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사천지회(10)> >
아직 어스름한 새벽.
소가주 당연명의 거처에서는 불빛과 함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이건 네가 부탁한 단장열지독이야. 다른 독도 많은데 왜 매번 이걸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이전은 투덜거리면서 갈색 독병 몇 개를 건넸다. 단장열지독은 한 방울만 삼켜도 오장이 끊어지는 통증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극독으로, 경합 당시 당이전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당연명은 그때부터 단장열지독을 주로 써왔고, 익숙해져 있었다. 우모침으로 대충 어느 정도를 찍어 바르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 또 의식만 잃게 할 수 있는지 터득한 것이다. 더한 극독은 굳이 필요치 않았다. 이제 식신 청각이 있으니 그의 독기를 부여하는 것만으로 단장열지독은 당가십독에 버금가는 극독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당이전으로서는 나름대로 혼자 고안해 낸 독이었기에, 조부인 의각주 당호열을 제하고는 단장열지독의 조제법을 공유하지 않았다.
들어가는 재료에 비해 살상력이 너무 뛰어난 이유도 있었고, 조제하기 쉽지 않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극독의 조제법은 가문에서도 엄중히 다루는 게 옳다. 괜히 외부로 유출되기라도 한다면 사달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즉, 당연명이 단장열지독을 부탁할 때마다 그가 직접 시간을 내서 조제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당호열은 의각의 일로 바빴으니까.
갑자기 사천지회에 간다면서 단장열지독을 준비해달라기에 당이전은 며질 동안 꽤나 서두르고서야 겨우 시일을 맞출 수 있었다. 괜히 생색을 내는 것은 그래서다.
"고맙다. 이전."
"아니, 뭐. 감사 인사를 받으려는 것은 아니고. 다름 아닌 소가주의 명이신데 따라야지. 그리고 이거."
당이전은 품에서 웬 가죽 주머니를 꺼내더니 당연명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가 우모침을 쓰는 방식을 고려해서 용기를 개량해봤어. 우모침우였지? 세침류 암기 수백 개를 소나기처럼 흩뿌리는 암기무학 말이야. 생각해봤는데, 단순히 독병에 우모침을 담갔다 빼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일단 독의 낭비가 심하잖아. 한두 개도 아니고 수백개의 우모침을 그렇게 쓰니 몇 번이면 양이 제법 줄어들겠지. 독액의 깊이가 달라지면 오차도 생길 테고."
출수를 서두르다 독액이 몇 방울이라도 튀면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一 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키는 당이전이었다. 당연명은 극독을 무슨 영약처럼 들이켜고도 문제가 없는 놈이었으니까.
당연명은 당이전이 내민 가죽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한쪽에 주둥이와 마개가 달려있는 것이, 사막을 횡단하며 교역을 한다는 상인들이 들고 다니는 물주머니와 비슷한 형상이다.
"독낭(毒囊)이라는 거야. 그냥 가죽 주머니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간단히 만들어진 물건은 아니야. 그 안에 독액을 채운 다음, 겉면을 우모침 같은 세침류 암기로 찔렀다가 빼면 깔끔하게 독이 발릴 거야. 또 구멍이 뚫렸다고 해서 독이 주머니 밖으로 새어나오는 일은 없어. 시험해 봐."
당이전의 말에 당연명은 독낭의 마개를 열고 그 주둥이를 통해 단장열지독을 흘려 넣었다. 독병 두 개 분의 단장열지독을 모조리 털어 넣고서야 주머니가 제법 팽팽해졌는데, 당연명은 곧장 품에서 우모침 하나를 꺼내어 푸욱 박았다 빼 보았다.
"오."
당연명은 나직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사실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당이전의 말대로였다. 우모침은 독낭에 박혀들었던 깊이만큼 깔끔하게 독이 발렸다. 확실히 낭비가 줄어들 것 같았다. 게다가 내부가 무슨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모침을 박아 넣었던 구멍으로 독이 새어나오지 않았다.
"아예 독낭에 우모침을 박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뽑아 쓰는 방식이 유용할 거야. 꽂아 넣는 과정이 생략된 만큼 출수가 조금이나마 더 빨라지지 않을까."
"확실히."
당연명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는데, 생각 외로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고맙다."
"아니, 고마운 걸로 치면 내가 더하지. 조부님의 목숨을 빚졌는데 말야. 아무튼 의각은 걱정 말고, 사천지회 잘 다녀와. 너야 별 일 없겠지만, 미려랑 제갈 소저도 잘 지켜줘."
"그래."
"그리고 가주님의 허락이 떨어져서 무형명산의 조제법을 봤는데, 시일이 제법 걸리겠더라고. 과연 당가십독이랄까. 여간 까다로운 게아니야."
당이전이 무형명산을 입에 담았다. 무색, 무미, 무취의 무형독이자, 당가십독 중에서도 일독이라 불리는 무형명산一 당연명은 당가십독이 보존되어 있던 독중독고에서 그 조제법을 가지고 나온 바 있었다. 당가십독 중에서 가장 살상력이 뒤떨어진다고는 하나, 그래도 무형명산은 당가십독이다. 웬만한 고수들이라 해도 무형명산에 중독되면 살아남기 힘들다고 봐야 했다.
그런 극독의 조제법이니 아무리 당연명이 소가주의 신분이고 당가십독을 관리하는 입장이라 해도 독단으로 유출할 수는 없다. 가주인 독봉 당지혜의 허가를 득하여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라도.
사실 조제법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극독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약재나 독초의 상태, 그리고 독성에 따라 배합을 조절할 수 있는 감각과 실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연명은 확신했다. 당이전이라면 무형명산을 조제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방면으로 당이전의 재능이 아주 비범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확인했으니까.
"세월이 좀 걸리는 건 상관없어. 만들 수 있지?"
"응. 의각이 좀 자리를 잡고 나면 제대로 파고들어 보려고. 말했듯이 까다로워서 그렇지, 못 만들 정도는 아니야."
"그럼 됐어. 천천히 해."
당연명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의각의 인재들은 아직 어리고, 어차피 무학에는 큰 재능이 없는 이들이다. 약이나 독을 조제하고 다루는데 자질을 보일 뿐. 하지만 그들은 장차 의각주가 될 당이전의 수족이나 다름없고, 또 당연명 자신에게 충성할 이들이었다.
지금이야 약왕당이 무너지고 의각이 신설된 탓에 가문 내부에서 별다른 힘이 없지만, 당연명은 그들에게 힘을 쥐여 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무력...!
세월이 걸릴 뿐이지, 언젠가 당이전은 무형명산의 조제에 성공할 터였다. 그리되면 양산도 가능할 지도 모른다.
약과 독을 다루는 데 익숙해서인지, 의각의 인물들은 대개 용독술에는 제법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그들에게 용독술을 부단히 익히게 하고, 종래에는 무형명산으로 무장케 한다면...?
웬만한 무력대보다 월씬 뛰어난 살상력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一 혹은 그 사실을 숨기고 가문의 비밀 전력으로 남기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서. 당연명은 자신이 계속 가문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번 사천지회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성(城)을 넘어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유비무환이라지 않았나.
어쨌거나.
둘은 그 뒤로도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고, 서서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
밤새 굳게 닫혀 있던 당가의 정문이 작게 열리고, 네 사람이 빠져나왔다.
사내 둘과 여인 둘이다.
사내들은 검은 무복에 죽립을 쓰고 있었고, 여인들은 마찬가지로 무복 차림에 얼굴 반절을 가리는 면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사천지회에 참가할 당연명 일행이었다. 사내 하나는 심화방까지의 길잡이를 맡은 암왕대원이었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았을 때.
죽립 사내 둘 중 젊은 쪽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잠시."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당연명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진녹색으로 빛났다. 그가 독요청광기를 동원할 때의 전조다.
화아아악一!
당연명의 기감이 순식간에 거미줄의 형태로 뻗어 나간다. 거의 반경 삼십 장(대략 90m)에 이르는 범위. 그 방대한 영역이 통째로 당연명의 감각 하에 들어왔다. 이제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움직임은 낱낱이 파악된다.
말할 것도 없이 감각도 주사망역이다.
당연명은 지금 폐맥은취로 스스로의 성취를 봉인하고 있는 꼴이었기에 이 정도가 한계였다. 원래라면 백 장의 범위를 감각할 수 있는 주사망역을 상시로 펼칠 수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걸로 충분했다.
당연명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스르르 공중으로 녹아든다.
신법 암영을 펼친 것이다. 움직임이 살수 문파의 비기마냥 은밀하기 짝이 없다. 당연명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셋은 그가 신법을 발휘했음을 알아차렸다.
'...소가주의 무위가 보통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사천지회까지의 길잡이를 맡은 암왕대 소속 장길은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소가주 당연명이 사라지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장로들을 압도하는 광경을 직접 봤으니 소가주의 무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듯 기감에 잡히지도 않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신법을 대체 얼마나 고절하게 익혔기에....
'만약, 소가주가적이라면....'
장길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는 오싹함을 느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상대는 언제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감에 잡히지도 않는 존재가 펼치는 살수를 어찌 피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건 무인으로서는 최악의 죽음일 터였다. 한평생 갈고닦은 무위를 제대로 내보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숨통이 끊어지는 것이니까.
그렇게 장길이 짧은 상념에 빠져있을 때였다.
'잘생긴 용모만큼 실력도 빼어나다더니....'
제갈영영은 눈을 크게 뜨고 당연명이 있던 자리를 봤다. 그녀는 당연명의 무위에 대해서 듣기만 했지 직접적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엄청난 신법이었다. 제갈영영은 무공을 깊게 익히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는 눈마저 없지는 않았다. 땅이 팬 것도 아니고, 굉음이 들린 것도 아니다. 제갈가에서 가장 뛰어난 고수라는 그녀의 부친, 제갈가주라도 이런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한다.
숙부인 무량전주 제갈창신이 몇 번이고 강조했던 말이 떠오른다. 당연명이 당가를 일으켜 세울 거라고. 사천당가가 다시 세가로 불리게 되고, 또 사천제일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 했었다.
'과장이 아니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낭군으로 삼아야 해.'
새삼 제갈영영의 눈이 결연한 빛을 띤다. 그리고 당미려는 그런 제갈영영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당연명은 다시 허깨비처럼 일행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가공할 신법.
당미려가 묻는다.
무슨 일이야?"
"염탐하던 쥐새끼가 셋 있어서."
당연명은 별 거 아니라는 듯 건조하게 답했다. 사천지회에 참가하기로 한 이상 가문의 동태를 살피는 사파 잡배들이 있을 거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괜히 이동 경로가 알려져서 가는 길이 번잡스러워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굳이 동틀 무렵에 길을 나선 것이다. 당가의 정문을 지켜보는 이들을 찾기 쉬울 테니까.
과연 예상대로였고, 당연명은 그들의 뒷목을 단장열지독이 발린 우모침으로 한 차례씩 찔러주었다. 찌르자마자 곧장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아마 지금쯤은 모두 숨이 끊어졌지 않을까.
"장길이라 했지."
"예. 소가주. 하명하십시오...!"
당연명의 부름에 장길이 왜인지 기강이 제대로 잡힌 목소리로 답했다.
"돌아갈 것 없이 가장 빠른 길로 안내하도록. 심화방까지 말야."
"명을 받듭니다. 그럼, 덕양(德陽) 쪽으로 길을 잡겠습니다."
그렇게 장길이 앞장서고, 나머지 셋이 뒤따랐다. 성도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는 마차를 이용하지 않을 참이었다. 괜히 주의를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므로.
사박거리는 발걸음이 연신 이어진다.
일행의 머리 위 오른편으로는 어느새 투명한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 93화<사천지회(1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