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야장 막인철> >
"아니, 정말로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대협께서 나서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목숨을 잃었겠지요. 게다가 이제야 참마검이 제 주인을 찾은 듯하니, 귀천하신 스승님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야장, 막인철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당연명이 빌렸던 참마검을 다시 돌려주려 하자, 막인철은 여러 차례 사양했다. 처음에는 몸을 떨며 말을 더듬었기에, 당연명도 그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참마검이 명검이긴 하나 지금의 당연명에게는 크게 필요치 않은 물건이었다. 이번 생은 검객이 아니라 독과 암기를 다루는 무가인 사천당가의 소가주로 살아갈 참이었으니까. 처음 계획대로 평범한 장검 한 자루면 충분했다. 그래서 돌려주려 한 것이다. 참마검쯤 되는 명검의 값을 치를 돈을 가져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힘없는 자의 물건을 빼앗고 싶지도 않았다.
하나 막인철은 진심으로 참마검을 당연명에게 양도하고자 했다. 겁에 질린 상태이긴 했지만 당연명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서 일백이 넘는 인원이 순식간에 도륙당하는 광경을 목도했기에, 양민에 불과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막인철은 왠지 눈앞의 죽립 사내가 성정이 잔인할지언정 악인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고난 기질이 담대한 것인지, 막인철은 비교적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장길과 당미려, 제갈영영이 눈을 빛냈다.
야장 실력도 그렇고, 이런 면모가 범상치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현양촌 같은 작은 마을에 있기는 아까운 인재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막인철이 침착하게 다시금 의지를 표명하자, 당연명도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막인철이라 했던가?"
"...예. 공자. 그냥 인철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갑작스러운 하대에 살짝 놀랐지만 막인철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이만한 무위를 지닌 인물이 평범한 신분일 리는 없었다. 오히려 지금껏 반공대를 해오던 게 이상한 일이었다.
"검 말고 다른 병장기도 잘 만드나?"
"예. 철로 된 건 무엇이든.... 무언가 부탁하실 게 있으십니까?"
"수리검이나 비도, 우모침 같은 암기들도 만들 수 있겠군?"
"그런 간단한 형태의 암기라면 오히려 더 쉽습니다. 애초에 대량으로 제작하기 용이하게 만들어진 것들이니까요. 특수한 기능을 요하시는 것이라면, 조금 까다로울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럼, 충분하군."
당연명은 그리 말하며 죽립을 살짝 들어올렸다. 절세의 미모가 휜히 드러난다. 막인철은 생전 처음 보는 뛰어난 용모에 한 차례 놀라고, 곧 그의 나이가 많아봐야 약관 정도로 보인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 연배에 그런 성취의 검술을 지니고 있다니...!
차기 검왕을 알현하는 느낌이었다.
당연명이 말했다.
"그대가 그리 말하니, 이 검一 참마(新魔)는 잘 쓰도록 하겠다.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제대로 보답을 해야겠지. 그대는 내가 목숨을 살려주었다 느끼겠지만, 이대로 여기 머무른다면 곧 다시 목숨이 위험해질 거다. 어떻게 일이 벌어졌는지 목격한 자가 있으니까."
"아 "
막인철은 무언가 깨달은 듯 침음을 흘렸다. 애초에 천월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몇 없던 주변의 양민들은 모조리 대피한 뒤였기에 목격자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당연명이 연소청을 비롯한 나머지 인원을 모조리 죽였으니까.
그러나 단 한명一 사건의 발단부터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바로 연소청을 수행하던 몸종 사내.
그가 현양문에 가서 고한다면, 막인철은 모진 고초를 겪으며 오늘 일을 낱낱이 토해내야 할 터였다. 아니, 현양문주 남진순이 연소청을 애지중지했던 것을 생각하면 살아남기 힘들겄I지. 분풀이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곳은 현양촌이고, 현양문이 지배하는 곳이었으니까.
막인철은 사색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연명이 입을 열었다.
"당가로 가라."
"당가... 말씀입니까?"
"그래. 성도로 가는 길쯤은 알겠지. 여기서 조금만 남쪽으로 가면 된다. 걸음이 빠르다면 내일 중으로는 도착할 거다."
막인철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난데없이 당가로 가라니...?
물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현양문은 흑사련 휘하의 사도 방파이고, 그들의 추적을 피하려면 성도로 가는 것이 최선이긴 했다. 무림과 연이 없는 막인철이었지만, 그래도 흑사련주의 명으로 성도가 일종의 불가침 영역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뚱맞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당가로 가면, 그들이 받아주기라도 할까.
"지필묵이 있나?"
"예, 예. 아마 있을 겁니다."
막인철은 금세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 그는 야장이었지만 그래도 기초적인 글자 몇 개는 읽고 쓸 줄 알았다. 주문받은 물건의 수량이나 재고 따위를 관리하기 위해 따로 익혔던 것이다.
아무튼 당연명은 한 손으로 종이를 들고서 그 위에 붓을 휘둘렀다. 그걸 보는 장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 당연명이 내공으로 종이를 고정시켰다는 것을 알아본 까닭이다. 대체 내공 성취가 어느 정도기에 저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당연명이 쓰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문장이 아니었다. 봉위대와 약속된 암어(暗語)였다. 이것만으로 서신의 진위는 어느 정도 보장될 것이다. 행여나 막인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내용이 알려지는 일도 없을 테고.
당연명이 서신을 말아 막인철에게 건네며 말했다.
"소개장이다. 이걸 가져가면 환대를 받을 것이다. 혹 딸린 가족이 있나?"
"홀몸입니다."
"잘 되었군. 바로 떠나도 되겠어. 웬만큼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라면 챙기지 않는 것이 나을 거다."
"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공자께서는 당가와 어떤 관계이신지...?"
막인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알기로 당가는 독과 암기를 주로 사용하는 정도 무가였다. 확실히 이 미청년 검객이 지닌 검술은 놀라운 수준이었지만, 당가와의 관련성이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던 것이다. 호기심이기도 했지만, 신분을 알아둬야 제대로 마음을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하는 것을 보면 당가에 몸을 잠시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당가의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 같았기에.
지금 당장은 당가가 안전할지 몰라도, 차후 주변을 둘러싼 사도 방파들에게 공격받아 멸문당하지는 않을지 그러한 걱정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건 사천땅에서 살아가는 양민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당연명의 대답一
"내가 사천당가의 소가주다."
야장 막인철은 당가에 뼈를 묻기로 다짐했다.
****
막인철과 작별한 후, 당연명 일행은 빠르게 현양촌을 떠났다.
연우중과 천월대를 죽인 이유는 그들이 천마신교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명은 일부러 현양문 근처를 지나며 기감을 확장해 보았지만, 천월대 만큼의 마기를 지닌 인물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저 양민에 가까울 정도로 극소량의 마기를 지닌 이들과, 사파 무학을 익힌 이들의 존재만 느껴졌다.
'뒷일은 봉위대가 처리하겠지.'
당연명은 응장한 필체로 적힌 현양문의 현판을 일별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현양문의 전신이 현양상단이라는 얘기를 막인철에게 듣고 나자, 비로소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당적신一 당미소와 당미려의 부친이자 예비 장인인 그가 말하길, 당가가 처한 상황을 이용해 성도에서 폭리를 취한 상단이 몇 있다고 했다. 그 중에 분명 현양상단이란 이름이 있었다.
막인철에게 건넨 서신에는 막인철을 잘 대해주라는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곳 현양촌에서 마교도들을 조우했으며, 그들이 현양문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해 두었다. 아마 현양문은 마교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당가의 입장에서는 소가주가 현양문 인물에게 공격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봉위대의 충심을 생각하면 조용히 넘어갈 리는 없겠지. 알게 모르게 응징이 가해질 것이다.
또한 당연명은 현양촌에 평범한 양민으로 변장하고 있는 마교도들이 꽤 있으니 그들의 동태를 파악해두라는 명도 내려놓았다. 사실 극소량의 마기를 지닌 이들은 무림인이라기보다는 양민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그래서 당연명은 굳이 그들을 일일이 찾아 죽이지는 않기로 했다. 무언가 수상한 짓을 꾸미거나, 사천의 다른 양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한다면 지체 없이 죽여 없애라는 내용을 첨언해두었을 뿐.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당미려가 말했다. 제갈영영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일행은 이제 죽립과 면사를 벗어던진 상태였다. 현양촌에서 일백이 넘는 인원을 살해한 흉수가 죽립을 쓰고 있었다는 인상착의 정보가 퍼질 테니, 아예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일행은 한 자루씩 검을 차고 있었다. 출수하기 전까지는 당가의 인물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장길과 당미려, 제갈영영은 평범한 장검을, 당연명은 참마검을 패용하고 있었다.
당미려가 당연명의 허리춤을 힐끗 보며 말했다.
"정말 검을 뽑기 전에는 모르겠네. 완전히 낡은 장검으로 보여. 감쪽같아."
당연명은 참마검이 평범하게 보이길 원했다. 뛰어난 병장기에 대한 무인의 욕심은 상인의 물욕이나 고위 관리의 권력욕에 버금간다.
당연한 일이다. 때때로 병장기의 우열이 승부를 가르기도 하니까. 당연명은 괜히 번잡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막인철이 만든 검집은 너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고풍스러운 무늬가 전체적으로 음각되어 있었다. 낡은 천을 둘러 감추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시선을 끄는 일이 될 수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허름한 검집을 쓰는 것인데, 참마검 정도 되는 명검을 아무 검집에나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평범한 검집이 참마검의 예기를 감당하기도 힘들겠지만, 애초에 잘 맞지 않는 검집은 검의 예리함을 깎아먹는다. 검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달갑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때 막인철이 가져온 것이 바로 그의 스승이 만들었다는 검집이었다. 어피(魚皮)를 잘 무두질하여 만든 것으로, 만져보니 상당한 고급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난 까닭인지 겉보기에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一이걸로 하지.
당연명은 몇 번 검을 넣었다 빼 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막인철은 자신이 만든 호화로운 검집을 따로 챙겨 길을 떠났다.
어쨌거나.
누가 봐도 영락없는 무림인의 모습이 된 일행은, 이제 경공을 펼쳐 이동했다. 사파 무인들은 지닌 무공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편이다. 양민들 앞에서는 가급적 무공을 드러내는 일을 삼가는 정파 무인들과는 반대되는 행태였다.
"답답하군."
당연명의 말에 제갈영영이 움찔했다. 일행 중에서 그녀의 무공 성취가 가장 낮았다. 경공 역시 느릴 수밖에 없었고, 다른 이들이 제갈영영의 속도에 맞춰주는 형국이었다.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때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운 당연명이 말했다.
"업혀라."
"예…?"
제갈영영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업히라니, 설마 지금 다음 목적지인 덕양까지 소가주가 업어주겠다는 것일까.
자고로 남녀 간의 신체적인 접촉은 관계를 진전시키기에 가장 빠른 방법이다. 제갈영영은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직 풍만하진 않지만, 제법 봉긋한 가슴을 소가주의 등에 밀착시켜야겠다고.
그러나.
"왜 내 쪽으로 오지?"
당연명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장길에게 업히라는 얘기다.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해야 할 테니까. 야숙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니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一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당연명의 말에, 제갈영영의 얼굴은 붉기를 더해가는 노을빛보다 붉어졌고, 그 모습을 보며 당미려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길은 그저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 101화 <야장 막인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