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현양문(4)> >
"뭐, 뭐야. 갑자기 어디서 이만한 인원이...?"
"방금, 봤어? 땅에서 솟아났잖아...! 저자들, 정녕 사람이 맞나?"
"언제부터 숨어 있었던 거지? 전혀 눈지 채지 못했는데.”
"눈이 달렸으면 서 있는 자세를 봐. 척 봐도 터무니 없는 수준의 고수들이잖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당연해."
"그보다, 좀 전에 저 치가 마교를 입에 담았는데.... 설마?"
"멍청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신강도 아니고 사천 한복판에 무슨 마교야. 일단 공자님을 지켜."
연소청의 호위 병력들은 혼란 속에서 우왕좌왕했다. 당연명 일행에 대한 포위를 풀고 사위를 경계하며 뒷걸음질쳤다. 난데없이 나타난 이들一 그들은 전원 얼굴을 반쯤 가리는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심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무언가 살아있는 존재를 보는 것 같지 않다고 해야 할까.
또한 다들 팔다리를 꽉 동여맨 무복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옷자락 스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게 할 요량인 게 아닌가 싶었다. 허리춤에는 기다란 검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는데 손잡이와 검집이 모두 흑색이었다. 무언가 신분을 짐작할 만한 단서는 검집에 은색으로 새겨진 '월(月)'자 뿐이었다. 천마신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라면 그것이 천월대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 정도 식견이 있는 자가 없었다.
"뭐야. 이것들은...?"
연소청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교와 무슨 관계냐는 당연명의 물음에 호응하듯 모습을 드러낸 복면 사내들.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왜 자신의 주변에 있었던 걸까. 설마 진짜로 마교의 인물들인 것일까? 그렇다면 숨어 있는 이들을 감지하고 또 그 정체를 짐작해 낸 저놈은 대체...?
머릿속이 복잡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연소청은 부친인 연우중의 진실한 신분에 대해서 조금도 들은 바가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 많구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복면 사내들 중 하나가 말한 것이다.
"감히 본교를 멸칭으로 부르다니."
갑작스레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깔린다. 당연명을 제외한 모두가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설마했는데 정말로 마교의 인물들이란 말인가...?
동시에 연소청의 호위 병력들 중 몇몇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조금 전에 '마교' 운운하며 떠들어댔던 이들이다. 스스로의 경솔함을 후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무림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몇 가지 금기가 있다.
그중에 천마신교와 관련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 앞에서는 절대로 '마교'라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건 멸칭이었다. 적어도 그들 앞에서는 '천마신교'나 '신교'로 칭해야 했다. 자칫 말 한 마디 잘못해서 그날로 제삿날이 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정도 무림인들도 웬만큼 무위에 자신이 있는 이들이 아니고서는 대놓고 마교라 부르지 못했다. 특히나 지금은 마광천이 크게 세를 떨치고 있었으니,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그들의 뿌리가 바로 천마신교 아닌가.
하지만 흑사련이 지배하는 사천에서는 아무래도 그러한 금기에 대한 주의가 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위 무사들도 무심코 그리 호칭했을 것이다. 직전에 당연명이 마교라 언급한 것도 있었고.
그래, 실수라 볼 수 있었다.
문제는 강호에서의 실수는 종종 죽음으로 직결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죽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빛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섬득한 절삭음이 여러 차례 들린다. 복면 사내들一 천마신교 천월대 무사들이 벼락처럼 검을 내지른 것이다. 검기를 두른 검은 인간의 피륙과 병장기를 가리지 않았다.
불과 한 호흡.
구분하기 귀찮았던 것일까. 천마신교에 대한 멸칭을 입에 담지 않은 이들에게도 검이 휘둘러졌다. 연소청의 호위 병력들은 모두 신체가 두세 토막으로 절단났다. 좌우나 상하로 양분된 이들이 많았는데, 피와 내장을 후두둑 쏟으며 쓰러지는 광경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실로 잔혹한 검초였다.
이내 비릿한 혈향이 번졌다.
살아남은 것은 연소청과 그의 몸종 뿐이었는데, 둘의 반응이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몸종 사내는 겁에 잔뚁 질린 표정인 반면, 연소청은 떨지도 않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방금 천월대가 펼친 것이 흑사검법보다 훨씬 뛰어난 상승의 검법이라는 것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일까.
"연 공자를 모셔라."
처음 입을 열었던 천월대 무사가 말했다.
그러자 다른 천월대 무사들이 연소청에게 다가갔다.
"이쪽으로."
연소청은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어떤 적의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어떤 존중을 느꼈다. 공자라는 호칭만 봐도 그랬다. 가공할 실력을 지닌 천마신교의 인물들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들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연소청의 신병을 확보하고 나서, 천월대 무사가 당연명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들. 정체가 뭐지? 그리고 너. 어떻게 우리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냐?"
그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천월대의 은신은 완벽에 가깝다고 자부했다. 마기 또한 드러나지 않게 갈무리해두었고. 상대가 화경에 이른 절세 고수라면 모르겠지만, 그의 기감으로 살펴본 바 당연명 일행은 그리 대단한 성취가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간파해 낸 것인지 의문이었다. 특이한 감각도나 안법을 익힌 걸까.
'꼬맹이는 모르는 모양인데. 관계는 있어보이는군.'
당연명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천월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연소청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전혀 존재를 몰랐던 것처럼. 반면 천월대는 공자라고 불러가며 연소청을 쟁기는 모습을 보였다. 일방적인 관계라는 얘기다.
"마교 놈들이 여기서 뭘 꾸미는 거지?"
"...방금 죽은 놈들을 보고도 경각심이 들지 않나?"
천월대 무사는 조금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방금 천월대가 펼쳐내는 검격을 보고도 저따위 멸칭을 입에 담다니. 죽고 싶은 것일까...?
"경각심은 그쪽이 없는 것 같은데."
당연명은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천월대 무사들이 내뻗은 검격. 그 한 수로 그들의 실력을 대강 파악한 뒤였다. 제법 뛰어난 수준의 검객들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검신의 영역에 다다랐던 당연명의 눈에는 한참 아래의 하수로 보일 뿐.
한편.
'맙소사.'
길잡이를 맡은 암왕대 무사 장길은 당연명을 보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소가주는 대체 어쩌자고 저들을 이리도 자극한단 말인가.
장길은 지금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이곳 현양촌으로 길을 잡은 것은 순전히 그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곳에서 마교도들을 맞닥뜨린 것이다. 만약 여기서 소가주인 당연명이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그는 가문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셈이 될 터였다.
'이건 위험하다.'
당연명이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장로들까지 무릎 꿇릴 정도이니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방금 저 마교도들이 보인 한 수는 장난이 아니었다. 장길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一 라고 생각해보고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교도들은 무려 서른 명에 달했다. 그 모두가 방금 전의 검초를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의 검객이라고 가정해보면, 이쪽의 승산은 그야말로 희박하다는 것이 장길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독과 암기의 이점을 가져가기에도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이었다. 적과의 거리는 짧고, 공간도 비좁았으니까. 그렇다고 도주가 용이한 것도 아니었다. 당연명이 도주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타들어가는 장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연명은 계속 천월대를 자극했다.
"몰랐으면 모르되, 마교 잡졸들이 사천 땅에서 무언가 모략을 꾸미는 것을 알고도 그냥 넘어갈 순 없지."
"뭐? 잡졸...? 허, 이제 보니 아주 정신이 나간 놈이었구나. 되었다. 그냥 죽어라."
결국 천월대 무사는 이 건방진 죽립 사내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몇 가지 호기심 때문에 살려둔 것이었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살심만 커졌다. 그래, 알고 보면 시신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적지 않다. 일단 죽이고 보자.
그는 직접 처리할 셈으로 검을 뽑아들고 다가갔다.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경계하지도 않았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수준은 그리 대단치 않았으니까.
"주인장."
"예, 예...!"
당연명의 부름에 야장이 황급히 대답했다. 그에게선 처음의 호탕한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현양문의 소문주로 유력시되는 연소청의 분노를 사는가 했더니, 갑자기 마교도들까지 튀어나온 마당이다. 더군다나 끔찍한 살해 현장까지 보고 난 직후이니 범인에 불과한 그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만 계속 할 뿐이었다.
"검을 좀 빌리지."
당연명은 대답도 듣지 않고 참마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파(劍槪 검 손잡이)를 말아쥐자 느껴지는 감촉이 반가웠다. 제대로 된 장검을 쥐어보는 게 얼마만이던가. 동시에 참마검이 명검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단순히 날의 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게 배분이 완벽에 가까웠다. 검은 단순히 무겁거나 가볍다고 좋은 것이 아니었다. 검극부터 검파까지의 무게 배분이 적절해야 했다. 그래야 휘두를 때는 제대로 가속이 붙고, 상대의 검격을 맞받아치거나 흘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참마검은 검신의 잣대로도 합격점이었다.
한편.
당연명이 암기가 아니라 검을 쓰려는 듯하자 장길과 당미려, 제갈영영이 모두 우려와 의아함이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당연명이 검을 익혔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대장간에 온 것도 그저 눈속임용 장검을 사러 온 것이었지 않나.
반면 상대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검객이었다. 대체 어찌 상대하려는 것이지...?
"제법 좋은 검이기는 하다만, 결국 병장기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실력 차이는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이지."
천월대 무사는 살짝 비아냥거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자 한 순간에 그의 기세가 돌변한다. 무언가 상승 검법을 펼치려는 모양이 었다. 주변 대기가 미묘하게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재밌지 않나?"
당연명은 별다른 기수식도 없이, 그저 검을 늘어뜨린 채 입을 열었다.
"검명이 참마(新魔)다. 마치 이 상황을 예견하고 지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끝까지 잡설을 늘어놓는군. 시답잖은 우연일 뿐이다. 그만 죽어라."
천월대 무사는 그리 말하며 거세게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그의 신형이 전방으로 쇄도한다. 동시에 응축된 기세가 폭발하며 검이 매섭게 쏘아진다. 안법이 뛰어나지 않은 이들 눈에는 그저 은빛 섬광이 대기를 가로지르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그렇게 검이 지근거리에 달을 때까지도, 당연명은 움직이지 않았다.
'끝났군.'
천월대 무사는 확신했다. 이미 회피가 가능한 순간은 지났다. 아직까지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반응조차 하지 못한 것이리라. 아마 목이 뚫리고 나서야 깨달을 것이다.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도했다. 죽립 아래로 살짝 드러난 놈의 눈一 진녹색 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내뻗는 검격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 것처 럼.
그렇게 섬찟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놈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97화<현양문(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