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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98화 (98/134)

< 98화<현양문(5)> >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다.

절체절명의 순간一 자신도 모르게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며 온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감각을 느끼는 것. 주마등 역시 이러한 감각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이러한 순간을 범인들보다 훨씬 자주 겪는다.

목숨을 걸고 다투는 생사결을 치를 때.

혹은 수련 중 어떤 깨달음을 얻어 완전히 몰아에 빠졌을 때.

한계를 넘어선 집중력이 '인지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키고一 확장된 인지력은 찰나라는 순간마저 분절하여 인식하기에 이르는데, 이때 거짓말처럼 시간의 흐름이 더뎌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인지의 영역일 뿐이다.

느리게 유영하는 시간 속에서, 사고의 속도에 맞춰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가는 또다른 문제였다. 완성된 신체와, 그것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 그리고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의지력 따위가 필요했다.

천월대 무사가 제법 뛰어난 검수이긴 했지만, 당연히 그러한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때문에, 그는 그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한 죽립 사내의 검一 참마가 검기를 두른 채 내질러지는 그의 검을 아무렇지 않게 잘라내고, 또 그대로 팔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오는 광경을 말이다. 천월대 무사의 눈에는 검의 탈을 쓴 죽음이 시시각각 닥쳐오는 것으로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이건 완전히 다른 시간축을 잣대로 살아가는 존재 아닌가一 천월대 사내의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목에서 화끈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 였다.

콰당一!

머리를 잃은 시체는 검을 내지르던 자세 그대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목의 절단면에서는 피분수가 푸싁 치솟고 머리통은 발치에서 구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연명은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참마검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천월대는 천월대대로, 당연명 일행은 일행대로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천월대는 천마신교의 무력대로서, 구성원 전원이 상승의 경지에 발을 들인 검도 고수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방금 전 당연명의 일검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죽음을 직감하고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던 사내만이 겨우 인지했을 뿐. 천월대 무사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연 저 자리에 있었던 것이 자신이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천월대 만큼의 안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길이나 당미려, 제갈영영도 방금 당연명이 휘두른 검격이 하루이틀 검을 익혀서는 나올 수 없는 한 수라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그 마교의 정예 검객으로 보이는 이를 단번에 참살하지 않았나. 암기 무학만 익히기도 바빴을 텐데 대체 어느 틈에 검술까지 연마한 것인가 싶었다.

"다음."

당연명이 말했다. 그러면서 살짝 검을 들었는데, 그 간단한 움직임에 스물아홉의 천월대 무사들이 모두 움찔했다. 경계심이 극에 달한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아니, 귀찮으니 그냥 전부 덤벼라. 보아하니 입을 열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네놈들이 왜 여기 왔는지는 거기 그 꼬맹이를 문초해보면 단서가 나오겠지."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설마 여기 전력이 전부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쓸데없이 허장성세는. 너희 정도 놈들이면 열 수레가 더 있어도 문제없다."

당연명이 실소하며 말했다. 검을 든 이상, 자신에게 머릿수는 크게 의미없었다. 그저 몇 번 더 검을 휘두르면 된다.

"안 오면 이쪽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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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말에 천월대 무사들이 황급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어느새 당연명의 신형은 사라진 뒤였다. 대성에 이른 신법 암영이 펼쳐진 것이다. 다시 당연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들의 코앞이었다.

슈슈슈슉 ㅡ !

순식간에 검들이 한곳으로 모인다. 당연명의 존재가 기감에 걸려들자마자 천월대 무사들이 검을 내지른 것이다. 과연 검도 고수들다운 쾌검식이었다. 가히 빛살에 비견될 만하달까. 반격이나 회피하는 것도 쉽지 않아보였다. 이번엔 검이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당연명은 느릿하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눈에는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같았는데, 묘하게 움직임에 여유가 있었다.

곧 금속음이 터졌다.

타다다다다당一!

천월대 무사들의 검이 당연명의 참마검과 부딪치며 나는 소리였다.

'무슨 검로가...!'

당연명에게 검을 내질렀던 천월대 무사들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경악이 어렸다. 당연명은 지금 느릿한 검초로 그들이 펼쳐낸 쾌검식을 모조리 막아내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 후발제인(後發制人: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려 적을 제압함.)도 정도가 있을진대...!

'완전히 상리를 벗어난 검로다. 어찌 이런 자가....'

무슨 대단한 검법 같은 것을 펼치는 게 아니었다. 그저 검초 하나하나에 현묘함이 녹아 있을 뿐이다. 그냥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휘두르는 것이리라 대체 얼마나 고명한 검객이기에 이렇게 방어초를 펼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한편.

'고작 이 정도 수준이군.'

당연명은 일부러 천월대 무사들의 검격을 받아주었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무위와는 별개로 그들의 검술 경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예상은 했지만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아직 검법의 형(形)조차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걸음마조차 제대로 떼지 못한 아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당연명은 문득 생각했다. 검귀였던 사부가 활동하던 때보다 무림의 검술 수준이 퇴보한 것일까.

홀로 심산유곡에서 수련했던 검신은 스스로가 상식 밖의 존재라는 자각이 부족했다.

착 (着)

당연명은 검에 착의 묘리를 실었다. 참마검에 달은 천월대 무사들의 검이 그대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파 (破).'

당연명은 연이어 파의 묘리를 실은 진기를 천월대 무사들의 검으로 흘려 넣었다. 그들의 검은 각자의 검기로 보호받고 있었기에 허무하게 깨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당연명이 흘려넣은 진기를 해소하기 위해 천월대 무사들은 약간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당연명에게는 십여 번의 검격을 쏟아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스스스슷 !

안법을 연마한 이들도 눈으로 쫒기 힘든 쾌검이 벼락처럼 질주한다. 햇빛을 받은 참마검은 여러 각도로 번뜩였다.

그리고 당연명 주변에 포진해 있던 천월대 무사 열일곱은, 약속이라도 한듯 움직임을 멈추더니 신체 여기저기에 시뼐건 혈선이 그려지며 쿵 쿵 쓰러졌다.

"...이런 미친."

기어이 천월대 무사들 사이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이 누구인가. 강자를 숭앙하는 천마신교 내에서도 무려 정예 무력대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천월대였다. 그런데 곤륜과의 방파 대전도 아니고, 이런 작은 마을에서 객사하게 생긴 것이다.

"일단 연 공자라도 피신시켜...!"

"문초한다고 했을 텐데."

당연명은 연소청에게로 걸어가며 검을 휘둘렀다. 연소청 주변에 있던 천월대 무사 둘이 검기를 두른 검을 세웠지만, 예(銳)의 묘리로 한 층 더 날카롭게 벼려진 참마검에 병장기째로 몸이 두 동강났다.

기가 막힌 일이다. 서른에 달하던 천월대 무사는 이제 열 명밖에 남지 않았다. 전멸이 불을 보듯 뻔했다.

천월대 무사 중 하나가 다급히 말했다. 연소청의 몸종 사내의 목덜미를 잡아 끌면서.

"너!"

"네, 넵!"

몸종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겁먹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복면 사내들이 천마신교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최대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연소청에게는 왜인지 공자라고 칭하며 호의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 호의가 자신에게까지 해당될 것 같지는 않았다. 복면 사내들은 연소청의 호위 병력도 거리낌없이 죽여버렸지 않나. 그들 역시 현양문의 일원이었음에도.

아무튼 그래서 몸종 사내는 연소청과도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그 덕에 천월대 무사가 접근할 수 있었다.

"당장 장원으로 뛰어가서 연 대인께 알려라. 공자께서 위험에 처했다고. 다른 말은 할 필요도 없다. 얼른 뛰어가라!"

천월대 무사는 몸종 사내의 귓전에다 대고 그렇게 말하고는 대뜸 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몸종 사내는 악! 소리를 내며 앞으로 거의 고꾸라질 뻔했지만 양손을 써서 기다시피 하며 겨우 균형을 잡고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당미려가 물었다.

"쫓을까? 아니면 죽여...?”

"됐어. 놔둬. 그냥 양민이다."

당연명은 굳이 도주하는 사내를 잡지 않았다. 당미려에게 말한 대로 그는 무림인이라기보다는 무공 하나 모르는 양민에 가까웠던 데다가, '연 대인'이라는 자가 핵심인물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마교도가 조력을 청하는 자이니 당연히 그도 마교와 관련이 있겠지.

"꼬맹아. 연 대인이라는 자와는 무슨 관계지?"

"...내 부친이시다."

"말이 짧군."

당연명은 손가락으로 연소청의 왼쪽 어깨를 짚었다. 파(破)의 묘리를 실은 진기가 연소청의 몸으로 파고든다. 두두두둑 뼈가 잘게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거의 동시에 연소청이 어깨를 움켜잡으며 아악一 비명을 질러댔다.

아직 아이에 불과하긴 했지만, 연소청의 심성이 악독하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 챈 당연명이었다. 참마검을 보여주지 않았다면서 야장을 죽이려 들지 않았나. 평소 행실이 어떠했을지는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험했다.

"반대쪽도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처신해라. 검객에게 어깨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을 텐데."

"허억, 혁.... 죄송, 합니...다."

연소청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폭력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뒤따르는 굴욕감에 그의 얼굴이 벌게진다.

그 모습을 보며 당연명이 혀를 찼다.

"존대가 익숙지 않은 모양이군. 아비가 어찌 가르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너희."

당연명은 남은 천월대 무사 열 명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살려줄 생각 따위 없으니 어서 덤벼라."

"...하나만 묻겠다."

천월대 무사 중 하나가 나섰다.

"사천에 그대와 같은 검객이 있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사문이 어디지? 설마 흑사련주와 관계가 있나?"

그들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믿기 힘들지만 천월대 서른 명이 있을 때도 당해내지 못한 상대다. 이제 와서 고작 열 명으로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다만, 죽을 때 죽더라도 누구에게 죽는지는 알고 싶었다. 아니, 구체적인 정체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어느 방파 출신에게 죽는 것인지는 알아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당연명은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당연하지 않나. 지금도 일부러 당가 출신임을 숨기고자 검을 쓰고 있는 마당인데.

"유언은 끝났나? 그럼 죽어라."

당연한 얘기였지만 천월대 중에 당연명의 일검이라도 받아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참마검은 그 이름대로 마교도들을 가차 없이 베었다. 연소청은 어깨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면서도 당연명이 검을 쓰는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이 바로 거기 있었다.

당연명은 돌아서며 말했다.

"네 아비가 오는 모양이다."

쿠웅一!

멀리서 굉음과 함께 분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 98화<현양문(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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