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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검신급 소가주가 되었다-99화 (99/134)

< 99화<현양문(6)> >

선두에 있는 사내一 서른 중반 정도로 보이는 자의 내력이 대단했다. 한 번 발을 딛을 때마다 땅바닥이 움푹 꺼지며 쿠응 굉음이 터진다. 발바닥 용천혈로 쏟아내는 진기가 그만큼 막대하는 방증이다. 그 뒤로는 수십에 달하는 검은색 인영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연우중과 칠십의 천월대 무사들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내려선 연우중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이 가득하다. 일단 형식적으로 아들 연소청의 호위를 맡겨두었던 현양문 무인들이 보인다. 천월대의 솜씨였다. 무언가 죽을 만한 짓을 저질렀겠지. 버러지들의 죽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문제는 비밀리에 연소청의 진짜 호위를 맡고 있던 천월대 무사 삼십 또한 모조리 죽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실력은 누구보다 연우중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을 자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웬만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텐데.

'...대부분이 일검에 당했군.'

상흔을 보면서도 납득하기 힘들다. 원래 실력의 우열이 있더라도 무인들 간의 싸움에서 승패는 좀처럼 예측하기 어렵다. 워낙에 변수가 많은 까닭이다. 일검으로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변수들이 무용할 정도로 실력의 격차가 크다는 뜻이다.

'저자가 그 정도로 강자란 말인가?'

연우중은, 늘어뜨리듯 검을 들고 선 죽립 사내를 바라봤다. 다른 죽립인들은 병장기조차 패용하지 않고 있었으니, 손을 쓴 것은 검을 든 사내 하나일 것이다. 그렇담 천월대 서른을 혼자 감당할 정도로 고수라는 얘긴데, 이상하게도 기감에 느껴지는 바로는 그다지 강한이가 아니었다.

"아버님...!"

연소청의 부름에 그제야 연우중의 눈길이 아들에게로 향했다. 천월대가 당한 것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 연소청의 안위였다. 연우중 자신과 천월대 일백이 이런 작은 마을에서 십 년이 넘게 썩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차후 연소청이 현양문을 이어받고, 흑사련의 수뇌부에 진입해 궁극적으로는 유길준의 사후 흑사련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대계를 위해서였다.

"감히...."

연우중은 이를 갈아붙였다.

연소청은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마 중앙에는 무엇 때문인지 작은 크기로 시퍼런 자국이 남아있었고,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적잖이 고통스러워보였다. 뼈나 혈맥이 상한 것일까. 만일 장애라도 남게 된다면 앞으로의 일에 크나큰 차질이 생긴다. 연우중의 눈에 불뚱이 튀는 것도 당연하다.

"네놈이 지금 누굴 건드렸는지 알고 있느냐."

"마교."

"뭐?"

죽립 사내의 대답에 연우중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자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천월대가 죽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마기를 완벽에 가깝게 갈무리할 줄 아는 이들이었다. 익힌 무공 또한 마공의 특징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검공이었으니, 상대했다고 해서 이쪽의 정체를 눈치 채기는 힘들다고 봐야 했다. 천월대가 따로 정체를 발설했을 리도 없었다.

현양문의 일이 가진 중요성을 알고 십 년이 넘게 숨어 지냈던 이들이니까.

"...본교 천월대를 알고 있나?"

연우중으로서는 상대가 천마신교 무력대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는 자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천월대가 패용하고 있는 검집에 은색으로 새겨진 '월(月)'자를 알아본 것이 아닐까.

"잡졸들을 뭐라 부르건 관심없다. 마기를 품고 있는 놈들이 온 마을에 가득한데. 그걸 알아본 게 신기한가?"

연우중은 침묵했다. 그러니까, 양민으로 변장하고 있는 교도들도 알아봤다는 얘기 아닌가. 그들이 품고 있는 마기는 한 줌 정도로 아주 미약하다. 극히 뛰어난 기감이 아니라면 알아차릴 수 없을 텐데...?

"너 또한 시커먼 마기를 품고 있군. 뒤의 놈들보다 훨씬 더한데. 네놈이 대장격일 테니 묻겠다. 이곳에서 마교는 대체 뭘 꾸미고 있는거지? 흑사련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연우중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설마했는데 죽립사내는 그가 마공진기를 숨기고 있는 것까지 알아차린 것이다. 연우중은 빠르게 판단했다. 저자는 고수가 맞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무위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단신으로 천월대 삼십을 몰살시킬 정도라고 상정하는 게 옳다.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연우중의 눈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죽립 사내가 상정한 대로의 고수라면 사실 싸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나, 이미 십 년이 넘는 세월을 투자한 현양문을 버리기 아까운 것은 둘째치고, 흑사련주의 귀에 천마신교가 사천 땅에 숨어들었었다는 사실이 들어가면 곤란했다.

구체적으로 무얼 하려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더라도, 흑사련의 영역인 사천에서 무언가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흑사련주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다. 자짓 방파 대전의 구실로까지 번질 수 있는 일이다. 마도 천하를 위한 대계를 준비하고 있는 시기에, 흑사련과 부딪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구파가 육파가 된 뒤로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 세력의 숨통을 틔워주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결심을 내린 연우중이 말했다.

"천월대 전원. 연가의 이름으로 역혈마공(逆血魔功) 사용을 허한다."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연우중의 뒤에 도열해 있던 천월대 무사들의 기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기파가 그들 사이로 들불처럼 번진다.

화아아아아아악—

천월대 무사들의 눈에서는 어느새 귀하(鬼火)가 일렁이는 듯했고, 그들의 전신에는 검푸른 불길 같은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심상치 않은 광경이었다.

”역혈 마공...!”

"소... 공자. 위험합니다. 아무래도 역혈마공만큼은 피하시는 것이...."

제갈영영은 기겁했고, 장길은 당연명을 말렸다. 그 와중에도 장길은 당연명의 신분이 탄로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호칭을 바꿔 불렀다.

”저게 역혈마공..."

당미려는 제갈영영과 장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놀란 기색이었다. 들은 바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마광천에서 당가로 쳐들어 왔을 때. 가주를 비롯한 가문의 고수들이 속절없이 당한 이유가 역혈마공 때문이라고.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장길이나, 마광천의 활동 영역인 호북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제갈가의 여식인 제갈영영은 아무래도 역혈마공의 등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도 무학으로 무위를 쌓아올린 이들一 통칭 마인들은 대체로 마기라 불리는 마공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이 마공진기는 그 자체로도 폭발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특히 역혈마공이라는 수법을 통하면 마기가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여 일시적으로나마 평소의 몇 배나 되는 힘을 낼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이때는 아픔을 느끼는 통각도 마비되는데, 어지간한 상처는 그냥 무시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물론 아무 대가 없이 이런 힘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한 번 역혈마공을 시전하면 지닌 마기를 모두 소진할 때까지 폭주를 멈출 수 없었고, 폭주가 멈춘 뒤에는 단전이 깨지고 통각이 돌아오면서 충격으로 급사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한 수 인 것이다.

천마신교에서는 이러한 역혈마공을 사사로이 사용하는 것을 엄중히 금했다.

무분별한 역혈마공의 사용이 자짓 마도 세력의 약화로 번지게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신교 직속의 무력대들에게나 역혈마공이 전수됐다. 물론 그들이라고 해서 아무 때나 역혈마공을 펼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의 지존인 교주나, 그 혈통을 이어받은 자의 명이 있어야 했다.

다만 마광천 소속의 무인들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마광천주 연중혁이 역혈마공의 사용을 그들의 자율로 정해두었기에, 언제든 수틀리면 역혈마공을 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가와의 일전 때一 마광천 고수들이 극독에 중독되었음에도 당가 고수들과 동귀어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혈마공을 펼쳐 죽음을 잠시 뒤로 미루고, 폭주하는 마기를 아낌없이 쏟아냄으로써.

'이건 피하는 게 옳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제 풀에 쓰러질 놈들인데.'

장길은 이번만큼은 당연명이 당해낼 수 없을 거라 여겼다. 소가주의 검술 실력이 예사롭지 않은 면이 있었지만, 지금 천월대 무사들 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전에 비해 몇 배는 더 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이들이 삼십도 아니고 무려 칠십 명이다. 게다가 지금은 독을 꺼내든다고 해도 먹히지 않을 테니....

그러나 당연명은 여전히 고고히 서 있었다. 여전히 도주나 회피 따위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약간 흥미가 이는 것처럼 천월대를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물었다.

"연가? 혹 마광천주와 관련이 있나?"

"그분이 내 사촌형님 이시다."

연우중은 담담히 대답했다. 어차피 천마신교 출신이라는 것을 들킨 마당인데다, 당연명에게서 도주의 낌새가 보이지 않아 선심을 쓴 것이다. 이 정도면 저승으로 가는 노잣길 선물로 충분하겠지.

한편, 연소청은 부친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자신의 혈통이 천마신교로부터 기인하고 있었다니...?

"그래...? 그에겐 빚이 있는데. 잘 되었군."

당연명은 기껍다는 듯 말했다. 모친의 비극이 마광천주 연중혁의 괴벽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언제고 천마신교와 마광천을 손보려 했는데, 연중혁과 피가 이어진 인물이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다니. 살심이 금세 치솟는다.

'중혁 형님께 빚이 있다니. 대체 누구지?'

연우중은 당연명의 말에서 정체를 짐작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예상가는 바가 없었다. 애초에 마광천주 연중혁은 천하 곳곳에 원한이 있는 사람이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준비가 되었으면 얼른 덤벼라. 보아하니 스스로 생명을 불살라 힘을 얻은 듯한데. 불씨가 꺼지기 전에 결판을 내야 하지 않나?"

"...죽음을 재촉하는군."

연우중은 어이가 없었다. 저놈은 천월대의 막강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이만한 전력이면 설사 화경의 고수라도 잡을 만하다고 생각하건만.

죽고 싶다면 죽여줘야겠지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연우중이 입을 열었다.

"천월대 전원. 놈을 참살하라."

대답은 없었다. 이미 역혈마공으로 폭주하는 마기 때문에 반쯤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던 까닭이다. 신호를 기다리던 사냥개처럼, 천월대 무사 칠십 명은 그저 땅을 박차고 쇄도할 뿐이었다.

[어쩔 셈이지?]

상황을 지켜보던 식신 청각은 당연명이 끝까지 검으로 상대할 것 같자 의문을 표했다. 갑자기 드러낸 검술 실력이 확실히 의외이긴 했지만 이번 적들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대량 살상에 적합한 암기 무학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당연명은 다가오는 천월대 무사들을 바라보며 참마검을 들었다. 수평으로 눕히고, 왼쪽으로 뻗는다. 간단한 횡격의 전조다. 기수식치고는 너무나 평범하다.

그러더니 문득 중얼거린다.

"그저 벨 뿐."

어찔 셈이냐는 청각의 물음에 답한 것일까.

이어서 당연명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섬 (繼)."

그러자.

거짓말처럼 세상이 두쪽 났다.

< 99화<현양문(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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