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사천지회(6)> >
[너, 정말 태어난 지 이십 년이 채 안된 인간이 맞느냐?]
당연명이 혼자가 되자, 식신 청각이 곧장 말을 건네 왔다.
청각은 며칠 동안 당가의 내부 사정을 꽤 깊게 헤아릴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다 풀려난 그는 현 무림 정세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연명에게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묻는다고 해서 당연명이 친절하게 알려줄 것 같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기들끼리 떠드는 가솔들의 이야기나 마침 찾아온 공동파 인물들과 오가는 대화에서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던 까닭이다.
우선 당연명이 소가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 다음으로는 당지혜가 가주의 자리에 앉은 것도 불과 얼마 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당지혜의 진실한 무위一 그녀가 화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는 이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이건 당지혜가 제대로 무력을 드러낼 일이 없었거나, 최근에야 화경에 이르렀음을 의미했다.
청각은 후자 쪽에 무게를 두었다. 당지혜가 반로환동을 통해 젊을 적의 외모를 되찾은 것 역시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는 얘기를 들은 때문이었다. 필시 화경에 이르러 환골탈태와 함께 반로환동을 이루었으리라.
그렇다면, 당지혜보다 당연명이 먼저 화경에 올라섰다고 보는 게 옳다. 어쪄면 당연명이 당지혜의 성취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며칠 지켜보니 모친만큼은 끔찍이 아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동파와의 협상이 오가면서 자연스레 장로원과 그 직속 무력대에 대한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들이 지금 근신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과, 그 이유가 당연명이 소가주가 되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알량한 무력으로 당연명을 찍어 누르려다 되레 당해 죽은 놈도 둘 있다지.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와는 관계없이, 화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라는 의미였으니까. 늙은이들이 무슨 수를 썼건 허망하게 숨이 끊어졌을 터였다. 물론 당연명이 화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그랬겠지만.
보아하니 당연명이 화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그의 모친이자 가주인 당지혜밖에 모르는 일인 듯했다. 이제는 폐맥은취로 완전히 성취를 숨기고 있기에 태허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결국 당가의 위세가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것도 납득이 갔다. 가주 당지혜는 화경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소가주 당연명은 성취를 숨기고 있었으니 사천의 그 어떤 세력도 당가의 진실한 무력을 모르고 있으리라. 공동파 인물들을 쫒아온 사파 무인들이 당가의 영역인 성도를 스스럼없이 침범한 이유겠지.
청각은 앞으로 재밌어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가의 무력이 제대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얕잡아보는 자들이 나올 것 아닌가.
식신이 되었지만 근본이 이매망량인 그는 피가 튀는 살육을 보고 싶었다. 공동파 도사들을 쫒아온 사파 무인들을 당연명이 청각 자신의 독을 이용해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감을 느꼈더랬다.
사천지회에서는 또 어떤 일이 있을까一
아무튼, 그런 기대는 기대고, 청각이 의문을 느낀 것은 당연명의 처세 때문이었다. 공동파 현소와의 교섭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지 않았나.
당연명은 가문 내에서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전력인 장로원과 그 직속 무력대를 마교와의 일전에 지원함으로써 공동파로부터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얻어냈다. 상당히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어찌 보면 분란을 일으킬 여지가 있는 자들을 밖으로 내돌린 것이다. 전력의 감소라기보다는 불안 요소의 제거라고 봐야 합당했다. 게다가 그들이 정말로 마교와의 전투에서 죽어나가기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쁘지 않겠지.
또한 그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당연명도 마음 놓고 가문을 비우고 사천지회에 참석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여기까지는 청각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당연명은 여기서 한 술 더 떴다. 장로원에 출전 명령과 함께 당가십독을 내린 것이다.
장로들로서는 어리둥절한 일이었을 거다. 소가주가 마교의 손을 빌려 자신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수작이라 보기엔 가보인 당가십독의 가치가 너무 컸으니까.
물론 이미 청각을 얻은 당연명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당가십독이 그리 귀하지 않았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아무튼 당가십독까지 내려진 마당이니 장로들은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가문 내에서 신뢰를 회복할 기회라 판단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이대로라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예전의 권세를 되찾지 못할 터였다. 합당한 공적을 세우는 것만이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또한 당연명은 은밀하게 사장로 당지룡을 불러 그에게 몇 가지 당부와 함께 당가십독을 맡겼다.
'사장로. 나는 이장로나 오장로가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쪄면 가문의 명을 따르는 척하며 모략을 꾸미고 있을 지도 모르지. 그대는 이장로와 오장로를 감시해라. 만약 그들에게서 배반의 조짐이 보이면 즉시 내게 알리도록. 혹 마교와의 전투에 차질을 빚을 것 같다면 공동에도 미리 알려 경계할 수 있도록 하라. 당가십독은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이장로나 오장로의 손에 넘기지 않도록 하고. 자짓 그들의 용독술에 그대가 당할 수도 있으니.'
'...소가주. 아무리 대장로와 삼장로가 소가주의 목숨을 노렸다한들, 우리는 평생 당가의 사람으로 살아왔소. 그러한 우리가 가문을 등질 리가 있겠소?'
'그건 그대의 생각이지.'
'...그렇담 소가주께선 본인은 신용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지.'
'사장로. 그대는 본래 검파의 후예라 들었다. 본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오고 나서도 꾸준히 검술을 연마해왔다고.'
'그런 그대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이번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면, 몇 가지 검초를 전수해주겠다.'
그렇게 말하고는 당연명은 허공을 향해 몇 차례 수리검을 획획 그었다. 대충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그걸 보는 당지룡은 격동을 감추지 못했다. 평생 동안 검술을 연마한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당연명이 구사하는 것은 단순히 검법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건 좀 더 근원적인 무언가였다.
'...어찌 소가주께서 이토록 고절한 검초를...?'
'수련하다 깨달았다. 어떤가? 이 검초들을 익히면 그대의 검술은 한 단계 더 발전할 텐데.'
'...소가주의 분부를 따르겠소.'
청각은 당연명의 용의주도함에 혀를 내둘렀다. 단순히 이득을 도모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수를 쓴다. 게다가 상대의 배신마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처세의 수준이 약관도 되지 않은 이의 그것이라 믿기 힘들 정도였다.
무엇보다 청각을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당연명의 검술 수준이었다. 한때 이매망량으로서, 무영객이 천하에서 손꼽히는 검도 고수를 격살하는 것을 수차례 지켜본 바 있는 청각은 당연명이 잠깐 내보인 검초의 수준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무슨 대단한 검법을 펼친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검의 획 하나하나에 영성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정도의 나이에 무영객의 진전을 제대로 이어 화경에 오른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암기 무학과는 별개로 검술 또한 이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차라리 반로환동한 고수가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가정이 훨씬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래서 물은 것이다. 태어난 지 이십 년도 되지 않은 놈이 맞느냐고.
"별 게 다 궁금하군. 한눈에 무학의 이치를 꿰뚫는다는 흑사련주도 있는 판국에. 태어난 지 올해로 열여섯 해가 된다. 곧 열일곱이 되겠지."
당연명은 혼잣말처 럼 답했다.
[…•…]
청각이 여전히 믿기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굳이 그의 의문을 해소해 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검신이었던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흑사 련주라.'
사천지회를 앞두고서 은연중에 그를 의식하고 있던 걸까. 마주할 일은 없을 텐데.
당연명은 자신도 모르게 흑사련주 유길준을 언급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잠시 그에 대해 생각했다.
대종사의 자질을 타고나 아주 빠르게 천하 고수가 된 인물. 스스로 쌓은 무학으로 구파 중 셋一 청성과 아미, 점창을 무너뜨려 육파로 만들었고, 자연스레 정도 세력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섰다.
그래서인지 사도 무학만을 고집했고, 이제는 완전히 사파 세력의 지존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사실상 사천 땅을 사도 천하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평범한 인간이, 그저 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자질만으로 그렇게 우뚝 설 수 있을까. 어쪄면 흑사련주 또한 당연명 자신처럼 무언가 비밀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생각에 빠진 것은 청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용은 아닌데.'
인중롱(人中龍)이라는 말이 있다.
극히 뛰어난 인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청각은 그 말이 왜 생겨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원래 이매망량과 영물 사이의 어떤 존재인 용은, 스스로의 존재를 각성하기 전에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용은 대개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육체적 능력이나 오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렇게 두드러진 자질을 보이는 이를 인중룡이라 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용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극히 드물어졌지만, 여전히 무림에서도 뛰어난 후기지수를 용에 비유하는 일은 왕왕 있었다.
이매망량인 청각은 용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애초에 무영객이 청각을 진고독으로 만들어 데리고 다닌 것도 극독을 수급받기 위함도 있었지만, 용을 찾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용은 상서롭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오히려 인세에 크나큰 재앙을 몰고 오는 경우가 잦았다.
어쨌건 청각이 보기에 당연명은 용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놀라운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런 놈이 나왔을까. 장성하면 무영객보다 더한 놈이 될 것 같은데....'
하늘은 이유 없이 사람을 내리지 않는 법이다一 청각은 예전에 고절한 경지에 이르렀던 방사가 자주 입에 담았던 말을 떠올렸다. 몰락해가던 당가에 당연명이라는, 용에 비견될 정도의 존재가 나타나 그의 봉인까지 풀었지 않나. 무언가 세상에 커다란 액운이 닥치고 있는 징조인지도 몰랐다.
'용이라도 몇 마리 현현하려는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무영객의 절세 비기一 만천화우를 담보로 자유를 얻어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청각은 상념을 털어냈다.
일단은 사천지회에서 벌어질 살육을 기대할 참이었다.
< 89화<사천지회(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