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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92화 (92/134)

< 92화<사천지회(9)> >

"그간 격조했습니다. 은공."

당미소가 먼저 당연명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짧은 인사말이었지만 거기엔 여러 감정이 녹아 있었다. 그동안 부름 한 번 없었던 것에 대한 섭섭함과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에 대한 반가음, 여전한 고마움과 조금씩 짙어지는 호감. 그리고 그런 감정들 사이로 피어난 연심이 눈빛을 통해 은은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여인이라면, 아니 굳이 여인이 아니라도 남녀 사이의 관계에 있어 약간의 눈지만 있다면 당미소가 품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은 일일 터였다. 둘을 지켜보던 제갈영영의 눈썹이 미미하게 들썩인다. 당미려 역시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러나 당연명은 다른 두 여인만큼 예민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을 홀로 살았던 기억 때문일까. 원래도 당연명은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에는 익숙지 못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하물며 복잡한 여심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방금 당미소의 인사말에서도 겨우 한 자락一 그녀가 왠지 모르게 섭섭해한다는 것만 알아차렸을 뿐이다. 턱밑까지 솟구쳤던 반가운 음성은 얼떨떨한 그것으로 화했다.

"...은공이라니. 당치 않소. 과한 호칭이니 거두어 주시길. 한데 당미소 소저께서는 어쩐 일로...?"

"기별도 없이 방문해서 송구해요. 손님도 계신데."

당미소는 당연명의 태도나 목소리에서 별로 반기는 기색이 없자 조금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당연명은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오해가 쌓이는 느낌이라 곧장 입술을 뗐지만 뭐라 말해야 좋을 지를 몰라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괜히 음一 하는 침음만 흘렸다.

방 안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당미려는 둘이 하고 있는 양을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역시 둘만 내버려둬서는 관계의 진전이 좀처럼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서로 호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런 기류가 흐르게 되다니....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색함을 깨고 당미려가 말했다.

"반가워요. 제갈 소저. 얘기는 들었는데.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저는 당미려라고 해요. 여기는 제 언니인 당미소구요."

"제갈영영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두 분."

"반가워요. 제갈 소저. 당미소예요."

세 여인은 웃으면서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가식 없이 웃는 것은 당미소뿐이었다. 나머지 눈치 빠른 두 여인은 웃으면서 서로를 탐색하기 바빴다.

특히 제갈영영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당미려와 당미소 자매를 한껏 경계했다.

'뭐야, 저 둘은. 자매가 쌍으로…:

그녀만큼 뛰어나진 않았지만 제갈영영 역시 제법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가주 당연명과 허물 없는 사이인 양 말을 놓고 편히 대하고 있었다. 당연명 역시 그리 기분 나빠하지 않는 눈치였고. 소꿉친구라도 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위험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쌓아 온 정은 때때로 사랑보다 두텁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게다가 당미려의 언니라는 당미소는 또 어떤가.

'...사람이 어찌 저렇게 생길 수 있지.'

탄성이 절로 나오는 미모다. 이미 당가주 독봉 당지혜를 본 적이 있는데, 그녀의 젊은 날一그러니까 사천제일미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때를 오려다 두어도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한평생 미모로는 누구한테도 밀려본 적 없고 그걸 또 가장 강력한 무기로 생각해온 제갈영영이었지만, 당가에 오고 나서는 벌써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둘이나 마주했다.

절세미남인 소가주 당연명까지 생각해 보면 당가의 핏줄에 미형의 인물이 유독 많다고 느껴진다.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송옥이나 반안이 가계에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당미소가 소가주 당연명에게 적잖은 호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진작 간파했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연명 역시 당미소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원가 어긋나는 느낌이 있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소리다. 제갈영영은 어떻게 해서든 이번 사천지회에서 당연명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세 여인 사이의 인사가 대충 마무리되자 당연명이 말했다.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미려, 널 한 번 찾아가려 했는데."

"날? 왜?"

"내가 이번에 사천지회에 참가하는 건 알지? 호위랑 시종을 한 명씩 대동할 수 있다더군. 거기에 네가 동행했으면 좋겠어. 호위 자격으로."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오긴 했는데."

당미려는 느릿하게 대답하면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사천지회는 사천에 자리한 방파들끼리 벌이는 행사다. 당연명이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이긴 했지만, 굳이 외인인 제갈영영 앞에서 언급할 일은 아니었다.

"혹시, 제갈 소저를 데려갈 셈이야? 사천지회에."

"그래.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본인이 자청하더군. 시비 노릇이라도 하겠다고."

"그래…?"

당미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갈영영을 바라봤다. 발랄한 인상의 소녀가 암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당미려는 왠지 그녀가 부뚜막에 올라가기 전의 암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미려가 말했다.

"제갈 소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때요? 사천지회는 보통의 친목회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라요. 온갖 이권을 두고 다투는 장이라, 보기 흉한 광경이 펼쳐질 거예요. 위험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본가의 일이기도 하구요."

걱정해주는 말투였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집안일에 끼어들지 마라一

제갈영영은 조신한 몸짓으로 살짝 몸을 돌려 당미려를 보고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염려는 감사해요. 당 소저. 사천지회가 제법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저도 숙부님께 들어서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사천 무림을 이끌어갈 각 방파의 후계들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저도 참가해보고 싶군요. 이래봬도 무가의 자손이니, 피 좀 튄다고 해서 피하고 싶은 생각도 없구요. 게다가 저희 제갈가는 곧 당가에 복속될 예정이니 가문을 구분하는 것도 딱히 의미가 없는 것 같네요."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뜻이 느껴졌다.

당미려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할 필요성을 느꼈다.

"...음. 솔직히 말하죠. 오늘 우리가 연명이... 아니, 소가주를 찾아온 것은 사천지회에 함께하기 위함이에요. 가문의 위신이 달린 일이기도 하고, 소가주도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 더 편할 거예요. 그러니 제갈 소저가 양보를 해주셨으면 하는데. 아시다시피 사천지회에 참가하는 방파 후계자가 동행할 수 있는 인원은 두 명으로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음. 그건 소가주께서 결정하실 일 아닐까요...?"

제갈영영은 그렇게 말하며 당연명을 쳐다봤다. 그러자 제갈영영뿐만이 아니라 당미려와 당미소도 당연명을 향해 눈을 돌렸다.

[여난(女難)이군. 클클]

식신 청각이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여인들이 당연명에게 내보이는 호감이 명확하게 보였는데, 당연명은 그쪽 방면으로는 둔감한 것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간 보아왔던 노련한 처세나 통찰력과는 괴리가 있어 괜히 우스웠다.

'...왠지 웃음이 기분 나쁜데.'

당연명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세 여인이 모두 자신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니 결정을 내려줘야 했다.

"그러니까, 모두 사천지회에 가고 싶다는 거로군. 자리는 둘 밖에 없고.... 한데, 당미소 소저는 왜...?"

당연명의 갑작스런 물음에 당미소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소가주와 함께하고 싶어서요一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건 입에 담기에 너무 부끄러운 얘기였다.

한편 언니가 쩔쩔매는 모습을 본 당미려가 대신 말했다.

"내가 가자고 했어. 놀러가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사실 네가 있는데 크게 걱정할 일은 없잖아? 성도 바깥으로 나갈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좀 친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아, 그리고 언니가 가지 못하면 나도 안 갈래."

당미려는 말을 끝내면서 나름대로 승부수를 던졌다. 제갈영영이냐, 우리냐...!

"그래? 어쩔 수 없지."

당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일까.

"그럼 호위는 따로 구해야겠군."

"뭐? 지금 제갈 소저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그래."

당연명은 덤덤하게 말했다. 사실 그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번 사천지회에서는 공동과의 약조 때문에라도 난장을 피워야 했다.

여러 사파 후계들과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 그런 난장판에 당미소가 조금이라도 얽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존재 자체를 사파 잡배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당미소는 구음절맥을 오래 알았고, 치료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좀 답답하더라도 아직은 요양이 필요할 때였다. 무엇보다, 형식적이라고는 하나 호위도 아닌 시종 노릇을 시켜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얘기를 당연명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왜 제갈영영을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해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여인들은 굳이 선택의 이유를 캐묻지 않았다.

제각각 나름대로 오해를 할 뿐一

'...은공께서는 나보다 제갈 소저가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야.'

당미소는 그렇게 체념했다. 사실 당미려의 말을 듣고 조금, 아니 꽤나 설렜더랬다. 소가주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니. 솔직히 그녀도 여인인지라, 당연명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반면.

'정말 날 택했다고...? 내가 더 마음에 든다는 거지, 지금?'

제갈영영은 제갈영영대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묘한 우월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티 나지 않게 눈동자를 굴려 당미려를 보니 예상치 못한 결과에 제법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당미소 역시 풀죽은 얼굴이었고.

'됐어. 이제 사천지회에서 어떻게 잘 자빠뜨리기만 하면....'

제갈영영은 흡족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일부러 조금 놀란 표정을 유지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당미려가 나섰다.

"…안 돼."

"음?"

당미려의 난데없는 말에 당연명이 의문을 표했다. 갑자기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말인가.

"나도 갈 거야. 사천지회."

"…안 간다면서?"

"생각이 바뀌었어.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기분이거든."

"무슨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사천지회에 가겠다는 거지? 이제 번복하지 마라."

"응. 언제 출발할 생각이야?"

"인원이 갖춰졌으니 망설일 것 없겠지. 내일 바로 길을 나서면 될 것 같은데."

"봉위대는? 수행하려면 그들도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할 텐데."

"가문에 남아 있으라 했어. 수련이나 하면서. 괜히 많은 인원이 이동하면 시선만 끌 테니까. 길잡이 정도만 데려갈 생각이야."

"하긴. 일리가 있네. 알겠어. 그럼 내일 보자. 동틀 무렵에 오면 되지?"

"그래."

"가주께는 미리 인사드려야겠네. 언니, 그만 가자."

당미려는 왠지 넋이 나간 것 같은 당미소를 잡아끌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멍청이 같은 놈. 무슨 생각으로 언니를 거절한 거야? 정말 저 여우같은 계집애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없었다. 언니가 비틀거리자 대번에 염려 가득해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는 당연명은 동정심이 많은 인간이 아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몸조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당 소저."

"...예. 감사해요. 소가주께서도 보중하시길."

서로 연심을 품은 남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보는 당미려만 속이 탈 뿐이었다.

어쨌건.

우여곡절 끝에 사천지회로 가는 인원이 정해졌다.

당가 소가주 당연 명과, 호위 당미 시종 제갈영영.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들은 사천지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 92화<사천지회(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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