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사천지회(7)> >
"소가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봉위대주 당원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동파 인물들이 떠나고, 다음 수순은 소가주인 당연명의 사천지회 참석이었다. 그런데 당연히 당연명을 따라나설 생각을 하고 있던 봉위대에 당연명이 선언한 것이다. 사천지회가 열리는 심화방까지 혼자 가겠노라고. 괜히 많은 이들을 대동하고 나서봐야 시선만 끌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일리가 있긴 했지만, 사실 이건 봉위대의 존재 의의에 의문을 제기할 만한 일이었다. 소가주를 호위하고 불편함 없이 수행하는 것이바로 소가주 직속 무력대인 봉위대의 책무였으니까. 봉위대의 입장에서는 소수 인원이라도 당연명을 따라나서야 함이 옳다.
"물론 저희야 소가주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세상에는 원래 예상치 못한 일이 종종 생기는 법입니다. 공동파 태허 진인께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하시다 흑사련주를 조우하지 않았습니까. 만에 하나를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호위를 데리고 가심이...."
"아니."
당연명은 단호하게 당원진의 말을 끊었다.
"정말로 흑사련주를 만나게 된다면, 너희들의 수준으로는 그저 일초지적에 불과할 것이다. 허망하게 죽겠지. 나는 내 수하들을 칼받이로 쓰고 싶은 마음은 없다. 조용히 실력을 쌓으면서 가문을 지키고 있도록."
당원진은 침묵했다. 결국 지금 봉위대 수준으로는 당연명의 호위를 자처하기도 힘들다는 의미였다. 입맛이 씁쓰레했다.
가문으로 귀환한 후, 그동안 당연명은 틈틈이 봉위대의 수련을 봐주었다. 당연명의 무력 행사를 목도한 이들은 별 거부감 없이 당연명의 지도를 받았다. 나이가 어리다 한들 소가주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가문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로 추앙받던 장로들을 연거푸 격살했지 않나.
경지에 이른 고수의, 수련에 관한 조언은 그야말로 금과옥조라 할 수 있었으니...!
봉위대 무사들은 대부분 성취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그들은 마광천과의 혈전 후에 소가주 경합이 열릴 때까지 무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절치부심하며 뼈를 깎는 수련을 해온 이들이었다. 가진 재능을 온전히 발현할 만한 노력 따위는 진작에 퍼부은 뒤였다.
당연명은 한눈에 그들의 상태를 꿰뚫어봤다. 노력이 아니라 재능이 부족한 이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천운과도 같은 깨달음이나 한참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고수의 상세한 가르침이었다.
一내력 운용을 더 정밀하게 가져가라. 한 줌의 진기도 낭비됨이 없어야 한다. 대충 위력이 나온다고 그런 식으로 내력을 운용하면 상승의 경지에 오르더라도 제대로 된 고수라 불리기 어렵다.
본 소가주가 암기 무학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암기 자체의 성능에만 기대서는 위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천하에 수많은 병장기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간단한 형태인 검이나 도, 창이 오랜 세월 각광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일단은 수리검이나 비도 같은 간단한 형태의 암기부터 확실하게 다룰 수 있도록 해라. 하나를 다루는 데 완전히 능숙해지면 두 개, 세 개, 네개... 계속 늘려가면서 수련하면 된다. 점점 어려워지겠지만 포기하지 마라. 물론 변칙적인 암기를 쓰면 쉽게 살상력이 올라가니 유혹적으로 느껴지겠지만 진정 암기 무학만으로 상승의 경지에 오르고자 한다면 내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一전투가 항상 유리하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가령 권각술의 고수를 만났다고 가정해봐라. 그들은 익힌 무학 때문에 대개 간격을 좁히는 데 아주 능숙하다. 그러한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어찌할 거지? 신법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대의 신법이 뛰어날 수 있다. 근접해오는 적을 상대할 방도도 마련해두는 것이 당연하다. 늘상 거리를 두고 싸우는 것만을 염두에 두었기에 보이지 않은 것도 있을 거다. 항상 명심해라. 깨달음의 단초는 어디서 얻어질지 모른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수련을 하는 것으로 눈이 트일 수 있겠지.
一암기 무학의 장점은 은밀함이나 거리상의 우위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러 번의 공격을 단 일 수에 쏟아낼 수 있는 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 혼자서 몇 사람의 몫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암기의 숫자가 유효한 만큼 지속 가능한 살상력은 아니지만,
어차피 정도 이상의 고수와 싸울 때는 차라리 한 순간에 뿜어낼 수 있는 무력이 더 큰 것이 유리하다.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실력을 쌓아나가는 게 효율적이 니 참고하도록.
一어찌 보면 암기 무학만큼 합공에 특화된 무학도 드물 거다. 거리를 두고 암기를 쏟아낸다면, 굳이 아군이 맞을 염려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반대로, 그런 염려가 없기에 서로 간의 호흡이 별로 중요시되지 않는 면모도 있는 듯하군. 단순히 같이 공격한다고 해서 합공이 아니다. 마차의 바퀴살이 돌듯 쉼없이 공격이 이어져야겠지. 공격을 당하는 입장에서도 한 순간에 쏟아지는 공격보단 쉼없이 이어지는 공격이 더 부담스러울 것이다. 치졸한 짓이라 생각지 말고 진지하게 합격술을 연마해보도록. 어느 순간부터 공수의 흐름을 자연스레 감각할 수 있게 될 거다.
一본가 독공의 요체는 기본공인 독요청광심법이다. 믿을진 모르겠지만 본 소가주는 그저 독요청광심법 하나만을 익혔고, 또 대성했을 뿐이다. 가문의 다른 심법들은 독요청광심법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지. 물론 그렇다 해서 그대들이 익힌 심법이 무용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끔은 기본으로 돌아가 궁구하는 것도 도움이 될 지 모른다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일 뿐.
一용독술을 따로 익히는 것은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 물론 엄청난 극독을 수중에 지니고 있다면 용독술만으로 상당한 살상력을 보일 수 있겠지만, 어차피 경지에 이른 고수의 기감을 속이고 하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무형독을 제하면 그에 준하는 극독들은 대개 눈에 띄는 색이나 향을 띄고 있으니까. 차라리 암기 무학을 경지에 이르도록 가다듬고 독을 바른 암기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위력적이겠지.
당연명의 거침없는 가르침에 봉위대 무사들은 전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노력을 쏟을 방향을 어렵지 않게 제시했는데, 와중에 가문의 무학에 대한 통찰이 아주 깊다는 게 선명히 느껴진다. 실력 격차가 너무나도 현격하니, 질투나 시기보다는 선망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당가의 가솔로서, 또 암기 무학의 길을 걷는 무인으로서 흠모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든 당연명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그들 사이에서 팽배했다. 밤잠을 아껴 수련하고, 또 수련하는 나날들이 흘렀다.
그러나 의욕이 아무리 앞서도, 고작 보름 정도의 시간만으로 사람이 크게 달라지기는 쉽지 않다. 그들 자신이 느끼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당연명의 눈에는 여전히 봉위대가 수준 미달로 보일 터였다. 칼받이로 쓰기도 힘들 만큼.
그러한 사실을 짐작하고 있기에 지금 당원진이 쓴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이리라.
방법은 없었다. 그저 그들의 주인이 그들을 인정하고 필요로 할 때까지 강해지는 것뿐.
당연명이 말했다.
"너무 섭섭하게는 생각지 마라. 가문을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니 너희에게 맡기는 것이다. 가주를 잘 보필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돌아오기 전에 공동파에서 연락이 온다면 정해진 장소로 마중을 나가 약속된 금전을 받아와라. 지금은 내 호위보다는 그게 더 중요한 일이다. 향후 몇 년간 가문의 재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거금이니."
"알겠습니다. 소가주. 한데...."
"왜 그러지?"
"저희야 동행하지 않는다지만, 사천지회에도 혼자 참석하실 요량이신지...?"
"혼자 가려고 했는데."
당연명은 그게 웬 대수냐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당연명은 사천지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사파 잡배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교분을 다지는 행사 따위, 굳이 참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생각이 바뀐 것은 공동파 때문이었다.
그들이 곤륜과 함께 마교를 치러 간 동안 행여나 흑사련 휘하 사도 방파들이 공동파에 쳐들어오는 것을 우려한 현소가 당연명에게 부탁한 것이다. 마교와의 전투가 끝날 때까지 사천 사도 세력들의 움직임을 억제해달라고.
당연명은 자신있게 약조했다. 흑사련 휘하 사파들이 다른 곳에 눈돌리지 못하게 하겠다고.
장로원 직속의 정예라고는 하나 겨우 무력대 셋을 지원하는 것치고는 꽤나 많은 금전을 타낼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당연명은 현소와의 약조를 사천지회에서 난장을 피우는 것으로 이행할 참이었다. 사천의 유일한 정도 무가인 당가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이 많을 터다. 그들의 시비를 일부러 받아주면서 화를 돋워 최종적으로는 사천지회에 참석한 모든 사도 방파의 후계들과 척을 질 계획이 었다. 당연히 상당 인원은 죽여 없애 분란을 유도할 생각이었고.
그런 자리이니 혼자 참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당원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천지회의 참석 규칙은 소가주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참석자 본인과,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의 호위와 시종을 하나씩 대동해야 하지요. 더 많은 인원을 데려가는 것도 규칙에 어긋나지만, 아예 호위나 시종 없이 혼자 참석하는 것도 규칙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지요. 일부러 트집을 잡아 문전박대를 할 수도 있습니다."
"호오."
당연명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는 당원진의 말에 눈을 빛냈다.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규칙 운운하며 당가의 사천지회 참석을 거부한다면 시작부터 일이 꼬이는 셈이었다. 물론 그렇게 됐다면 당연명은 아예 심화방 전체를 뒤집어 엎었겠지만.
일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던 전생을 기억하는 당연명이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검만 휘두르는 데 썼기에 이렇듯 세력 간의 이해나 위신이 얽힌 상황에서의 처세에 대해서는 당원진과 같은 이들이 더 노련한 면모가 있었다.
"소가주께서 갑자기 사천지회에 참석하시겠다 한 것을 보면, 분명 어떤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순탄하게 사천지회에 참석하시려면, 그들이 내세운 조건을 맞추는 것이 좋을 겁니다."
"호위와 시종이라...."
당연명은 누구를 데려가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약관이 되지 않은 이여야 한다는 제한이 있다 보니 당장 뇌리에 떠오르는 건 역시 경합 칠 조의 인원들이었다.
당이전, 당미려, 당유리.
"게다가 분명 소가주께서는 이런저런 일에 휘말리실 텐데.... 그때마다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시기엔 번거로우실 겁니다. 서신을 전하거나 받는 것부터 여러 잡일들이 있겠지요. 그래도 일가의 작은 주인이신데, 수발을 들 이들을 대동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알겠다. 그 부분은 봉위대주의 의견을 따르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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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발랄해보이는 인상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숙부. 소가주가 참석하는 사천지회. 거기에 제가 동행하면 어떨까요? 가까워지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인 듯한데."
제갈영영은 몸이 달아 있었다. 어떻게든 당가 소가주 당연명과 접점을 만들고자 했다.
당연명은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절세 미청년이었고, 또 생전 처음으로 그녀를 보고도 흔들리지 않은 유일한 동년배 사내였다. 여러모로 그녀의 처음을 가져간 남자인 것이다. 게다가 뒷배경 또한 막강하다. 장차 당가주가 되어 일가를 이끌 것이 거의 확실한 사내였으니까. 배필감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위험할 수도 있다. 사천지회는 평범한 친목회가 아닌 까닭이다."
제갈창신이 덤덤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흑사련 휘하 사파 세력들이 사천의 온갖 이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는 장이다. 방파간의 서열이 그곳에서 결정되는 셈이지. 사도 방파에서는 방주나 문주의 무위가 세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차기로 방파를 이끌어갈 후계의 무위가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면 꼼짝없이 사천지회에서 사냥감이 되기 마련이지. 참석한 후기지수 중 서넛이 목숨을 잃는 일은 다반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당가의 경우에는 그간 가주와 소가주의 자리가 공석인 점을 이용해 사천지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성도의 이권을 노리는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사천의 유일한 정도 무가이니만큼 공공의 적으로 취급될 테고. 괜히 따라갔다 네게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숙부도 참. 이 정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의 마음을 얻겠어요? 아니, 차라리 저는 사천지회에서 무슨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소가주와 사이가 돈독해지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르잖아요? 숙부께서도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속으로는 제가 사천지회에 동행하는 것을 기껍게 여기시는 듯한데...."
"아무튼."
제갈창신은 습관적으로 좌르륵 섭선을 펴 입매를 살짝 가리고는 말했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네 뜻이 정녕 확고하다면, 내 한 번 가주를 뵙고 말씀은 드려보마. 아직 인선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네가 함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부탁드려요. 숙부."
제갈영영은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에 당연명의 진면목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천지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진 모르지만 반드시 당연명의 마음을 사로잡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그녀였다.
< 90화<사천지회(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