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사천지회(8)> >
분홍빛 경장 차림의 여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다. 약간 창백한 느낌이 들 정도로 투명한 피부에, 초췌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누가봐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다. 앉아있는 자태 역시 곱상한 것이, 한 폭의 그림을 그대로 현실로 빼온 듯했다.
한때 사천제일미라 불렸던 당가주 당지혜와 비견될 정도의 절세미녀.
그녀는 바로 당미소였다. 구음의 절맥을 알고 있었지만 당연명 덕분에 몸을 완치할 수 있었고, 요양을 하며 조금씩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입술에는 붉은 빛이 선명하고, 가지런히 모은 손끝에도 핏기가 돌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얼굴에도 왠지 홍조가 도는 듯하다.
당미소의 뒤에서는 동생인 당미려가 머리를 땋아주고 있었다. 어릴 때는 이렇게 서로 머리를 땋아주며 놀고는 했었는데, 당미소의 절맥증이 악화되면서 그럴 수 없게 되었더랬다. 자매는 서로 머리를 땋아주며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문득 당미려가 말했다.
"언니. 또 연명이 생각하는 거야? 숨소리가 살짝 거질어졌는데."
"...미려 너는 무공까지 익혀가지구선 왜 쓸데없이 남의 숨소리나 재고 그러니. 그냥 잠깐 딴 생각을 한 거야."
"그러니까 무슨 생각? 연명이 생각한 거 아니야? 하긴 목숨을 구해준 사내가 장래도 유망하고, 얼굴까지 휜질하게 생겼으니 호감이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지. 아니, 그냥 휜질한 정도가 아니라 절세미남이잖아. 솔직히 그만한 얼굴이면 평생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아. 그치?"
"연명이라니. 아무리 경합에서 인연이 있었다고 해도 무례야. 소가주라도 제대로 호칭하렴."
"우리끼리 있는데 뭐 어때. 그리고 호칭 문제는 이미 연명이가 정리해줬어. 괜히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친구처럼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은공께서 그러셨다면야...."
"언니. 귀가 빨개졌어. 솔직히 말해. 연명이, 좋아하지?"
"아이 참. 언니가 말을 해야 내가 도와주던가 하지. 나같이 든든한 아군이 어딨다고."
당미려의 끈질긴 주궁에 당미소가 잠시 망설이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호감이 없진 않아. 고마운 분이시고. 그분이 원하신다면 내 남은 인생을 드려도 아깝지 않겠다 생각해. 나 혼자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잖아. 미려 네 절맥까지 치료해주신 데다가, 아버지도 요즘 안색이 많이 좋아지신 거 알지? 상단 창설에 소가주께서 신경 써주고 계시나봐."
"그러게. 신세를 지긴 했지."
당미려는 장난기를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명에게는 정말로 갚기 힘든 은혜를 입었다. 하나뿐인 언니의 목숨을 구해준 데다가,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도, 도와준 것을 생색내지도 않는다. 사실 당미려 역시 그 나이대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 주변의 소년들을 조금씩 사내로 여기고 있었다. 생긴 걸 떠나 당연명의 출중한 능력이나 성숙한 면모를 보고 은근한 호감을 품게 된 것이다. 아직 연모한다고 말하기에는 설익은 감정이었다. 그래, 마치 풋사과처 럼.
'하지만 그 녀석은 날 여자로 보지 않아. 나와 언니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천양지차였지.'
당미려는 제법 오랜 시간을 당연명과 보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됐다는 걸.
나쁘게 생각지는 않았다. 풋사랑 따위보다야 하나뿐인 언니가 훨씬 소중했고, 당연명 정도 되는 사내라면 언니를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이어져서 서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당미려는 빠르게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언니의 목숨을 걱정하던 그녀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결말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마음을 접자, 언니인 당미소가 당연명과 연인 사이로 발전할 수 있도록 확실히 밀어주고 싶어졌다. 당미소 또한 외모로는 결코 빠지지 않았지만, 당연명은 외모에 더해 능력과 신분까지 범상치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보다가 다른 여자한테 당연명을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사내라는 족속들은 다가오는 여인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물론 당연명이 그럴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적극적인 구애를 하는 여인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홀라당 넘어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제갈가에서 온 이들 중에 웬 소녀가 있다지.'
당미려는 의각에 들렀다 당이전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당가 내원에 진법을 설치하기 위해 제갈가에서 제갈창신을 비롯한 무량전 인물들을 보내왔는데, 그중에 제갈가주의 딸도 끼어있다고 했다.
제갈영영一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경합 칠 조를 담당했던 무량전주 제갈창신의 질녀이기도 하면서, 제법 발랄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당미려는 왠지 제갈가에서 제갈영영을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갈창신 또한 당연명이 어느 정도의 자질을 지니고 있는지 직접 지켜본 사람 중에 하나니까. 정략혼 따위를 추진하려는 것 아닐까. 어쪄면 제갈영영이 당미소의 연적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당미소의 마음을 어느 정도 확인했으니, 당미려는 적극적으로 둘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셈이었다. 보아하니 당연명은 여심에 무지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 나이에 그만한 무위를 지니려면 머릿속이 온통 무학에 대한 것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게다가 언니인 당미소가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이대로 둘을 내버려뒀다가는 이루어지지 못할 공산이 컸다. 당미려는 이제 어떤 사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한편 당미소가 다시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그렇지만 소가주께서 다시 찾지 않으시는 걸 보면, 이대로 끝인 것이 아닐까. 사내들은 관심이 가는 여인이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추근댄다고 들었는데...."
당미소의 목소리가 힘 없이 잦아들었다. 당미려는 머리를 땋던 손길을 멈추고는, 몸을 일으켜 당미소의 앞으로 가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아냐. 내가 확신하는데, 연명이 개는 분명 언니를 여자로 생각하고 있어. 모친을 대할 때 빼고는 상냥함을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은 녀석이란 말야. 그런데 언니한테는 달랐지."
"소가주께서 상냥하시지 않다고? 더없이 다정하신 분 같던데. 물론 가솔들 사이에 도는 소문은 조금 살벌하긴 하지만.... 원래 풍문엔 과장이 깃드는 법이니까."
"...언니는 연명이를 한참 잘못 알고 있어. 오히려 풍문이 진실에 가까운데.... 뭐, 상관없는 일이려나. 언니한테는 계속 상냥할 테니까."
"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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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연명이 개. 조금 냉정한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꽤 잘해줘. 이전이도 그렇고, 유리도 그렇고, 나도 도움을 받았지. 근본이 나쁜 놈은 아니라는 거야. 오히려 여기저기 호구처럼 당하는 것보다는 그렇게 딱 부러지는 성격이 좋을 수도 있지."
"아니. 아직 소가주께서 날 어찌 생각하시는지도 모르는데...."
"아이 참. 확실하다니까. 날 믿어. 나만큼 연명이를 잘 아는 여자도 없을걸? 그리고 개가 그동안 얼굴 한 번 내비지지 않은 건 신경 쓰지마. 가주께서 계시긴 하지만 가문의 중대사는 소가주인 연명이가 결정하는 부분이 크거든. 그동안 꽤 바빴을 거야. 공동파와 제갈가에서 사람이 오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사천지회에도 참석하기로 했다던데. 준비할 것들이 있겠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당미소가 살짝 안도하는 기색으로 말을 흐렸다. 사실 그녀는 나름대로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눈을 감으면 당연명의 잘생긴 얼굴이 아른거렸던 것이다. 이러다 상사병이 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잠깐."
불현듯 당미려가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둘의 관계를 단박에 진전시킬 만한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언니. 이번에 연명이를 따라 사천지회에 가자."
"갑자기...? 그리고 어떻게? 거기엔 사천에 자리한 방파나 무가의 후계들이 모이는 곳이잖아. 소가주께서야 자격이 있으시지만...."
"방법이 있어. 일단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간만에 연명이나 보러 가자."
저쪽에서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가면 되지一 그렇게 중얼거리 면서 당미려는 언니의 손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섰다. 범인에 가까운 당미소는 저항하지 못하고 당미려가 이끄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얘, 미려야. 잠깐만. 머리랑 옷매무새만 좀 정돈하고...! "
당미소의 다급한 외침이 아스라이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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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라도 좋다고...?"
당연명은 고개를 가웃거리며 물었다. 그의 앞에는 이제 막 여인의 태가 나기 시작하는, 귀여운 인상의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네. 소가주께서 허락하신다면요."
제갈영영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어떻게 웃어야 사내들이 좋아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모나지 않은 느낌으로 활짝 웃되, 치아는 잇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노출하고, 눈매 또한 적당히 휘어져야 한다.
당연명은 그런 제갈영영을 표정 없이 바라봤다. 봉위대주 당원진이 조언한 대로 사천지회에 호위와 시종을 하나씩 데려갈 참이긴 했다. 원래는 경합 질 조의 인원들 중에서 둘을 뽑아 데려가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당이전은 의각 활동 때문에 여유가 없었고, 당유리 역시 부친을 도와 총관부의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당미려에게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고.
가솔들 중에 아무나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천지회는 각 방파나 가문이 위신을 세우는 자리인 까닭이다. 물론 당연명은 거기서 난장을 피울 생각이긴 했지만 굳이 체면이 상할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침 모친인 당지혜가 그를 부르더니 아직 사천지회에 참가할 인선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제갈가주의 여식을 데려가는 것도 고려해보라고 했다. 당연명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도 한때 세가였던 제갈가의 자제인지라 행동거지에서 명가의 태가 났으니까.
적어도 가문의 위신을 깎아먹을 만한 짓은 하지 않을 듯했다.
일단은 얘기를 나눠보고 결정하고자 했기에 이렇듯 제갈영영과 대면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명이 말했다.
"놀러 가는 자리는 아닌데. 위험할 수도 있고.”
"소녀도 알고 있답니다. 사천지회는 평범한 친목회와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군요. 후기지수들이 모여 교분을 다지기보다는 사천의 온갖 이권을 놓고 방파와 가문을 대리해 다투는 장이라고 들었지요. 소녀는 그 이권 쟁탈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을 따름이에요. 어차피 곧 본가는 당가에 복속될 예정이니 한 가문이라 봐도 무방하기도 하고."
사천지회에 동행하고자 하는 사유도 그럴듯했다. 딱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었기에, 당연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행을 허락하려 했다.
그때.
당연명의 기감에 누군가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딱히 봉위대가 제지하지 않는다. 익숙한 기척.
'미려로군. 그리고...?
당미려의 곁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당연명은 그게 다름아닌 당미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녀의 근원적인 기운을 접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한편.
'뭐지?'
제갈영영은 자신이 그렇게 눈웃음을 쳐도 변화가 없던 당연명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눈치 챘다. 냉기가 풀풀 풍기던 안면이 어느새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입매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무엇이 그를 웃게 하는 걸까.
곧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명. 들어가도 돼? 손님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래一 라고 당연명의 대답이 떨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벌컥 문이 열렸다. 뭐라고 대답하건 들어올 생각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랜만이네. 미려."
"응. 한데 이 분은...?"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제갈가주의 여식이야. 무량전주와 함께 왔지."
당미려와 당미소, 그리고 제갈영영一
같은 남자를 마음에 둔 세 여인이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 91화<사천지회(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