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당도> >
덕양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죽립과 면사를 벗어던진 당연명 일행에게로 꽂히는 시선이 있긴 했지만 함부로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다. 덕양에서 북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십방(什防)이 있는 까닭이다. 십방에는 심화방이 있었다. 바로 사천지회의 개최지인 것이다.
당연명 일행은 모두 칼을 찬 데다, 장길을 제외하면 약관이 채 되지 않은 나이들이었다. 당연히 사천지회에 참가하는 어느 가문의 후계라고 짐작할 터.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무슨 참변을 당할지 모르니 다들 그저 조심스러운 눈길만 던질 뿐이었다.
덕분에 당연명 일행은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조금 놀라웠던 것은 현양촌에서의 일이 벌써 소문으로 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네, 그거 들었나? 현양촌에서 엄청난 살육이 벌어졌다던데."
"현양촌이라면 현양문의 영역 아닌가. 대력심법과 흑사검법으로 유명한."
"그래. 그곳 문주인 남진순의 둘째 사위가 죽었다는군. 아들과 함께 나란히 머리통이 떨어져 있었다고 해."
"잠깐, 남진순의 둘째 사위라면... 연우중이라는 자 아닌가? 예전에 그자가 검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보통 실력이 아니었네. 몰락한 검가의 후손이라 했던 기억이 나는군."
"맞아. 그런 이름이었네. 잠깐, 연씨 성을 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네만, 아닐 걸세. 마교주의 혈통이 왜 여기 사천까지 흘러들어온단 말인가. 그들 입장에서는 현양문도 삼류문파 정도로 보일 텐데. 본래 성씨를 그대로 쓸 리도 없고. 어쨌건 얘기를 계속 해보게. 연우중 정도 되는 자가 죽었다는 것은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쉿. 마교라니. 입조심하게."
"마교를 마교라 부르지, 그럼 뭐라 부르나? 이보게, 여긴 사천일세.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 사천 땅에서만큼은 마교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사도 천하이자, 흑사련의 영역이니까. 아무리 마교라 해도 흑사련과 부딪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그, 왜, 예전에 마광천이 당가를 쳤을 때도 정작 마광천주는 움직이지 않았지 않나. 마광천주 연중혁이 련주를 꺼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일세. 자칫 마도 무학이 사도 무학의 양분이 될 수도 있음이니."
"...그 얘기는 그만하지. 아무튼 연우중 뿐만 아니라 그의 어린 아들도 나란히 죽어 있었는데, 그 일로 현양문주 남진순의 분노가 대단하다더군. 외손주인 그 아이가 아마 소문주로 내정되어 있었던 모양이야."
"후계 다툼인가?"
"그건 아니라네. 외부 인물이 흉수인 모양이야. 생존한 목격자一 현양문의 하인이 진술한 내용으로는, 우연찮게 대장간에서 시비가 붙었을 뿐이라는군. 상대는 죽립을 쓴 사인방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엄청난 실력의 검객이었다고."
"호오. 확실히 연우중 그자를 죽일 정도면 실력자라 불릴 만하지."
"아니, 연우중을 살해한 것이 문제가 아니네. 현장에는 무려 일백이 넘는 시신이 있었다는군."
"현양문의 호위 병력인가?"
"그들도 있긴 했지만, 비교적 소수였지. 일백에 달하는 인원은 현양문에서도 존재를 알지 못하던 세력이었네. 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서 그곳에 죽어 있는지 의문이었지 만, 하나같이 극도로 단련된 무인들로 보였다고 하네."
"기이하긴 하군. 그만한 인원이 현양문 몰래 숨어 있었다니. 근래 조금 번성했다고는 하나 그 작은 마을에 뭐 먹을 게 있다고. 흠, 그나저나 연우중이라는 자와 관련이 있는 걸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면.... 설마, 정말로 마... 아니, 천마신교와 관계가 있는거 아닌가?"
"모르지. 그래서 입을 조심하라고 한 걸세. 그보다 놀라운 것은 시신에 남은 상흔이었네. 현양문의 호위 병력은 제하고, 꽤나 실력자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세력 일백 명이 단 한 명한테 당한 거라더군."
"아까 말한 죽립 검객이겠군."
"그렇겠지."
"허, 일백 명을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검객은 천하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사천으로 영역을 좁히면 더 적을 테고. 귀천한 태을묵검파의 막인후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신위 아닌가?"
"아니, 그보다 더한 고수라고 봐야 할 걸세. 믿기 힘들지만, 시신들 중 질십이 모두 상하체가 분리되어 죽어 있었는데...."
"있었는데? 원가? 실력 있는 검객이라면 사람을 뼈째 동강내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잖나."
"...단 한 수로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는군. 횡격 한 번에 무려 칠십 명을 죽였다는 얘기야."
"뭐...?"
당연명 일행은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현양촌 혈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이동했다. 풍문이 정말 바람을 타고 퍼지는 것처럼 빨랐다. 실제로는 전서구를 통한 소식이 사람의 발보다 빠르게 전해지는 것이겠지만.
떠드는 이들은 알까.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경악스러울 정도의 무위를 지닌 검객이 바로 옆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당연명 일행은 마차를 구할 참이었다.
꽤 가격이 나갔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화화마방(花晝馬房)이라는 곳을 이용하고자 했는데, 그곳이 바로 심화방 직속의 사업체인 까닭이었다.
"수완이 좋군."
"그러게요."
당연명의 중얼거림에 제갈영영이 맞장구를 쳤다. 이곳 덕양도 그렇고, 십방 근처에 위치한 도시에는 사천지회에 참가하기 위한 인원들이 사천 전역에서 모여들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가 가문이나 방파의 후계였으니, 걸어 다니는 것보다는 마차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신경을 안 쓰는 이들도 있겠지만, 참가자들은 대부분 사천지회에 참가하기 전까지는 갈등을 피하려 할 터였다. 온갖 이권을 두고 다퉈야 하는데, 전력의 보존을 꾀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갈등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사천지회의 주관을 맡은 심화방의 비호를 받는 것이었다. 화화마방의 마차를 이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마방보다 몇 배는 비싼 값을 치러야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화화마방은 얼마 전에야 만들어졌다고 했다. 십방 인근의 도시들에 주로 분포하고, 다른 마방의 말들을 대여하는 식으로 사업을 한다고.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것이다. 심화방이 사천지회를 대목으로 삼아 한 몫 단단히 챙기려 한다는 것을.
당연명 일행 역시 괜한 시비나 번잡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화화마방을 이용하기로 했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요."
화화마방 덕양 지부장은 장길이 건넨 은자를 받아들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비볐다. 전형적인 장사치로 보이는 자였다.
그가 일행을 안내하는 와중에 슬쩍 물어왔다.
"헌앙하신 외양들을 보니 필시 이름 높은 무가나 방파의 분들이심을 짐작하겠습니다. 이 정 모에게 성함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 않을런지...."
"수작부리지 말고 그냥 안내해라. 죽고 싶지 않다면."
당연명이 검파를 매만지며 스산하게 말하자, 스스로를 정 모라고 칭한 화화마방 덕양 지부장은 어이쿠 소리를 내며 빠르게 일행을 마부에게 인계하고는 사라졌다. 사천지회를 주관하는 심화방의 위세를 믿고 나름대로 정보를 캐려 한 모양이었지만, 그것도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 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일행이 모두 올라타자 마부가 익숙하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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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심화방 소속 화화마방을 이용한 덕분일까.
당연명 일행은 무탈하게 십방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정말 의외네요. 이만한 수의 사파 무인들이 집결해 있는데, 별다른 소란조차 없다니."
제갈영영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말했다. 제갈가 사람인 그녀는 호북 출신이다. 몰락해가는 정도 세력과, 나날이 세를 더해가는 마광천, 그리고 약간의 사도 방파들이 공존하며 대립하는 환경에서 컸다. 그녀가 아는 사파 무인들은 대체로 뒷골목 왈패에 가까웠다. 흑도라고도 부르는.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서로 싸우기 일쑤였고, 실력 있는 자들도 겨우 낭인 수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곳 십방에 모여 있는 자들은 어떠한가.
하나같이 통일된 복장을 하고, 날카롭게 벼린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제대로 된 방파의, 제대로 된 정예 병력다운 모습이다. 딱히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기세가 거질어서 그렇지, 하는 행동만 보면 정파의 정예와 별반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이게 흑사련이라는 질서가 있는 사도 천하구나.'
제갈영영은 이채가 도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돌이켜보면 지나오는 동안 양민들의 삶이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흑사련이 군림하는 사천이었으니만큼 사파 세력에 의해 착취당하는 삶을 살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오히려 정, 사, 마가 뒤엉켜 있는 호북의 양민들보다 나은 삶을 사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몇몇 마을에서는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양민들이 흑사련주 유길준을 칭송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당시에는 흘려들었는데, 정말로 흑사련의 치세가 만족스럽다면 양민들이 자진해서 그리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앞으로 사천에는 결코 정도 세력이 들어설 수 없을지도.'
정도 세력을 움직이는 것은 명분이다. 그런데 흑사련이 지금처럼 양민들에게 별반 피해를 끼치지 않고 치세를 이어간다면, 정도 세력이 사천에 진출할 여지가 없다. 이대로라면 당가가 사천 최후의 정도 세력이 되지 않을까.
'확실히 소가주가 대단하긴 하지만....'
제갈영영은 옆에서 걷고 있는 절세 미청년의 얼굴을 흘낏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미모다. 매번 새롭다. 그리고 그 미모보다 더 뛰어난 무학에 대한 자질. 과연 숙부인 제갈창신이 가문의 명운을 걸 만 했다. 일검에 칠십의 생명을 앗아버린 장면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흑사련주와 마광천주가 천수가 다해 죽고 나면 당연명이 천하제일인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제갈영영이 생각하기에, 당가의 부흥은 기정사실이었다. 어떤 재해 같은 일로 당연명이 급사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흑사련을 어찌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중과부적(衆寡不敵: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당해내지 못함)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흑사련주 유길준이 건재하지 않나.
제갈영영이 그렇게 상념에 빠진 사이, 어느새 당연명 일행은 붉은색 전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림 방파라기보다는 거대한 기루같은 느낌을 풍기는 건축 양식이었다.
"짧게나마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장길이 말했다.
"그럼, 건승하십시오. 소가주."
"그래. 곧장 귀가하도록."
당연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이곳 십방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파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사천지회에 참가하는 각 가문과 방파의 후계, 그들의 수행 인원이었다. 아마 사천지회가 파할 때까지 대기하고 있을 심산인 것 같았다.
당연명과 당미 제갈영영이야 초대 받은 손님이었지만, 장길은 아니었다. 당가의 인물이라는 게 밝혀지면 괜한 해코지를 당할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연명은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기 전에 장길이 곧장 가문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심화방 앞에는 방명록 따위를 적는 문사차림의 사내들이 여릿 붓을 들고 앉아 있었다. 사천지회의 참가자들을 확인하고 안에 들이는 절차인 것 같았다. 이미 들어간 이들이 많은 것인지 줄은 길지 않았다.
당연명은 기감에서 장길의 기척이 희미해질 때쯤 앞으로 나섰다. 당미려와 제갈영영이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쓸린다. 출신 방파에 대해 추측하는 말들이 빠르게 오간다. 하지만 검을 패용한 탓인지, 당가의 인물이라 예측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뉘집 자식인지 얼굴 하나는 사천제일이 틀림없겠군一 이라며 누군가 중얼거렸을 때. 문사차림의 사내가 당연명에게 말했다.
"출신 가문이나 방파, 그리고 성명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순간적으로 장내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다들 궁금했던 것이다. 웬만큼 유명한 이들은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었는데, 생전 처음보는 사내가 사천지회의 참가자로 나타났으니까.
이윽고 절세 미청년의 입술이 떼졌다.
"사천당가 당연명이다."
< 102화<당도> > 끝