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사천지회(4)> >
사천무림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사천지회의 개회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사파 무인들은 모이기만 하면 사천지회에 관해 떠들어댔다.
'...그러고 보니 이번 사천지회는 심화방에서 주관한다면서?'
'그렇게 됐다는군. 원래 사천지회를 주관할 예정이었던 천진방은 공동산의 혈사로 방주 정연송이 귀천하지 않았나. 정연승이 미처 후계를 정해놓지 않고 그리 떠난 탓에 제자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서로 자기가 정당한 후계라면서. 사천지회를 주관할 입장이 아니지. 다음 차례로 넘어갈 수밖에.'
'다음 차례는 태을묵검파이니 또 건너뛰었겠군. 공동산 혈사의 최대 피해자 아닌가. 듣자하니 피해가 상당하다던데. 아예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고.'
'막인후, 죽은 막 장문이 문파의 정예 병력을 죄다 이끌고 나섰다더군. 공동파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어쨌거나 악수가 되고 말았지. 그 많은 인원이 몰살당했으니 말이야. 태을묵검파로서는 문파의 기둥이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그럼 막 장문이 생전에 확장해둔 태을묵검파의 영역은 곧 무주공산이 되겠군?'
'아니. 그게 또 생각만큼 간단하진 않네. 소식이 빠른 자들은 이미 태을묵검파의 영역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걸 대신 막아준 곳이 있었지.'
'천진방인가...? 막인후와 정연송은 살아생전 막역지우나 다름없을 정도로 절친했으니 선대의 연을 존중해서....'
'아니. 천진방은 지금 후계 다툼으로 인해 제대로 된 명령권조차 확립되지 않은 상태네. 섣불리 병력을 움직일 상황이 아니란 거지. 게다가 태을묵검파 만큼은 아니라도 천진방 역시 방주를 포함한 정예 병력을 일부 소실하지 않았나. 여력이 있다 하더라도 부담스럽겠지.'
'그럼 누가 나섰단 말인가?'
'심화방이라더군.'
'...심화방? 그럼, 설마 심화방주 여설련과 막인후의 염문이 진짜였나?'
'그건 알 수 없지. 꽤나 오래된 일 아닌가. 두 사람이 젊을 때였으니까. 다만 심화방은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입장에서 당분간 방파끼리의 분란을 좌시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네. 얻고자 하는 게 있다면 사천지회를 통하라는 거지. 이번 행사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데는 그러한 이유가 있네. 작지 않은 이권이 얽혀 있으니 말이야. 특히나 태을묵검파의 후계를 노리는 이들이 꽤나 많을 걸세.'
'이권이라... 금번 사천지회는 정말 치열하겠군. 생각해보니 목영궁 역시 궁주와 궁도들을 잃지 않았나? 웬 도사 둘을 쫓다가 그리 되었다던데.'
'뭐...? 목영궁주 장태천이 죽었단 말인가? 언제?'
'소식이 늦군. 성도에서 일어난 참사를 모르나?'
'성도라면, 당가를 말하는 건가?'
'정말 모르는군. 처음부터 얘기해주지. 며칠 전 도복을 입은 도사 둘이 겁도 없이 사천땅에 들어섰다는군. 황색의 도복이었다고 하니 아마 공동파 출신이 아닐까 싶은데, 하긴 육파쯤 되니 자신만만했겠지. 어쨌건 그들은 불운하게도 련주를 조우하고 말았다네. 아예 별볼일 없는 작자들이었다면 련주께서도 조용히 넘어가셨을 텐데, 그중 하나가 제법 실력자였던 모양이야. 바로 일대일 결전이 성립됐다는군. 둘의 대결에서 발생한 기파가 어마어마했다고 해. 인근 방파들이 련주의 강림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게 더 힘들었겠지.'
'허. 련주의 마음을 동하게 하다니... 화경에라도 이른 자였을까. 그래서 승패는 어찌 되었나? 물론 련주께서 승리하셨겠지만.'
'당연한 일이지. 도사 놈들은 패퇴했네. 살아난 걸 보면 제대로 된 무학을 익혔을 공산이 커. 알다시피 련주께선 눈에 차는 무학을 견문하게 해주는 이라면, 설령 적이라 해도 살려 보내시는 일이 종종 있지 않나.'
'자비로운 분이시지.'
'아무튼 련주의 자비 하에 도주하는 도사 놈들을 쫓는 이들이 생겨났네. 련주와 맞상대한 도사는 내상을 입은 기색이 역력했다고 하더군. 결국 남은 도사 하나만 상대하면 된다는 얘기인데... 쫓는 이들의 생각이야 뻔하지. 련주와 손을 섞고도 살아났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된 무학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거니까. 인질로 삼으려 했거나 품에 있을 비급 따위를 노린 것이겠지. 혹은 고문을 통해 구결 몇 마디라도 뽑아내거 나.'
'대부분 어중이떠중이들이었겠군. 불완전한 무학을 익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거늘.'
'그랬을 걸세. 도사 놈들도 도주하다 말고 맞서 싸울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고 하니까. 목영궁주 장태천이 합류하기 전까지는.'
'장태천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그자의 무위는 진짜일세. 설령 상대가 육파의 인물이라 해도 크게 밀리지는 않을 텐데.'
'그 말대로네. 추격대에 목영궁이 합류하고 나서 도사 놈들은 속절없이 도망쳐야만 했지. 장태천 하나로도 버거울 텐데 그를 따르는 목영궁 궁도들도 적잖게 있었다고 하니까.'
'그런데 장태천이 왜 죽었단 말인가? 고작 도사 둘... 그것도 하나는 정상적인 상태도 아니었다면서.'
'도사 놈들이 도망친 곳은 성도였네. 애초부터 거기가 목적지였는지, 아니면 사천땅에서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만한 정도 무가一 당가가 거기 있었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거기서 도사 놈들은 당가의 새로운 소가주를 만났네.'
'당가의 소가주라면, 당연명이라는 아해를 말하는 것이겠군. 들은 적이 있네. 지금은 그 어미인 독봉 당지혜가 가주에 올랐다지?'
'그래.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직후의 일이네. 장태천을 비롯한 추격 인원들이 성도의 코앞까지 들이닥치고, 당가의 소가주는 도사 놈들을 제 가문의 객이라며 뒤로 물렸지. 그걸 본 장태천이 노성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고.'
'목영궁주는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주제에 남이 참견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면모가 있지. 분기탱천했겠군.'
'단 한 수.'
'음?'
'시끄럽다면서 소가주 당연명이 아무렇게나 휘두른 한 수에 목영궁주가 사망했네. 극독이 발린 우모침 하나를 피하지 못해서.'
'뭐...? 그게 말이 되나? 당연명은 고작해야 십오륙 세에 불과하네. 흑사련 휘하 수많은 방파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목영궁의 궁주가 그런 아해에게 당했다고? 다른 당가의 고수가 아니라?'
'당시 당연명을 수행하는 인원은 많지 않았네. 고작 둘. 그것도 하나는 무인이 아니라 상인에 가까운 행색이었다고 하더군. 그날 일을 목격한 성도 양민들이 한둘이 아니야.'
'허어.... 당가의 독이 위력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목영궁주쯤 되는 고수가 한 수에 당할 정도라니.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 게다가, 대단한 암기도 아니고 고작 우모침 하나로 장태천의 기감을 뚫었다? 혹시 내상을 입은 게 도사가 아니고 장태천이 아닌가? 소문이 와전됐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고작 우모침이라.... 장태천은 시작에 불과했네.'
'뭐?'
'궁주가 허망하게 죽었으니 따르던 목영궁 궁도들이 가만히 있었겠나? 소가주 당연명 측은 도사 놈들을 합쳐도 다섯에 불과했고, 추격대 쪽은 일백... 아니, 거의 이백에 달하는 인원이었다고 하니 말일세. 목영궁 궁도들은 다른 이들을 선동하여 달려들었네. 수적 우위가 압도적이었으니 고민할 것도 없었겠지.'
'...지금 설마 그 이백 가까운 인원이 몰살당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감이 좋군? 바로 맞췄네. 당가 소가주가 손을 흩뿌리자 어마어마한 수의 우모침이 하늘을 뒤덮었다고 하네. 그리고 조금 뒤一 소나기처럼 우모침이 내리꽂혔다지. 장태천을 죽인 것과 같은 독이 발려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격대 중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더군. 우모침이 하나라도 박힌 이들은 몇 호흡 만에 숨이 끊어졌다고. 상상이 되나? 이백에 달하는 인원의 명줄을 끊는 데 몇 호흡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게.'
'과장이나 거짓이 있었다 하기엔 당시의 광경을 목도한 이들이 너무 많네. 호사가들이 말하는 것도 대부분 일치하고. 실로 가공할 암기 무학이었다더군.'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몰락한 줄로만 알았던 당가였는데.'
'분명한 건 이번 일로 당가를 주목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일세. 그동안 당가가 차지한 성도를 노리는 이들이 좀 많았나? 련주의 명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성도로 쳐들어갔을 방파들이 수두룩하네. 이번 일은 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한편, 어떤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
'기대라면?'
'소가주가 대놓고 실력을 과시하지 않았나. 당가가 이번 사천지회에 참가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네. 목영궁이 딱히 나서지 않고 있는 것도 그래서겠지. 당가 전체와 맞붙는 것보다는 소가주 하나만을 상대하는 것이 그래도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사천지회에서 당가의 편을 들어줄 이는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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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련의 대소사를 논하는 공간.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중년인들이 여릿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또 왔군.
"백부들!"
벌컥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약관을 좀 넘었을까一 제법 성숙한 태를 풍기는 몸매를 하고 있지만, 깜찍한 인상의 얼굴이 소녀의 나이를 종잡을 수 없게 했다. 몸짓 자체에도 말괄량이 같은 기질이 조금씩 묻어나왔는데, 그녀는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 목에 팔을 가볍게 두르며 말했다.
"이번 사천지회. 저도 참가해도 되죠?"
"무슨 바람이 든 것이냐. 저번에는 재미없다고 개회식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자고 조르더니."
"그때는 인물이 없었잖아요. 다들 뻔하게 생겨가지고는. 명가의 후기지수라면 좀 더 그럴 듯하게 생겨야 하는 것 아닌가? 송옥이나 반안같은 외모는 아니더라도 기품이 흐른다던가...."
"이번에는 있다더냐? 또 다시 이 백부를 헛걸음하게 했다가는...."
"조금 전 저잣거리에 갔다가 얘기를 들었는데, 다들 이번 사천지회는 예년과 다를 거라고 얘기하더라구요? 뭔가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는 것 같기는 했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이번엔 당가의 소가주가 참석한다고 하더라구요. 이름이 특이했는데. 그래, 연명이라는 이름이었어요."
"연명? 유약한 이름이구나. 그래서 그놈은 잘생겼다던?"
"말도 마세요. 성도 외곽에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는 모양인데, 그때 그자를 잠깐이라도 눈에 담았던 여염집 여식들이 모조리 상사병이 났다던데요?"
"...과장이 심하구나."
"아무튼, 저는 그 사내의 얼굴을 꼭 봐야겠어요. 마음에 들면 낭군으로 삼아야지."
소녀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리자, 자리에 있던 중년인들이 모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면면을 알고 있는 이들이 보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광경. 중년인들은 흑사련주 유길준이 흑사파에 들었던 시절부터 동고동락을 함께해온, 흑사련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흑사련주 유길준으로부터 직접 가공할 무학을 전수받아 하나같이 절세지경에 이른 고수들이었는데, 거친 성미와 냉혹한 기질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고작 소녀의 말 한 마디에 온화한 웃음을 피우다니...?
그러나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연희一 그녀는 흑사련주 유길준의 하나밖에 없는 수양딸이 었으니까.
흑사련에서도 두 번째로 존귀한 존재다.
그런 그녀가 사천지회에 참석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당가의 소가주 당연명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며.
< 87화<사천지회(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