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88화 (88/134)

< 88화<사천지회(5)> >

고요하게 여명이 찾아오는 때.

차분히 내려앉은 공기 사이로 정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떠날 채비를 갖춘 이들이었는데, 하나같이 깨끗한 무복을 차려 입고 새벽을 닮은 서늘한 기운을 흘려대는 모양새가 어느 방파에서나 대접받을 듯한 실력자로 보였다.

그들은 바로 당가 장로원 직속의 무력대였다. 건정대와 독검대, 암량대一 각각의 무력대 앞에는 대주로 보이는 인물들이 표정없이 서 있었고, 그런 그들의 앞에는 이장로 당명신과 사장로 당지룡, 그리고 오장로 당명후가 작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로는 어떻게 잡을 생각이오? 곧장 공동을 향해 북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이 크지 않겠소? 금번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것이 심화방이라 하던데."

"결국 심화방으로 결정났나보구려. 하긴 소가주에 의해 태을묵검파와 천진방이 괴멸 직전에 이르렀다 하니.... 어쨌건 이장로의 말씀이 옳소. 본가 북동쪽에 심화방이 위치해 있으니, 가급적 피해 가는게 상책일 것이오. 지금도 사천 각지에서 사도 방파의 후계들이 그곳 으로 몰려들고 있을 테니."

"이장로, 사장로. 그렇게까지 우려할 필요가 있겠소? 이만한 전력이면 웬만한 방파 한둘은 쉽게 격파할 수 있을 텐데. 저기 공동파의 도사께서도 가늠하기 힘든 경지의 고수인 듯하고."

"오장로. 사천지회에 참석하는 것은 각 방파의 어린 후계들에 불과하지만 개회지인 심화방까지 호위하는 병력은 각 방파에서도 정예들일 것이오. 그들 중에는 흑사련주로부터 신공절학을 전수받은 이가 있을 수도 있소. 물론 소가주가 사천지회에 참석하기로 한 이상 대놓고 우리를 건들지는 않겠지만, 마찰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겠지."

"그럼 그냥 우리가 소가주를 호위하는 모양새로 심화방까지 이동하는 것은 어떻소? 명분이 있으니만큼 경계를 사지 않을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생각이오만, 병력의 규모가 과해서 오히려 심화방을 비롯한 사도 세력들을 자극하는 꼴이 될 수 있소. 게다가 심화방에 도착할 때까지는 경계를 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본가로 귀환하지 않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또한 사천의 큰 행사인만큼 흑사련에서 사람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오. 설마하니 흑사련주가 친히 나서진 않겠지만, 그 의형제들 중 한둘이라도 모습을 드러 낸다면...."

"...납득했소. 역시 피해가는 것이 낫겠구려. 그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동쪽으로 이동한 다음 북상해야겠군."

"그렇소. 조금 더 멀리 돌아가는 꼴이긴 하지만, 경공을 부지런히 펼친다면 시간을 꽤 줄일 수 있을 것이오. 오히려 쓸데없는 마찰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니 더 빠르게 도착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

"일찍 도착해야 할 이유가 있소?"

"공동파 현소라는 자가 부탁했소. 예상보다 일정이 너무 지체된 것 같으니 걸음을 서둘렀으면 좋겠다고. 어쩌면 이미 곤륜이 마교와 전면전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군."

"마교라... 노년에 그들과 전투를 벌이게 될 줄은 정녕 몰랐는데. 아무리 후방 지원과 잔당 처리가 주요 임무라지만 영 꺼림칙하구려."

"어쩔 수 없소. 가주께서 지엄하게 명하셨으니 따를 수밖에."

"...난 솔직히 이번 기회에 마교의 손을 빌려 가주가 우릴 제거할 속셈은 아닌지 의심스럽소. 우리는 물론이고 장로원에 속한 무력대도 눈엣가시일 테니."

"그건 아닐 거요. 정말로 우릴 제거할 셈이었다면 소가주가 당가십독을 내어줄 리도 없었겠지. 일독인 무형명산이야 그렇다 쳐도, 질독인 살조화까지 내주지 않았소? 알다시피 살조화는 화경에 이른 고수라 해도 죽일 수 있는 극독이오. 설령 일이 잘못되어 마교주를 조우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살아날 길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지. 다만 의아한 것은 왜 무형명산과 살조화에 대한 권한을 사장로에게만 일임한 것이냐는 것인데...."

"..그런 눈으로 나를 봐도. 나 역시 모르겠소. 검치에 불과한 나보다는 용독술에 조예가 깊은 두 장로께서 맡는 게 훨씬 나을 텐데."

"흠. 그렇소...? 어쨌거나 큰 걱정은 없겠군."

셋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동질감에서 기인한 신뢰가 존재했다. 때문에 이장로 당명신의 눈이 묘하게 번득이는 것을 보고도 다른 두 장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한편.

이장로 직속의 건정대一 그 대열 사이에서 조용히 분노를 삭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원한을 품은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덤덤한 시선으로 공동파 인물들과 얘기를 나누는 당연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자식.'

당문찬은 속으로만 짓씹듯 욕지거리를 뱉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이제는 완전히 소가주의 태가 나는 당연명이었다. 무려 육파의 일익을 맡고 있는 공동파의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 않나.

보고 있자니 또 울분이 치솟는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명가 후기지수의 모습 아닌가. 꼭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만 같았다. 당연명에게 당해 한쪽 팔이 망가진 그로서는 이제 닿을 수 없는 미래.

'반드시 복수한다...!'

당문찬의 눈에 순간적으로 독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그는 당연명이 상상 이상의 고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보였다가는 자짓 경계를 사거나 일을 그르질 수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길지 않아一 그렇게 되뇌며 마음을 다스린다.

하나 문제가 있다. 팔병신에 불과한 그가 어떻게 당연명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일단은 팔을 고쳐야겠지. 마교와 접선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천운이나 다름없어.'

어차피 가문을 등지기로 한 마당이다. 당연명에 대한 원한이 골수까지 치민 당문찬은 가문의 명에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었다. 마교조차 협상의 대상으로 여겼다. 공동과 곤륜의 사이에서 마교에 도움이 되도록 움직인다면...?

듣자하니 마도의 무학은 몹시도 기상천외해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게 하는 것들이 많다 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재생력을 가지게 해주는 무학도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팔을 고질 방도가 있을 지도 모른다.

혹은 당대 마의(魔醫)라 불리는 자一 그자는 잘린 팔도 붙일 수 있다 했다. 역천의 의술을 익혔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오로지 마교주의 명만 듣는다고 했다. 그에게 치료를 부탁해도 되지 않을까.

지근거리에서 이렇듯 모략을 꾸미고 있는 이들이 있는지도 모르고, 당연명은 한가롭게 공동파 인물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럼, 조심히 가시지요."

"그간 정말로 큰 신세를 졌습니다. 소가주. 신경써주신 덕분에 사백의 내상도 빠르게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마교를 치는 일에 힘을 보태주시기로 용단을 내린 것에도 장문을 대신해 감사를 표합니다."

"신세를 졌소."

현소와 태허가 살짝 목례했다. 그들의 몸짓에서 짙은 호의가 묻어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로서는 정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구원을 받은 것이었으니까. 물론 태허가 내상의 악화를 감수하고 손을 썼다면 사파 잡배들에게 당하는 일은 없었겠지만, 그리됐다면 공동파의 전력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을 터였다. 마교와의 전투에서 태허와 같은 절대 고수의 존재는 더없이 귀중했는데, 허망하게 무력화될 뻔한 것이다. 절체절명이라는 말이 옳다.

태허는 여전히 당연명을 찜찜하게 여겼다. 분명 기감으로는 한참 아래의 무위인 것으로 느껴졌는데, 왠지 모르게 흑사련주를 떠오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건 그저 느낌에 불과한 것이라, 태허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무학이 아니라 독공을 익혀서 그런것일 수도 있겠다고 대충 납득하고 넘겼다.

"아닙니다. 응당 해야 하는 일이었고. 귀파에 대한 무력 지원 역시 대가를 받고 움직이는 것인데요. 부디 서로의 약조가 잘 이행되었으면 합니다."

당연명은 손사래를 치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당가와 공동의 공조에는 오고가는 대가가 있음을.

현소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얼른 대답했다.

"...염려 마시지요. 약속된 대가는 본파에 도착하는 즉시 장문의 허가를 득하여 인편을 통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여기 사백께서 승인하신 일이니만큼 허가는 당연히 떨어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다만 금액이 금액이니만큼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본파의 제자들을 동원할 예정이긴 한데, 아무래도 마교와 일전을 앞두고 있어 중견 제자들을 파견하기에는 조금 어려움이...."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접선할 장소와 때를 먼저 알려주시면 본가에서 시일을 맞춰 마중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가주. 그리고 흑사련 쪽 또한...."

현소는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으로 당부를 하고 싶긴 했지만 워낙에 민감한 주제였던 것이다.

당가 소가주 당연명이 일부러 사천지회에 참석해 혼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흑사련 휘하 사파 세력들이 위쪽에서 벌어지는 일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말이다. 특히 정예 병력 대부분을 마교와의 전투를 위해 파견해야 하는 공동으로서는 다른 것보다 사천의 사도 방파들이 비어 있는 본산을 공격해오는 것이 가장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어찌 보면 무력 지원보다 이게 더 중하지 않을까.

"아마 출정하시는 것보다 더 빨리 소식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 역시 심려치 마시지요."

"믿고 있겠습니다."

당연명이 자신있게 말하니, 현소 또한 크게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이번 사천행은 소득이 컸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현소와 태허는 가주인 독봉 당지혜에게 인사를 하고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자 장내에 모인 모든 이들의 눈길이 자연스레 당지혜에게 향했다. 그녀의 입에서 출정 명령이 떨어질 차례였던 것이다.

"모두들."

듣기 좋으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진다. 심후한 내공이 실린 까닭이다. 가주의 자리에 오른 당지혜가 미모만큼이나 뛰어난 실력을 겸비한 존재임을 새삼 실감하며, 자리한 인원들이 귀를 기울였다.

"가규에서도 알 수 있듯一 본가는 언제나 신의를 중요시해왔다. 조력하기로 한 이상 공동과 명운을 함께 한다 생각하고 이번 출정에 임하도록."

평소와 다르게 명령조로 얘기하는 당지혜.

당가의 가규라면, 역시 그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一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예로부터 사천당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한 지를 알려주는 말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들이 얼마나 신의를 중요시하는지를 뜻하기도 했다.

당가주 당지혜의 의미심장한 말에 이장로 당명신과 건정대에 속해 있는 몇몇 인물들의 눈가가 살짝 꿈틀했지만, 이내 평온한 안색을 되찾았다. 그들의 모략을 가주가 알았다면 이렇게 보낼 리가 없지 않나.

그럼, 건승을 바란다一 당지혜의 말에 조용히 손을 모아 예를 취한 뒤, 인원들은 대열을 흩뜨리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분한 새벽 공기에 어울리는 조용한 걸음들이었다. 정문을 나서면 곧장 경공을 펼쳐 질주하겠지만.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 휑해진 공간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연명 아."

"네. 어머니."

"바람이 부는구나."

"풍운(風雲)일까? 이 어미는 네가 어떤 삶을 살건 응원할 생각이지만, 역시 그저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단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았으면 하는구나."

"염려놓으세요. 제가 누굽니까."

누구긴, 독봉의 아들이지一 그렇게 대답하며 당지혜는 웃음을 흘렸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심려를 내비질 때마다 하나뿐인 아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감을 표현했다.

당연명은 마주웃으며 생각했다. 역시 흑사련과 엮이는 것을 걱정하시는 거겠지. 하지만 모친과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었다. 소가주로서 가솔들에게 약조한 부분도 있었고.

흑사련주 유길준에게는 그다지 사감이 없었다. 호승심, 아니 약간의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저 강대해진 흑사련 휘하 세력들을 정리할 필요를 느낄 뿐이었다. 사천지회와 후기지수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그 정도로 흑사련주가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늘 그렇듯, 세상만사란 생각대로만 홀러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 88화<사천지회(5)>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