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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86화 (86/134)

< 86화<사천지회(3)> >

'엄청난 강자다...!'

제갈창신은 남색 장포의 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가까이에 있으니 알겠다. 상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무척이나 농밀하다. 기감에 뭉툭하게 부딪쳐오는 느낌이 들 정도인데,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감각이었다. 대체 얼마만한 내공을 지니고 있기에...?

"...제갈가의 무량전주가, 당가주를 뵙습니다. 취임을 뒤늦게 축하드리는 것을 용서하시지요. 게다가 적지 않은 성취가 있으셨던 듯한데, 실로 감축드립니다."

제갈창신은 빠르게 낯빛을 가다듬고, 인사부터 올렸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여인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다. 소가주 당연명의 모친, 독봉 당지혜겠지. 젊어 보이는 외양은 반로환동을 거친 것일 테고一 원래라면 쉽사리 믿기 힘든 일이겠지만, 제갈창신은 순순히 납득했다. 저 당연명을 낳은 여인 아닌가. 설사 화경에 올랐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요.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군요. 제갈가에 대해서는 소가주에게 대충 전해 들었어요."

"...그렇습니까."

제갈창신은 조금 당황했다. 당연명이 어디까지 얘기했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고독전에 개입했던 것? 아니면 태을묵검파 등의 손을 빌려 당연명을 처리하려 했던 것? 어찌면 소가주의 자격을 놓고 장로들이 경합 과정을 검증할 때 수를 쓴 것까지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이것 또한 변수....'

문득 제갈창신은 당연명과 엮이기만 하면 무슨 일이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당가주 독봉 당지혜는, 제갈창신이 본 인물 중에 맹세코 가장 강대한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 무위는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내공량이 엄청난 게 분명했다. 무슨 전설 속 영물의 내단이라도 주워 먹은 걸까. 모자가 쌍으로 제갈가가 감당하기 힘든 괴물이었다.

지금이야 사근사근한 말투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과연 하나뿐인 아들을 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냥 넘어갈 어미가 있을까?

제갈창신은 저자세를 고수할 수밖에 없음을 인지했다. 그의 몸이 조금 움츠러든다.

한편.

제갈영영은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당연명에게만 고정하고 있었다. 숙부인 제갈창신과는 달리 가문이 처한 정황을 자세히 모르는 그녀는 그저 당연명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이 어쩜 저리 생길 수 있을까. 날카로운 턱선과 보기 좋게 치솟은 콧대, 길게 뻗은 검미는 범상지 않은 혈통을 방증하는 듯했고,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와 도자기마냥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가 호감을 강요했다. 또한 흑백이 뚜렷한 눈에 희미하게 감도는 진녹색 광채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평생 봐도 질리지 않을 얼굴.'

낭군감으로 합격하고도 남아一 그렇게 제갈영영이 내심 중얼거릴 때였다.

"한데 누군가요? 그쪽 깜찍한 숙녀는...?"

당지혜가 관심을 표했다. 막 당가 내원에 진법을 설치할 계획에 대해 얘기하려던 제갈창신이 반색하며 말했다.

"제 질녀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본가는 허락만 해주신다면 귀가의 산하에 들어가 복속되고자 합니다. 그간 양가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조금 더 우호를 다지자는 뜻에서 데려왔습니다. 후계는 아니지만, 본가 가주께서 아끼는 여식이지요."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가문의 일을 논하고 계시기에, 차마 끼어들지 못했음을 헤아려주세요. 소녀는 제갈영영이라 합니다. 늦었지만 당가주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제갈영영은 다소곳하게 인사를 건넸다. 흠 잡을 데 없는 조신함이 몸에 배여 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여인으로서 타고난 미모一 그걸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을 익히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명가의 규범이나 예법, 말씨나 자세 따위 말이다.

절애화(絶塵花)라는 꽃이 있다. 몹시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는 꽃인데, 절애화가 유명한 것은 아름답다는 이유도 분명 있었지만, 그보다는 깎아지른 절벽에서 자생하는 까닭이 컸다. 쉽게 가질 수 없다는 점이 본연의 아름다음을 넘어 사람들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처럼 꽃은 아름답기만 해서는 의미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할 무력이나 기품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그게 곧 여인의 매력이 되니까一 이게 제갈영영이 어릴 적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제갈창신은 흡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사실 미색이 아름다워 데려오긴 했지만 첩실의 자식이라 조금 못미더운 부분이 있었는데, 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제갈영영에게서는 단기간에 쌓을 수 없는 품위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당지혜나 당연명의 마음을 흔들 수 있지 않을까.

과연 당지혜는 아들을 둔 입장 때문인지 이채를 띠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요. 그나저나 참 어여쁘군요.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제갈 소저를 보고 가슴앓이를 할 청년들이 많겠어요. 나도 소싯적에는 제법 이름을 날렸었는데.... 후후."

"과찬이세요. 당가주께서는 지금도 무척 아름다우셔요. 소녀는 처음에 소가주의 누이이신 줄 알았답니다."

"입에 바른 말인 걸 알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네요."

두 여인은 번갈아가며 서로의 미모를 칭찬했고, 그렇게 분위기 또한 좋게 흘러가는 듯했다.

"..보아하니 우리 소가주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데,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제갈가가 본가의 산하로 들어오게 되면 사실상 한 식구나 다름없으니. 그래, 남매처럼."

당지혜의 말에 제갈영영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제게 소가주처럼 헌앙하신 오라버니가 계시다면, 한량없이 기쁠 것 같아요. 든든하고. 물론 본가에도 오라버니가 계시긴 하지만, 제가 이복동생이라 그런지 큰 정은 주지 않으셔서...."

제갈영영은 말끝을 흐리며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힐끗 당연명을 쳐다보면서. 그가 진정 사내라면, 그녀의 오라비가 될 것을 자청하며 달래주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당연명은 지루한 연극을 구경하듯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모친에게는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미 제갈창신이 경합에 개입했던 일이나 태을묵검파를 이용해 차도살인지계를 꾸민 일등으로 당연명은 제갈가를 그리 곱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문의 방비를 위해 제갈창신을 살려둔 것일 뿐, 또 다시 같잖은 수작을 부린다면 망설이지 않고 관련된 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제갈'이라는 이름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참이었다.

그러한 가문의 여식이 어떤 외양을 하고, 무슨 소릴 하건 당연명의 관심 밖이었다. 친근하게 대할 생각 따위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또한 모친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당연명의 나이를 열다섯으로 알고 있지만, 검신이었던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당연명 아닌가. 정신은 이미 완전히 성숙해 있었다. 제갈영영이 아무리 예쁘장하다한들 그의 눈에는 한낱 여아로 비친다는 얘기다. 아직 덜 자란 육체에 매력을 느낄 리 없다. 심지어 얼마 전엔 당미소의 농익은 나신을 보기까지 했으니....

게다가 아름다움과 무력, 그리고 기품까지 모두 갖춘 여인이 바로 그의 모친이다. 일상적으로 모친을 접해온 당연명으로서는 제갈영영에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당연명의 기색을 가장 빠르게 알아차린 것을 바로 제갈영영 본인이었다.

'어째서...!'

그녀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경우였다. 약관 정도로 보이는 성숙한 외양을 하고 있긴 하지만, 숙부에게 들어 당가 소가주가 그녀와 겨우 한 살 터울임을 알고 있다. 동년배의 사내가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다니?

당연명이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분위기가 금세 어색해졌다.

"흠, 흠! 그래서 계속 말씀을 드리자면, 본가에 설치된 절진과 완전히 같은 형태로 귀가의 내원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일단 건물의 배치를 조정할 필요가...."

헛기침과 함께 제갈창신이 재빨리 말을 꺼냈다.

제갈영영은 난생 처음 느껴보는 수치심과 굴욕감, 그리고 어느새 생겨난 정복욕 따위가 내면에서 뒤섞이는 것을 경험하며 다짐했다.

소가주 당연명, 당신을 꼭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

공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가주전인 암독전을 진법의 중심으로 삼고, 총관부나 의각 등 가문의 중요 조직을 각 진법의 헥으로 삼는다고 했다.

처음엔 제갈가에서도 암독전을 제외한 나머지 전각들의 위치를 이동하거나 보수, 혹은 철거해야 하기 때문에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라 말했지만, 의외로 전각들이 취하는 방위가 진법을 구현하는 데 크게 위배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무영객 그놈이 알고 지낸 방사들이 몇인데. 가문을 세울 때부터 건물 배치쯤은 염두에 두었겠지. 후대에 쓸데없이 건들지 않았다면 진법을 펼치는 데는 장애가 없을 것이다.]

식신 청각이 말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약왕당의 일이 있었던 의각 쪽만 조금 정비하고 곧장 진법의 설치에 들어갔다.

제갈창신을 비롯한 무량전 인물들은 제갈가에서 가져온 이런저런 기물들을 땅에 묻거나 내원 여기저기에 보이지 않게 숨겨두었다.

청각은 그것들이 영성을 지닌 물건들이며, 진법이 반영구적으로 유지되도록 돕는 힘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제갈가 입장에서는 가보나 다름없는 물건일 터였다. 필시 상당한 출혈을 감내한 것이리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연명의 마음이 풀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원래 제갈가를 멸문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정도 성의는 당연히 보여야 하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장장 칠 주야가 지나고서야 제갈창신이 찾아왔다.

"소가주. 당가 내원의 진법 설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귀가는 본가와 같은 수준의 방비를 갖추게 된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보고하는 제갈창신의 안색이 헬쑥했다. 이번에 당가 내원에 설치한 것들은 보통의 진법이 아니었다.

무량정처진 (無量定處陣)

극열초혼진 (極熱焦魂陣)

은영침무진 (隱映針芮陣)

관술영모진 (貫術泳은陣)

제갈가의 진법 비기들이 여러 겹으로 펼쳐져 있었다. 하나같이 공동산의 칠쇄환궁진에 못지 않은 절진들이다.

무량정처진은 들어서는 순간 어떤 전각에 갇히게 되는데, 전각을 빠져나와도 여전히 전각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경공을 펼쳐 빠르게 나오건 전각을 때려 부수고 나오건 소용없다. 말 그대로 무량(無를: 셀 수 없음)의 공간에 매몰되는 것이다. 진법을 파훼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아사하는 수밖에 없다.

극열초혼진은 육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혼백만을 태우는 기이한 열기가 가득한 진법이었고, 은영침무진은 일종의 기관진식과 진법의 혼합진이었는데 엄청난 수의 바늘 침이 보이지도 않고, 감지하기도 힘든 상태로 침입자에게 쏟아지는 진법이었다. 독을 다루는 당가와 궁합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관술영모진은 단순히 하나의 창이 공격하는 진법이었는데, 이 진법 공간 안에서 제갈가의 가보인 신기구겸모(神技飾鐵子)가 유유히 날아다니며 스스로 적을 탐색하고 살상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관술영모진 안에서는 신기구겸모를 결코 피할 수 없었다. 필중의 수법인 관술(貫術)이 걸려있는 까닭이었는데, 제갈가에도 신기구겸모는 단 세 자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처음 겪는 이들은 간혹 이기어창의 수법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자잘한 진법들까지 포함하면, 칠 주야가 아니라 보름이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당연명은 어떻게든 십 일 내로 진법 설지를 끝마치라 얘기했다. 사천지회의 참석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이었다. 가문의 방비가 제대로 갖춰지는 것을 보고 떠나고자 했다.

쓸모를 입증해라_

그 한 마디에 소름이 돋은 제갈창신은 잠을 아껴가며 무량전 인물들을 독촉했다. 그 결과 무려 삼 일이나 앞당겨 일을 마무리 지을수 있었는데, 당연명은 수고했다는 말 대신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거봐. 하면 되잖아?"

제갈창신은 우뚝 선 채로 그저 아연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86화<사천지회(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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