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현양문(7)> >
"이런 미친...!"
연우중의 입에서 당혹 섞인 욕지거리가 터졌다. 누구라도 그의 입장이 된다면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대체 무슨 놈의 검초가....'
단 일검(一劍).
죽립 사내가 행한 동작은 간단했다. 그저 좌에서 우로 뻗는 횡격.
그러나 그 여파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세상에 난데없이 붉은 선이 아로새겨졌다.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의 동쪽 지평선을 보는 것처럼. 언뜻 장엄하게까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문제는 그 붉은 지평선이, 천월대의 위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아무도 피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빛살처럼 닿는 검초를 어찌 피한단 말인가? 인지한 순간 이미 검격에 당한 후일 텐데.
예지의 영역에 다다른 직감을 보유한 게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일 터다.
도합 칠십 명의 육신이 동시에 쪄억 갈라지는 광경은 꽤나 기괴했다.
비명은 없었다. 역혈마공에 의해 통각을 잃은 까닭일까?
절단된 후에도 하반신은 몇 걸음을 더 옮기다 철퍼덕 쓰러졌고, 하반신을 잃은 상반신은 그 뒤편에 떨어져 내부 장기들과 핏물을 울컥울컥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 주변에 피어오르던 검푸른 마기는 시시각각 옅어져갔고 각자의 눈에 일렁이던 귀화 역시 금세 빛을 잃었다.
전멸이라는 단어가 연우중의 뇌리 속에 화인처럼 새겨진다.
충격 그 자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다. 천마신교 내에서도 정예 무력대 중 하나로 인정받는 천월대가, 그것도 역혈마공을 펼쳐 전력을 크게 증강한 상태였는데도 당했다...!
그것도 단 한 수에.
와중에 연우중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천운이었다. 그는 죽립 사내가 가늠하기 힘든 고수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기에, 가벼운 횡격조차 경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느낀 불길한 직감에 자신도 모르게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그게 목숨을 살린 것이다.
"운이 좋군. 반쯤은 죽일 생각이었는데."
당연명의 중얼거림에 연우중은 몸을 흠칫 떨었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정말로 황천에 발을 담갔던 기분이었다. 바닥에 흥건한 핏물과 함께 널브러져 있는 천월대 무사들一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목숨이 끊어질 뻔했다.
'...본교가 왜 현양촌에 와 있는지, 알아낼 생각이 없는 건가?'
연우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민으로 변장하고 있는 교도들은 현양문을 이용한 계획에 대해서 상세히 알지 못한다. 그쯤은 상대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즉, 여기 있는 천월대와 연우중 자신이 모조리 죽고 나면 천마신교가 이곳에서 꾸미고 있던 일은 완전히 묻힌다는 뜻이었다. 설마 그래도 상관없다는 뜻일까.
이건 연우중이 당연명이라는 인물을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당연명의 최대 관심사는 소중한 이들과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굳이 진실을 파헤친다거나 하는 것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마교가 사천 땅에서 꾸미고 있던 일에 대한 호기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저 마교도들을 죽여 없애 계획에 훼방을 놓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우중이 마광천주 연중혁의 사촌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살심이 인 까닭도 있었고.
더군다나 곤륜과 공동이 곧 마교를 상대로 방파대전을 벌이지 않나. 만약 그때 마교가 무너진다면, 여기 현양촌에서 꾸미고 있던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지지 않을까.
'그보다, 이걸 버티는군.'
당연명은 연우중을 일별하고는 참마검을 바라봤다. 참마검은 백열하듯 한껏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는데, 서서히 본래의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확실히 명검이다.
방금 당연명이 펼친 검초一 섬 은, 전생의 스승이었던 검귀의 무학이다. 물론 제대로 된 위력을 선보인 것은 아니었다.용력지체를 바탕으로 쌓아올린 패력진기가 아니라, 당가 심법인 독요청광심법의 내공 독요청광기로 펼쳤으니까. 어느 정도 열화된 느낌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범한 검으로는 검귀의 무학을 절대 감당하지 못한다. 패력(敗乃)은 본질적으로 쇠하게 하는 힘인 까닭이다. 범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를 타고나 장수하는 용력지체가 아니면 패력심법을 익히는 것만으로 단명하기 마련이다. 굳이 패력진기가 아니라도 검귀의 무학에는 패(敗)의 성질이 어려 있었으니, 제대로 검초를 펼쳐내기도 전에 검이 수명을 다하고 만다.
물론 참마검이 버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백열한 검신이 가라앉지 않은 채 연달아 검초를 펼쳐내면 견디지 못하고녹아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건 검을 제작한 야장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검의 재질 문제였다. 오히려 평범한 철로 이만한 검을 만들었으니 야장의 실력이 몹시 뛰어나다고 봐야 했다.
한편.
[뭐냐, 그 검초는…?]
식신 청각이 놀람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당대 검왕이라고 해도 믿겄I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이제 이십 년도 살지 않은 녀석의 검술 수준이 이 정도라고...?]
놀랄 만했다. 청각은 당연명이 화경에 이를 정도의 무위를 이룩한 데다, 상당한 수준의 암기 무학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특히, 독요청광심법을 대성하여 독의 조종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보니 오히려 검술 성취가 더 뛰어난 것 같다.
청각은 생각했다. 이 녀석 사실은 반로환동을 거친 노괴가 아닐까. 아니, 그 전에 당가의 혈육이 맞긴 한가...?
장길과 당미려, 제갈영영 역시 완전히 상식을 벗어난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말이 쉽지, 검 한 자루로 칠십의 인원一그것도 마교의 정예를 감당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무슨 장난하듯이 검을 스윽 긋자 멀찍이 돌진해오던 이들의 뱃가죽이 쩍 갈라지더니 그대로 동강나서 뒹군다. 이 무슨 비현실적인 광경이란 말인가...!
'사람이 맞는 걸까.'
연우중의 아들인 연소청은 아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깨의 통증 따위는 더 이상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어릴 적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검으로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는 검선 여동빈一 그가 마음먹고 검을 휘두르면 산봉우리가 통째로 잘려 나가기도 했다던데, 완전히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아니, 어쩌면 저 사내가 여동빈의 환생이 아닐까.
동시에 죽음이 코앞에 다다랐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부친이 그 마광천주와 같은 혈통임을 알게 되고, 또 상당한 수의 천마신교 무사들이 역혈마공을 시전했을 때만 해도 이 거지 같은 상황이 금세 마무리될 줄로만 알았는데... 죽립 사내의 검격 한 번에 희망이 모두 사라졌다.
"...살려다오."
문득 연우중이 말했다. 그는 빠르게 단념했다. 그 역시 마공진기를 익힌 자로서 역혈마공을 펼쳐 전력의 증대를 도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칠십의 천월대도 아무렇지 않게 도륙해버리는 자를 상대로는 무의미한 발악일 뿐이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건질 수 있는 것이라도 최대한 건지려 노력해봐야겠지.
연우중의 눈길이 잠시 하나뿐인 아들 연소청에게로 향한다. 임무 때문에 만들었던 자식. 분명 처음에는 별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했던가. 점차 커가는 모습을 보며 천마신교에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혈육의 정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죽립 사내一 당연명을 보며, 연우중이 말을 이었다.
"내 목숨은 아깝지 않다. 기꺼이 내어주마. 그대 같은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검을 들이밀었으니, 두 눈이 뽑혀도 할 말이 없다. 다만, 아직 어린 그 아이는 살려다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제 아비가 천마신교와 연관이 있는지도 오늘 처음 알았을 것이다."
"아버님...."
연이은 연우중의 말에 연소청이 울먹였다.
"그저 평범한 아이다. 그대가 마광천주와 어떤 은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마광천주는 나나 그 아이를 혈육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마광천주가 연가의 혈육 중에서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한 명, 본교의 교주뿐이다. 자결하라면 자결하겠다. 그러니 제발 그 아이만큼은...."
절절한 어조였다.
아비가 스스로의 목숨을 제물로 아들의 목숨을 구걸한다一 마음 약한 이라면 충분히 흔들릴 만한 얘기였다. 장길이나 당미려도 조금쯤 찜찜함을 느꼈다. 당연명이 후환을 남기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연소청은 후환으로 여기기 애매했다. 아직 그들의 출신이 당가라는 것을 들키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어찌면 당연명이 자비를 베풀 수도 있지 않을까.
제갈영영만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번 일을 통해 당연명이 어떤 사내인지 조금 더 알 수 있으리라 여겼다. 과연 인정에 휘둘리는 면모를 보여줄지, 아니면 더없이 냉혹한 성정을 드러낼지 궁금했다.
이윽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연명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평범하다라..."
당연명은 말을 길게 늘이며 연소청을 일별하고는, 한쪽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는 이름 모를 야장을 바라봤다.
"보통 평범한 소년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다고 아무한테나 살수를 뿌리지는 않는다. 그동안 어떻게 자랐는지 휜해. 필시 주변 양민들에게 온갖 해악을 끼치고 다녔겠지. 심지어 목숨을 빼앗는 게 처음도 아닌 것 같았고."
"이미 악귀나 다름없는 심성을 지니고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왔는데. 고작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면죄를 받는 게 옳을까. 만약 내가 이곳에 이르지 않았다면 네 아들은 언제고 저 야장의 목숨을 해하였을지 모른다. 혹은 내가 너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가 아니었다면 분명 이쪽이 살해당했겠지."
"잠깐...!"
분위기가 심상찮아지는 것을 느낀 연우중이 땅을 박차려 했다. 그러나 연우중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순간적으로 일어난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의 전신을 옥죈 까닭이다. 당연명의 눈에서 진녹색 안광이 번득였다. 살기의 권역을 발동시킨 것이다. 고도로 정제된 살기가 연우중을 압박했다. 사람의 심혼에 직접 타격을 입힐 정도의 살기다.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으리라.
그 모습을 보며 당연명이 냉랭하게 말했다.
"설령 갱생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참마검을 들면서, 당연명은 문득 생각했다. 검명이 마치 오늘을 예견하고 지어진 것 같다고. 이미 마교도 일백을 참했다. 참마검이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제 작은 마(魔)도 참하려 한다.
"나는 내게 검을 들이댄 자를 살려둘 생각이 없다."
"아아...!"
죽음을 직감한 것일까. 연소청의 극심한 공포가 아로새겨졌다. 살기 한 줄기가 연소청에게 향했기에, 그 역시 제 아비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가 베풀 수 있는 자비는 하나뿐이다. 부자(父子)를 나란히 귀천시켜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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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죽어서 후회하도록一그렇게 덧붙이면서, 당연명이 참마검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한 차례 섬광이 번뜩이고.
거의 동시에 머리통 두 개가 투둑 땅바닥에 떨어졌다.
우연인지 부자(父구)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 100화<현양문(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