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현양문(3)> >
'구린 냄새가 나는군.'
당연명은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죽립 속에 감춰진 그의 두 눈이 주변을 무심하게 훑는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양민들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제법 잘 감추고 있었지만 화경에 이른 당연명의 기감을 피할 순 없었다. 폐맥은취로 성취를 제한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건 기감의 범위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천은 이미 사도 천하나 다름없는 판국이다. 저들은 누구기에 정체를 숨기고 현양촌에 잠복하고 있는 것일까.
당연명은 잠깐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곧 그건 아니라고 단정지었다. 가문을 나서자마자 염탐하던 쥐새끼들을 죽여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동 경로 또한 안내를 맡은 장길이 즉석으로 결정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이질적인 기운을 품은 이들은 죽립과 면사로 얼굴을 가린 일행을 보고 경계의 눈초리를 하긴 했지만 전혀 알아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의외로 그들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은 쉽게 풀렸다.
[마기 (魔氣)로군.]
'마기?'
식신 청각의 말에 당연명이 반문했다. 물론 마기가 무엇인지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마기란 마도 무학을 익힌 이들의 독특한 진기를 이르는 것이지 않나. 단지 처음 접해봐서 그런 것이다. 당연명은 전생에 심산유곡에서 검의 끝을 보고자 수련에만 매진했지, 무림과 엮인 일은 없었으니까.
[마기를 모른단 말이냐? 흠, 하긴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청각은 예상 외라는 듯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여태 당연명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수십 년을 산 늙은이가 반로환동한 것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듯 마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역시 강호 경험이 일천한 애송이일 뿐인가 싶었다.
'마교의 잡졸들이 여기는 왜 온 것이지.'
[난들 알겠느냐. 그저 몇 놈 잡아서 족쳐보면 될 일이다.]
청각은 실소를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당연명은 찜찜함을 느꼈다. 사천지회로 가는 목적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마교 때문이지 않나. 곤륜과 공동이 공조하여 마교를 치려 하는 중인데, 성도와 가까운 마을에서 마교의 흔적이 발견됐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명은 내색하지 않고 일단 대장간으로 움직였다. 보아하니 일행들은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현양촌 여기저기에서 양민의 탈을 쓰고 있는 마교도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기운을 감추는 데 아주 능숙했다.
"어서 옵쇼!"
대장간에 들어서자 야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우렁찬 목소리로 당연명 일행을 반겼다. 그는 일행이 죽립이나 면사로 얼굴을 가리는 것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무복을 입은 넷이 모두 아무 병장기도 패용하지 않은 것을 보고 눈을 빛낼 뿐이었다.
당연명이 말했다.
"검을 보러 왔는데."
"검객이셨군! 자, 이쪽에 진열되어 있는 것이 모두 검이오.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래봬도 성도의 웬만한 물건들보다 월등히 뛰어 날 거요."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곳 텃세 때문에 여기 현양촌에 자리 잡은 것이오一 라고 덧붙이는 야장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당연명은 일전에 상단 창설 문제로 성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바 있었다. 와중에 공동파 현소와 태허를 만났었고.
그때 본 성도 야장들이 만든 검과 비하면 장식 따위가 없어 확실히 투박한 느낌이 있었지만, 당연명은 검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단조와 담금질이 제대로 된 검들이었다.
"큰 소리 칠 정도는 되는군."
당연명은 검을 하나씩 들어 검끝을 살짝 손가락으로 퉁겨 보며 말했다. 검이 얼마나 충격을 잘 흡수하는지 잔떨림으로 파악하는 작업이었다. 그 모습을 본 야장이 눈을 크게 치떴다. 이런 식으로 검을 판별하려면 매번 같은 강도로 검을 쳐야 할 뿐만 아니라 미세한 진동을 온전히 느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야 했다. 상승의 경지에 이른 검도 고수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늉 따위가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본 야장의 눈이 기묘한 흥분으로 빛났다.
"이거, 오늘 이놈을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야장은 으숙한 곳에서 기다란 목함을 하나 꺼냈다. 곧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목함이 열리자 당연명을 제외한 일행은 깜짝 놀랐다.
살벌한 예기를 풍기는 검 한 자루가 두툼하게 쌓인 헝겊 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이건, 내 사부께서 남기신 유훈 같은 물건이외다. 구 할 쯤 완성하시고는 지병 때문에 숨을 거두셨지. 내가 유지를 이어받아 마저 완성했는데, 어떻소? 이 정도면 필생의 역작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지...?"
"개안했소. 세상에 이런 검이 있다니...."
"...당장 명검으로 이름을 떨쳐도 이상하지 않겠네요."
"검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예기에 가슴이 서늘할 지경인데, 검객들은 아주 환장을 하겠어."
야장의 말에 장길과 제갈영영, 당미려가 한 마디씩 찬사를 뱉었다. 그러나 야장의 눈은 오로지 당연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뛰어난 검객이 분명한 당연명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듯.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는 자식이 크게 인정받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법이다. 야장인 그에게 이 검은 애지중지 키워 온 자식이나 다름없었으니.
검을 판매하고 말고와는 별개였다.
마침내 당연명의 입이 열렸다.
"흘륭한 검이다. 이름은?"
"참마(新魔 ) 참마검이오. 스승께서 지으신 이름이지."
마(魔)를 벤다一 무슨 연유로 검명을 그리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만한 예기라면 어떤 마(魔)라 해도 능히 벨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확실히 명검의 반열에 들어갈 만한 검이었다. 그러나 당연명은 이내 참마검에서 눈을 뗐다. 검객으로서는 분명 탐이 나는 검이었다.
예(銳: 날카로움)의 묘리가 상시로 발현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병장기 아닌가.
그러나 이번 생은, 가급적 검을 들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더랬다. 평범한 삶을 위해서. 지금은 그저 눈속임용으로 쓸 평범한 검이 필요할 뿐이었다. 가끔 사용할 수도 있으니 적당히 튼튼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리라.
그때였다.
"...저번에 내가 분명히 가장 좋은 검으로 달라고 했을 텐데."
뭐야, 그 검은一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인상을 와락 구긴 채 들어서는 소년이 있었다. 주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뒤로는 호위 병력과 시종으로 보이는 사내까지 대동한 것이 여간 귀한 신분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야장이 크게 당황하며 말했다.
"공자님. 이건...."
"아아. 됐어. 와 보길 잘했군."
소년, 연소청은 신경질적으로 야장의 말을 끊었다. 그는 지금 기분이 심히 좋지 않았다. 며칠 전 생일날, 바라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보라는 조부의 얘기에 진검을 갖고 싶다 말했다. 돈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외조부와 부친은 그가 진검을 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허락을 구한 것이다.
마침 연소청이 대력심법과 흑사검법을 대성에 가깝게 익혔기에, 현양문주 남진순은 흔쾌히 진검 사용을 허락했다. 남진순이 허락하니 연우중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소청은 바로 대장간으로 달려가 가장 좋은 검을 내오라고 얘기했다. 야장은 제법 번듯한 검을 몇 자루 내오더니 그게 자신의 역작이라 말했고, 연소청은 그중 마음에 드는 한 자루를 구입해 패용하고 다니고 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연소청의 발육이 남달랐기에 그럭저럭 장검을 어울리게 찰 수 있었다.
오늘 연소청은 현양촌 내부에 들어온 외부인 넷에 대한 얘기를 우연찮게 들었다. 이남이녀로 구성된 그들은 죽립과 면사를 쓰고 있어 아무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현양촌의 실세인 현양문의 차기 문주로 유력시되는 연소청은 호기심이 들었다. 뭐 하는 자들이고, 어떻게 생겨먹은 놈들일까. 그들이 대장간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연소청은 수상쩍은 일행을 쫒아 대장간으로 오게 되었는데, 이게 웬걸? 야장 놈이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검을 놈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기다란 목함에 들어있는 검은, 대충 보아도 비범하기 짝이 없는 예기를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연소청은 배신감과 괘씸함을 느꼈다. 한낱 야장이 감히, 겁도 없이 현양촌에서 자신을 속이다니?
이건 일벌백계로 본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본 공자를 우롱하다니."
"아니, 아닙니다. 공자님. 오해입니다...!"
야장은 기겁하며 빌었다. 현양촌에서 현양문의 눈밖에 나면 멀쩡히 살기 힘들었다. 특히나 현양문주 남진순이 총애하는 외손자, 연소청은 나이는 어리지만 독한 심보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죽인다고 말했으면 정말로 죽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당연명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소년 뒤편으로 늘어서 있는 호위 병력, 그리고 그 주변으로 퍼지듯이 은신해 있는 수많은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기감으로 그들이 다가온다는 것쯤은 눈지 채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서른 명인가.'
요상한 일이었다. 소년에게서는 그다지 대단치 않은 기운만이 느껴졌다. 사실 나이에 비해서는 꽤 깊은 성취를 이루고 있었지만, 당연명의 눈에는 그냥 지극히 평범한 수준으로 보일 뿐이었다. 문제는 소년의 주변에 은신하고 있는 서른 명에게서 짙은 마기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은밀하게 기운을 숨기고 있었지만, 당연명의 기감을 피해갈 순 없었다.
저벅저벅.
소년은 겁도 없이 당연명에게 걸어오더니 짓씹듯 말했다.
"비켜. 저 야장 놈을 당장 죽여야겠다."
"아니면, 네놈부터 죽여주리?"
당연명이 비키지 않고 멀뚱히 서 있자 연소청이 위협적으로 내뱉었다.
"어린 놈이 입이 거칠군."
"뭐?"
"가치를 지닌 보물에는 걸맞은 임자가 있는 법이다. 네 녀석의 수준으로는 이 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적어도 이십 년은 더 고련하고 와라."
"이 새끼가!"
연소청은 격분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휘두르려 했다. 아직 대성하진 못했지만 그의 흑사검법은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해 부족한 완력은 대력심법이 충분히 보완해주고도 남는다. 웬만한 청년 고수들이라 해도 연소청 자신의 검을 당해낼순 없으리라.
그러나 연소청이 검을 뽑기도 전에一
뻐一억!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연소청의 신형이 뒤로 우당탕 튕겨나갔다. 신법 암영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당연명이 연소청의 이마를 향해 중지 손가락을 튕긴 것이다. 널브러진 연소청의 이마에는 손톱 크기의 자국이 꽤 깊게 남아 있었다. 실로 굴욕적인 광경.
"공자님!"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호위 병력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스르릉 검을 뽑고 당연명 일행을 포위했다. 그러나 당연명은 물론이고, 장길이나 당미려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호위 병력들은 한미한 무가 출신인 듯 변변찮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장길이나 당미려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 제갈영영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눈을 빛내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이, 꼬맹이."
당연명은 겨우 정신을 차리는 연소청을 불렀다. 인상을 한껏 쩡그린 연소청이 뭐라 욕지거리를 내뱉으려고 할 때, 당연명이 이어서 말했다.
"너. 마교랑 무슨 관계지?"
그 순간.
거짓말같이 곳곳에서 스스슥 솟아나는 그림자가 있었다.
무려 삼십에 달하는 마교 천월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96화<현양문(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