, 단일 세력으로는 무림 최강이라는 그 천마신교와 공동이 일전을 치른단 말인가...? 게다가,방파 대전,이라 했다. 소규모 국지전 따위가 아니라, 한쪽의 명운을 걸고 제대로 부딪치겠다는 뜻인데....
"거기에 왜 본가가 낀단 말입니까. 공동과 무슨 의리가 있다고..."
"대가로 상당한 액수의 금전을 받기로 했다더구나. 아직 의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공동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였겠지."
"...세 개 무력대를 지원한다 하셨지요. 그럼 설마...?"
"그래. 내 직속 건정대와 사장로의 독검대, 오장로의 암량대가 차출됐다. 언제 출발할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채비를 하고 있으라더구나."
"저희를 제거하려는 속셈일까요? 마교의 손을 빌려서."
"그런 낌새는 아니었다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긴 하겠지. 나와 다른 장로들의 직속 무력대는 가주에게 계륵 같은 존재일 테니 말이다."
"얼빠진 표정하지 말고 잘 들어라. 이건 기회다."
당명신은 '기회'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고 가문을 벗어날 수 있지 않느냐. 일단 사천만 벗어나면 만사형통이다. 감숙을 통해 동쪽 섬서로 이동해도 될 것이고. 좀 더 북쪽으로 돌아 내려와도 되겠지."
"...공동을 지원하지 않고 도주하자는 말씀입 니까?"
당지혁이 조금 마땅찮은 기색으로 물었다. 마교와의 싸움이 내키지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지원 병력으로 나서는 길에 도주한다...? 이건 완전히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꼴이었다. 아무리 가문을 등질 생각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당명신은 그런 당지혁을 질책했다.
"멍청한 놈! 정신 똑바로 차려라. 어차피 본가에 남아봤자 수모를 당하면 당했지 우리가 누릴 영광은 없다. 가문의 명예 따위에 얽매이지 말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즉."
"...숙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채비를 해라. 값나가는 물건들은 따로 챙기되, 영영 떠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게 어느 정도는 남겨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문찬이를 비롯해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힌 아이들은 건정대에 넣고, 무공 성취가 얕은 이들은 따로 시일을 잡아 도주하라 전해라. 듣자하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소가주가 사천지회에 참석한다는구나. 그때를 노리면 수월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당지혁은 숙부의 당부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제 정말로 그들은 나고 자란 가문을 등지게 되는 것이다. 왠지 앞날에 암운이 드리우는 것만 같아 영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당지혁은 애써 고개를 털어 불안감을 날려버렸다.
< 83화<사천지회(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