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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84화 (84/134)

< 84화<제갈영영> >

다가닥 다가닥.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황야를 질주하고 있는 마차가 여러 대 있었다. 호화롭다고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제법 견고하고 값이 나가 보이는 마차를, 범상치 않은 준마들이 힘차게 끌고 있었다. 뒤에는 짐수레도 몇 따르고 있었는데,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아 상단 같지는 않았다.

마차들 곁에는 호위 병력인 듯 허리춤에 검을 찬 무인들이 각기 말을 타고 마차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이동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말발굽 소리와 함께 질주하는데, 짐수레가 연결된 마차의 말들이 조금씩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부가 바로 옆 무인들에게 소리쳤다.

"말들이 지쳤습니다!"

"알았다. 말씀을 드려보지."

무인들 중 하나가 말의 몸통을 가볍게 차면서 대답했다. 곧 그의 말이 히힝一 울음소리와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여러 대의 마차 중 한 곳에 가까이 다가선 무인이 나직이 말했다.

"전주. 짐수레를 끄는 말들이 지쳐 휴식을 좀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센 말발굽 소리에 목소리가 묻힐 법도 했는데, 그의 음성은 선명하게 퍼져 나갔다. 필시 내공을 실은 것이리라.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닌, 쉴 새 없이 들썩이는 말안장 위에서 차분히 말을 건네는 모습이 그가 제법 수준 높은 무학을 익혔음을 짐작케 했다.

"...아니. 조금만 더 가면 작은 마을이 나올 겁니다. 그곳에서 쉬도록 하지요."

마차 안에서 '전주'로 짐작되는 인물의 목소리가 존대의 형태로 흘러나왔다. 조금쯤 지친 기색이 깃든 중후한 음성이다. 한낱 호위 병력에게도 말을 높이는 것이, 그의 인품을 대변하는 것인지 단순 습관으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인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공손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무량전주는 가문一 제갈가의 진법 비기를 모조리 통달한 핵심 인물일 뿐만 아니라, 가문의 부흥을 위해 직접 두 발로 뛰는 이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제갈가는 진즉에 망해버렸을 거라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가문의 젊은이들은 다들 무량전주 제갈창신을 존중하고 있었다.

무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차라리 여기서 쉬고 사천에 들어가 제대로 된 곳에서 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 근방에 있을 만한 마을이라 해봐야 촌락 수준일 것 같습니다만."

"사천은 본가가 있는 호북 땅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호북에도 마광천의 세력이 날뛰고 있긴 하지만, 사천은 그야말로 사도 천하. 당가가 있는 성도를 제외한 사천 전역이 사도 방파의 영역이죠. 잠자리는 쾌적할지 몰라도 편히 쉴 수는 없을 겁니다. 이동 속도를 늦추기라도 했다간 자짓 여러 곳에서 합공을 당할 우려도 있고."

잠시 말이 멎었다. 무인은 귀환한 무량전주가 가주와 이틀을 내리 입씨름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들은 바에 의하면 고성이 오갈 정도로 격한 말다툼이 있었다는데, 말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제갈창신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는 것처럼 건조하게 느껴졌다. 목이라도 축이시지.

잠시 후 정말 침이라도 삼킨 것인지 한결 나아진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사천에 진입하기 전, 마을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사천에 들어서고 나서는 최대한 빠르게 성도로 이동해야 합니다.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경계가 용이한 곳에서 야숙을 하던가 해야 할 겁니다."

"...고작 사파 잡배들 때문에 본가가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영영 아가씨까지 계신데."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있다면 이러할까. 마차 안에서는 아직 엣된 소녀의 목소리가 듣기 좋게 새어 나왔다.

"갇혀만 있는 생활이 지긋지긋했는데, 이렇게 나와 보니 나들이 하는 것 같고 좋은데요. 마차도 제법 흔들리긴 하지만,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 같고. 야숙도 기대가 돼요. 짐승을 잡아서 껍질을 벗겨낸 뒤, 소금만 뿌려 불에 구워 먹는 게 그렇게 묘미라던데."

"아무튼."

무량전주의 목소리가 소녀의 발랄한 음성을 끊고 다시금 등장했다.

"흑사련 휘하의 사도 방파들 중에는 제법 고강한 무위를 지닌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땅에서야 사도를 걷는 이들이 잡배 정도로 불리며 멸시당하기 일쑤지만, 흑사련주에 의해 개변된 무학을 익힌 이들은 본가 정예 무력대라 해도 당해내기 쉽지 않을 겁니다. 가급적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겠죠. 조금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일단은 제 말을 따라주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전주. 따로 생각이 있으실 텐데 괜히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괜찮으니 물러가세요. 마부한테도 마을에 도착해서 쉬겠다고 말해주고."

"예."

무인은 마차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말의 속도를 늦춰 뒤로 물러났다.

그의 기척이 사라지고 조금 뒤.

마차 안에서 소녀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꽤 서두르시네요. 숙부."

"...그리 보이더냐?"

"아버님과 얘기가 끝나자마자 인원을 꾸려 출발한 것도 그렇고, 객점에 들러서도 간단하게 요기만 하고 다시 출발... 해가 떠 있는 시간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으니까요. 아무리 준마들이라 해도 지질 만하죠."

"괜한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중년 사내, 제갈가 무량전주 제갈창신은 섭선을 괜히 손바닥으로 쓸며 무심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당연히 서둘러야지. 이미 시간이 꽤 지체되었으니.

一긴 말 않지. 귀가에 설치된 것에 준하는 진법 비기들을 본가 내원에도 깔아두도록. 그것으로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주지. 양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일도 없을 거야. 물론 거기에 들어가는 제반 비용과 인력은 모두 귀가에서 부담해야 하겠지.

당가의 소가주 당연명이 그를 살려주며 얘기한 조건이었다. 빠르게 추진하라는 당부, 아니 협박도 있었다.

홀로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갈창신은 사파 무인들로부터 여러 차례 급습을 받았다. 단순히 서생 차림이라서 만만하게 보인 까닭 만은 아니었다. 흑사련 휘하 사파 세력들은 여간해서는 양민들을 건들지 않는다. 제갈창신이 습격을 받은 것은 그만큼 당가를 주시하는 이들이 많았던 때문이었다. 당가의 소가주 경합에 얽혀 태을묵검파와 천진방이 당한 상황이었으니까.

제갈창신은 몇 차례 습격을 받고 사파 세력들을 경시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머릿수도 머릿수였지만, 간혹 명가의 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을 몇 번 상대하고 나니 제갈창신은 무사히 살아서 사천을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당연명의 앞에서 목숨을 위해 한 번 구겨졌던 자존심이다. 다시 구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섭선을 던져버리고 평범한 양민으로 변장을 한 다음, 진법까지 동원해 은신과 휴식을 취하며 겨우 살아나왔다.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도착한 제갈가 본가.

바로 가주와 독대했다. 가주인 제갈창현은 원래 제갈창신과 사촌지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둘은 사석에서는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를 정도로 허물없는 사이였다. 제갈창신이 가문을 위해 애쓴 바를 알고 있기에, 그에 대한 제갈창현의 신임 또한 두터웠고.

제갈창신은 필사적으로 가주를 설득했다. 당가에 용(龍)이라 불릴 만한 인물이 나타났다고. 거기에 편승해서 우리 제갈가도 부흥을 꾀해 보자고.

거기까진 설득이 어렵지 않았다. 원래도 제갈가는 당가에 복속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당가 소가주 경합에 제갈가 무량전의 핵심 인물들을 지원해 칠쇄환궁진을 설치해준 이유가 무엇이 던가. 장차 소가주가 될 인재를 제갈가 쪽으로 포섭해두기 위함 이었다.

함께 파견되었던 다른 무량전 인원들이 생환하지 못한 것은 적당히 흑사련 휘하 사파들의 탓으로 둘러댔다. 태을묵검파와 같은 굵직한 사도 방파가 공동산에 급습해오는 바람에 귀천하고 말았다고. 자짓 당가 소가주 당연명에 대한 반감을 심어줄까 우려한 것이다.

문제는 제갈가 본가에 설치되어 있는 수준의 진법들을 당가에도 똑같이 깔아두고자 한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였다.

'무량전주. 아니, 창신아. 네가 당가의 소가주라는 아이에게 그만큼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알겠다. 그 나이에 단신으로 삼백의 인원을 감당하는 광경을 목도했다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건 비용을 떠나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그걸 내어주고 나면 당가의 입장에서 본가의 효용 가치는 극히 떨어진다. 조금 더 신중하게 논의해 볼 일이다.'

'가주. 시간이 없습니다. 소가주 당연명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실로 압도적인 자질... 아니, 이미 개화하였으니 실력이라고 해야겠지요. 아무튼 그는 놀라운 무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파악한 그의 성품으로봤을 때 괜히 이것저것 재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지원을 해주는 것이 호감을 사기 쉽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망설이는 가주를 설득하기 위해 제갈창신은 장장 이틀을 떠들어야 했다. 괜히 당연명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들통 난 것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스스로 치부라 여기기도 했고, 양가의 관계에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연명의 영민함으로 보아 그가 구태여 자신과 있었던 일을 밝히지 않으리라는 짐작도 있었고.

어쨌건 어렵사리 가주의 허락을 득하고, 다음으로 제갈창신이 한 일은 가문 내에서 제법 미색이 뛰어난 여아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열셋에서 열여섯 사이의 나이인 아이들로.

'고개를 들어라.'

제갈창신이 당가 소가주 경합의 일로 가문을 비운 것이 장장 오륙 년이 넘었다.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들이 많았다. 특히 십대 여아들은 한두 해만 지나도 미모가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수십에 달하는 소녀 중에,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있었다. 아직 어린데도 미색이 대단했다. 이 정도면 기억에 있을 법한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제갈창신이 물었다.

'넌 이름이 무엇이냐?'

'영영. 제갈영영이에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청아한 목소리가 상념을 깬다.

제갈창신이 고개를 들자, 큰 눈망울을 지닌 예쁘장한 소녀가 입매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해맑은 웃음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동년배의 소년들쯤은 쉽게 무장 해제시킬 수 있지 않을까.

제갈영영一 그녀는 현 제갈가주의 딸이었다. 첩실의 소생이었기에 제갈창신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그의 눈에 띄게 되어 사천행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마치 어릴 적 수란이를 보는 것 같군.'

제갈창신은 문득 사촌 누이를 떠올렸다. 호북제일미라 불리며 제갈가의 자랑이던. 그러다 마광천주 연중혁의 괴벽에 희생되고 만. 불쌍한 여인. 제갈수란이 희생한 덕에 제갈가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결국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제갈수란은 자결하고 말았다.

한때는 연중혁에게 앙갚음을 하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마광천의 전력은 나날이 강성해지기만 했고, 그에 반해 제갈가는 당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로 쇠락하고 말았다. 이제는 원한을 갚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그저 가문이 존속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모쪼록 네게 본가의 미래가 달렸음을 잊지 말거라."

"걱정 마세요. 숙부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연명이라는 자가 그토록 뛰어난 사내라면, 어떻게 해서든 제가 가지고 말 테니까요."

제갈영영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이제껏 또래 사내아이가 자신을 마다하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마을이 보입니다一!"

마부가 길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덧 제갈창신이 말했던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말들도 곧 있을 휴식을 직감했는지 말발굽 소리가 한 층 더 경쾌해진 것 같았다.

발을 걷고 제갈영영이 창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과연 멀리서 밥 짓는 연기가 구불구불 승천하고 있었다. 끼쳐오는 붉은 빛에 고개를 돌리자 일몰이 막 시작되어 해가 그 몸통을 숨기고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 전체가 붉게 물들어간다.

이제 사천이 코앞이었다.

소녀는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며 괜히 콧바람을 한껏 들이마시고는 머리를 다시 집어넣었다.

< 84화<제갈영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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